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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폭우 속 교통사고, 고립된 여성을 구조하다.

by 키랭이

나는 항상 뉴스 기사 속 이 말이 마치 짜인 대본처럼 들렸다. 좋은 일을 한 시민들의 인터뷰 마지막 인사는 꼭 이렇게 끝났기 때문이다.


"저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한때는 기자들이 미리 멘트를 정해주고, "마지막 멘트는 이걸로 해주세요"라고 부탁하는 게 아닐까 의심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발칙한 그 상상은 정확하게 빗나갔다. 몇 년 전, 교통사고를 목격하고 응급처치와 사고수습을 도운 적이 있었는데, 방송 인터뷰에서 나도 모르게 그 말을 해버린 것이다.


"저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오랫동안 반복해서 들어온 말이 무의식 속에 학습된 것처럼, 내 입에서도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밈'처럼 굳어진 문장이 나의 생각과 행동을 대신해 버린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나는 다시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고 말았다.




소나기가 올 거라는 느낌은 구름을 보고 알 수 있었다. 수도꼭지에서 물방울이 찔끔거리듯, 하루 종일 공기 속에 이상한 기운이 흘렀다. 타지에서 집으로 향하던 길, 고속도로 위로 저 멀리 짙은 구름이 낮게 내려앉는 것이 보였다. 예민한 나는 습관처럼 불길한 상상을 하곤 한다.


'이렇게 갑자기 비가 오는 날씨는 꼭 사고가 나는데... 혹시 모르니까 천천히 가야겠다.'


얼마 더 가자 구름은 순식간에 하늘을 삼켰고, 빗줄기는 앞유리를 두드리며 시야를 가렸다. 와이퍼가 분주히 움직였지만 시야는 흐리기만 했다. 그런데 갑자기 앞서가던 차량의 붉은 브레이크등이 연달아 켜지며 도로 전체가 멈춰버렸다. 차의 속도가 줄어들자 역설적이게도 빗소리는 더 크게 들렸다.



'아... 결국 사고가 났구나...'


불길한 예감은 적중하고 말았다. 나는 위험한 행동인 것을 알지만 급하게 여러 차로를 변경했다.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통 교통사고가 나면 대부분 운전자나 승객은 차량 밖에 나와 있어, 크게 위험한 상황이 아니면 나도 그냥 지나치곤 한다. 하지만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은 차량에 승객이 고립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문을 여니 잦아든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졌고, 트럭과 승용차들이 뒤섞여 내가 가는 반대차선으로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손을 크게 흔들고 주변을 계속 살피며 50여 미터 정도를 뛰어갔다. 이윽고 차량 옆에 도착한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며 문을 조심히 열었다.



"괜찮으세요?"

"아... 으..."

"많이 놀라셨죠? 여기 계시면 위험해요. 차량에 탑승한 분은 선생님 말고는 없을까요?"

"ㄴ.. 네..."

"사고 어떻게 났는지 기억나세요?"

"갑자기 미끄러졌는데... 기억이 잘 안 나요."


LOC, 즉 의식소실이 약간 있었던 것 같다. 위급한 순간에도 사고 기전을 물어보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다. 차가 어떻게 부딪혔고, 에어백은 터졌는지 안전벨트는 했는지 등 간단하지만 이런 엑기스 정보들은 환자를 이동시키고 평가하는데 중요한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경추나 척추라도 다쳤으면 혼자서 무리한 탈출을 도우면 절대 안 된다.


"혹시 걸으실 수 있겠어요?"

"ㄴ.. 네..."

"한 번 더 여쭤볼게요. 차량에 다른 분은 없으시죠? 통증이 크게 느껴지는 부위는요?"


여성이 손을 내밀어 내 손을 잡고 옆으로 나오려고 해 말했다.

"자, 제가 부축해 드릴게요. 네, 좋아요. 이제 안전한 곳으로 이동할게요."


많이 놀랐겠지만 다행히 침착하게 내 지시를 따라주었고, 안전지대로 몇 미터 더 걸어 나갔다. 앉을 공간 찾아 여성을 앉힌 후 간단한 평가를 실시했다. 호흡과 맥박이 빠르고 늑골부위의 통증, 몇몇 상처 외에는 다행히 크게 다치지 않은 것 같았다.


"네, 119입니다.

"고생 많으십니다. 직원입니다. 교통사고 현장 나와있고요. 현재 차량 전복 후 원위치 된 상태로 환자 1명 탈출시켜 보호 중입니다. 환자 1명 외에 다른 인원은 없고, 환자도 경상 추정됩니다. 위치는(...)"

"네, 지금 저희 대원들 가고 있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네, 고생하십시오"


119 종합상황실과 통화해 정확한 위치와 출동소방력 조정을 위해 상황을 다시 한번 알려주었다. 장거리 출동 시 정확한 정보제공은 타 사고현장으로의 출동상황 발생 시 소방력 공백을 최소화할 수 있다.


"많이 놀라셨죠? 구급차도 오고 있으니까 여기 잠시 앉아 계세요."


빗줄기가 아직 건재한데 환자만 덩그러니 밖에 두는 것이 죄스러웠지만 여름이라 벗어줄 외투가 없었다. 그리고 아직 할 일이 남아 나는 다시 사고 차량으로 향했다. 보닛에서 나는 연기는 당장의 화재 가능성을 시사하지 않지만 예방적으로 시동을 차단하는 것이 좋다. 에어백을 지나 손을 뻗어 시동을 차단한 후 이어 트렁크를 열었다. 다행히 트렁크에는 삼각대가 있었고, 그것을 꺼내 차량 후방 멀리 설치했다.


삼각대 설치 후 교통 통제와 우회 주행 유도를 하던 중 견인차가 먼저 도착했다.


'역시 견인차 빠르네'


견인차를 사고차량 뒤로 갈 수 있게 유도한 후 환자를 한 번 보고 다시 교통통제에 나섰다. 몇 분 뒤, 순찰차가 보였다. 순찰차에 사고상황과 운전자를 먼저 인계하기 위해 인사를 하고 말을 걸었지만, 인사를 받지 않은 ㅊ채 그대로 옆을 지나쳐갔다.


'음... 사복을 입고 있어서 그런가?'


하는 수없이 다시 도로로 가서 교통통제를 하고 다시 한번 더 119 종합상황실에 연락해 중간상황을 알렸고, 구급차와 펌프차도 도착해 환자를 인계했다.


"비도 오는데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이고, 아닙니다. 안전 근무 하십시오~"


구급대와 인사를 나눈 후 돌아서는데, 아까까지 안정을 취하던 여성분의 목소리가 나를 돌려세웠다.


"저기요... (울먹)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어떻게 해야 되는지 몰라서..."

"아녜요. 교통사고 나면 많이들 당황하시고 정신도 없어서 못 내리고 계속 타 계시는 분들 많아요. 그러다 2차 사고가 많이 나고요. 그리고 제가"


그 말을 하고 말았다.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단어는 조금 달랐지만 바로 그 말이었다. "저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날 내가 내뱉은 말은 오래전부터 뉴스에서 지겹도록 들었던 바로 그 말이었다. 처음엔 학습된 습관처럼 튀어나온 대사라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니 그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누군가에겐 당연하지 않은 그 행동이, 누군가의 생명을 지켰기 때문이다.


어쩌면 동료들은 말할지도 모른다. 삼각대 하나 설치한 게 무슨 대단한 일이냐고. 2차 사고 방지한게 무슨 대단히 큰 일이냐고. 심폐소생술을 한 것도, 화염 속 시민을 구조한 것도 아닌데, 뭐가 그리 특별한 일이냐고. 하지만 나는 안다. 누군가에게는 그 작은 손길이 전부일 수 있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오늘도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정말 당연하게 하고 있는가?' 그리고 언젠가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그 평범한 한마디가 작은 빛으로 남기를 조용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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