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FP 아내와 ISTJ 남편이 사는 얘기

병원비 말고 여행 경비를 청구하는 삶을 위한 손잡고 걷기

by namddang

일요일 오후, 홍양과 함께 걷기로 했다.

목적지는 한양도성 낙산구간이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저 손잡고 걷는 시간이 좋기 때문이다.


점심을 먹고, 진한 커피로 몸을 깨운 뒤 명동을 지나 청계천으로 향했다. 일요일 오후의 명동은 관광객으로 여전히 북적였지만, 청계천에 내려서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청계천의 물 흐르는 소리를 들으면서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머릿속이 한결 가벼워짐을 느꼈다.

물 위를 미끄러지듯 헤엄치는 오리들, 백로인지 왜가리인지 모를 새 한 마리가 물가에 가만히 서 있었다. 모두 느리고, 한가로워 보였다. 그 풍경이 유난히 마음에 들었다.

청계천을 따라 걷다 흥인지문(동대문)에 닿았다.

이곳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낙산구간이 시작된다. 성곽을 따라 이어지는 오르막길은 숨이 조금 찼지만, 쉬지 않고 걸었다.

몇 걸음 오르다 뒤를 돌아보면 보물 1호 흥인지문이 아래로 내려다 보인다. 도시 한복판에서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낙산공원에 이르자 시야가 확 트였다. 케데헌(케이팝 데몬 헌터스)에서 루미와 진우가 함께 걸었던 그곳이다. 이제는 세계적 명소가 되었다.

조망지점에 서니 서울대병원 방향으로 펼쳐진 서울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서울의 몽마르트르 언덕'이라는 별명이 있다는데, 언젠가 파리를 가게 되면 꼭 비교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현실적으로 그날이 언제일지는 모르겠다.


낙산공원을 내려와 마로니에 공원에서 오늘의 걷기를 마쳤다. 총 14km, 18,000보를 걸었다. 몸의 피로보다는 개운함을 느꼈다.

걷는 동안 나눈 말들과 굳이 채우지 않아도 괜찮았던 침묵, 함께 바라본 풍경들이 하루를 가득 채웠다.


봄에 꽃이 필 때나, 가을에 단풍이 들면 이 길은 또 다른 얼굴을 보여줄 것이다. 특히 봄밤에는 야경을 보러 한 번 더 오고 싶다.

꽃도 보고, 야경도 보고 나서, 종로나 을지로에서 술 한잔하기에 더없이 좋은 코스다.

올해는 홍양이 서울에 올 때마다 남은 한양도성 구간을 하나씩 걸어볼 생각이다.

손잡고 서로의 속도에 맞춰 걷는 일, 그 자체가 즐겁다.


요즘 들어 체력과 건강을 유지하는 일이 점점 더 중요한 문제로 다가온다. 12월의 코피 사건 이후, 처음으로 걸어본 장거리였는데 다행히 별일 없이 마쳤다.

안성기 배우가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는 뉴스를 봤다. 직장 동료의 부친도 평소 건강하시다가 얼마 전 독감으로 인한 폐렴 합병증으로 병원에서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전부 남의 이야기 같지 않다.


중년을 넘어서면 식단과 운동, 생활 습관은 물론 정기적인 건강 검진과 예방에도 고르게 신경 써야 한다. 이는 나 자신을 위한 선택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족에게 부담이 되지 않기 위한 준비이기도 하다.

함께 손잡고 오래 걷는 일이 평생 가장 큰 사랑의 표현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아프지 않게 지내는 일은 남은 사람들에게 남길 수 있는 가장 조용한 배려일지도 모른다.

아이들에게 병원비 대신 홍양과 함께하는 여행 경비를 청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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