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4 나의 우울 따위
5/7
한병철의 ‘에로스의 종말’을 밤늦게까지 다 읽었다.
5/8
항우울제 검색을 많이 해서 그런가 인스타그램에 우울증 의료기기 임상실험 광고가 반복해서 뜬다.
김소연의 ‘사랑에는 사랑이 없다’를 읽기 시작했다.
5/9
우울과 연결된 기억 속의 장면
대학원에 다닐 때였다 오래간만에 집에 가서 혼자 라면을 끓여먹으면서
티브이에 나오는 영화 하치이야기를 보았다
하치가 떠나는 주인의 차을 쫓아가는 장면을 보며
울컥 눈물이 터졌다
5/10
매일 이유 없이 코끝이 찡한 순간이 있다. 인스타그램을 업로드 안 한지 두 달이 다 되어 간다.
개인 사진 작업을 멈춘지도.
세상 수많은 이미지 중에서 내 사진이 쓸모없다는, 무가치하다는 생각이다.
우울을 작업으로 표출하고 옮기고 싶다는 갈망이 있는데 몸이 가까이 가지 않는다. 마음이 가지 않는 것일까?
5/11
정말이지 밤에만 기분이 좀 좋아지고
그전에는 기분이 저조하다.
아내의 말로는 표정도 다르다고 한다.
5/12
시장에 갔다. 시장 들어가는 길 크게 틀어놓은 음악소리가
견디기 힘들다.
사람들의 목소리도 짜증을 불러일으킨다.
수면제를 먹었는데도 새벽에 중간에 깼다.
5/13
진료 시작한 지 8주째
별로 호전되는 기분이 안 든다.
기분 안 좋은 일이 있었는데 그 후로 또 기분이 다운되어있다. 회복이 잘 안된다.
자주 이유 없이 코끝이 찡한 눈시울이 젖는 순간이 있다.
자책, 귀찮음. 부정적 생각, 불안, 예민이 주된 정서를 이루고 있다
낮에는 쳐져있다가 밤이 되면 좀 밝아지는 기분 식욕도 밤에만 좋다고 하였다
일반적 우울증의 증상이라고 의사가 대답했다
하루 중에 아침이 제일 힘든 게 우울증이라고 한다.
아침 약 바꿔보기로 했다
코팩사엑스알서방캡슐37.5mg(벤라팍신염산염)
https://nedrug.mfds.go.kr/pbp/CCBBB01/getItemDetail?itemSeq=201001057
산도스설트랄린정(설트랄린염산염)
https://nedrug.mfds.go.kr/pbp/CCBBB01/getItemDetail?itemSeq=200410506
수면제 1알 더 해서 복용 후 - 별로 다른 점은 없다. 수면제를 먹고 잤는데도 새벽에 깬 날이 한 번 있다.
취침 전 약은 일단 유지하기로 했다
집중력, 기억력이 좀 떨어진 것 같다 책을 읽는데 눈에 잘 안 들어오고 다 읽은 후에 기억이 잘 안 난다는 이야기를 깜박하고 안 했다 기억력이 떨어졌다는 기억이 약해지다니.
보통 약 복용을 언제까지 하나요? 나아지는 게 더디게 느껴지니까 좀 갑갑함과 불안함이 든다.
상담치료를 받아보는 건 어떨까요? 비용 문제도 있고 고민된다고 했다
상담을 병행하는 것도 좋다고 의원을 추천해줬는데 너무 멀다 일단 좀 더 생각해봐야겠다
5/14
책을 읽는데 다 시니컬하게 받아들여진다. 흥미가 일어나지 않는다.
‘글쓰기의 최전선’을 보면서도 학인이라는 사람들 또한 다 비슷한 생각과 경향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것 아닌가? 라며. 나 또한 비슷한 성향임에도 공감 앞에 냉소가 자리 잡고 있다.
김신식의 ‘다소 곤란한 감정’을 다시 읽었다. http://www.yes24.com/Product/Goods/89316569
"하지만 우울을 다루는 일반인 기록자의 결과물이 모두 주목받을 순 없다.... 우울 매개자 사이에서 서사 간 경합이 벌어지는 것이다. 경합은 출판 시장을 위시해 현재 감정 소비 경험을 독려하는 콘텐츠의 활황과 무관하지 않다. 이를 통해 작금의 우울 매개자는 어떻게 우울을 빼어나게 서사화할 것인가라는 전업 작가의 고충을 떠안았다."
-p.38 김신식, 2020, '다소 곤란한 감정', 프시케의 숲
우울 매개자에 대한 이야기에 끄덕이면서도 명사 뒤에 마침표를 찍는 문장.
거슬리면서도 이어 버그가 되는 느낌에 다소 곤란하다.
우울증의 특징 중 하나가 괜스레 인가?
괜스레 코가 찡하고 눈이 시리고
괜스레 죽음을 떠올리고
괜스레 빈정대는 생각들이 책이든 뭐든 만사 흥미를 끌어내린다.
여러 책을 붙들고 있지만 한 권을 끝까지 다 읽기가 힘들다.
그나마 얇은 ‘에로스의 종말’만 다 읽었다.
내가 우울 매개자라면 내 글의 제목은 '나의 초라한 우울증'이 될라나?
누가 나의 우울 따위에 관심을 가질까?
우울을 매개자를 생각하기 이 전에
글을 쓰는 건 일단 스스로 우울에서 좀 벗어나 보려고 하는 짓인 것 같다.
그래서 글이 내가 편한 대로 파편화되는 것 같다 단속적인 기억의 이미지처럼.
매끈한 서사에 신경을 좀 덜 쓰려한다.
그냥 뱉어버리고
글을 쓰면 생각이 정리된다고도 하지만
나에게 이 글쓰기는 정리한다기보다는 입 속에 있는 갈치 살 사이 가시들을 뭉툭한 혀로 헤집고 뱉어내는 느낌이다
예술가는 멜랑콜리아의 기질을 타고났다고 한다. 흑담즙이 절여진 예술가들
예전엔 뭉크가 우울 끝판왕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울증을 앓고 있는 요즘 우울은 예술과 만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우울에서 벗어나려 허우적거리거나 가만히 뜨려고 하는 시점에 바로 예술이 있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다.
뭉크가 웅크리고 있던 곳은 우울의 해변이 아니었을까.
이옥토가 찍은'다소 곤란한 감정' 표지 사진 속 뿌연 형상이 예전 택시 위의 여자를 떠오르게 했다
우울과 연결된 기억 속의 장면
철야 후 집에 오는 택시밖에 보았던 -보였던?-, 보닛 위에 앉아있던 댕기머리를 땋은 여자의 뒷모습.
저 앞 강변북로를 가로질러 걷고 있던 사람.
꿈이었는지 헛 게 보였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택시 기사에게 강변북로는 원래 사람이 걸어 다니지 못하는 데 아니에요? 저 사람은 뭐죠?라고 물으려고 목에 뻣뻣하게 힘이 들어갔다가 이상하게 볼까 봐 입을 다물었었다
꿈이 현실과 분리되지 않았을 때 당혹감 두려움
자신의 지각을 믿기 힘든 경험이 불안해했다
그 생생하고 흐릿한 경험 혹은 망상이 아직도 한 번씩 떠오른다.
그래 택시 위의 여자는 아직은 이옥토의 사진보다 더 생생하다
우울함에 빠지면 자주 드는 생각들이 있다.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앞서 이야기 한 철야 후 택시 안
어릴 적 공원에서 엄마를 찾던 순간
짙은 녹색 풀들 단단한 석대 검은 철제 울타리
할아버지의 자살시도
아드득
단단한 걸 씹는 소리가 나던
모로 누워있던 할아버지의 뒷모습
할아버진 왜 죽고 싶어 하셨을까?
나중에 상담을 하면서 할아버지의 심정에 대해 추측을 해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