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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기 Sep 06. 2020

분홍빛 살덩이 꿈

Ep.05 수면제가 꿈을 붙잡아갔지만 꿈은 악몽으로 도망쳐 나왔다.

5/13
유튜브에 우울증 관련 동영상을 몇 개 보았다.
약을 먹는 것에 대한 고충 고민에 공감이 갔다.
소진을 겪은 사람들이 많다는 것에도.
그리고 '안 해도 돼'라는 말이 위로가 되었다.

5/17
보스토크 6호 큐티큐티 멜랑콜리의 멜랑콜리 사진을 다시 들췄다.
18호 렌 항의 사진도 다시 보았다. 
글은 잘 안 읽힌다.
다시 들춰보았다는 것에 의의를 두어야지.



5/18
아무것도 하기 싫고 아무 데도 나가기 싫었는데 아내가 꼬셔서 나갔다.
아내가 향수를 선물해줬다.
나도 좋아하고 아내도 좋아하는 향이다.


향수가 갖고 싶었다.
땀도 기름기도 많은 몸뚱아리가 싫어서.
약을 복용하면서 술을 안 마시니까 살이 빠졌다.
거울을 보면  살 빠진 몸이 예전보다 좀 보기가 낫다.

5/19
책 읽은 게 기억이 잘 안 나다는 생각에
똥 멍청이가 된 거 같다. 
기억력과 집중력이 약해지는 것도 우울증 때문인지 모르겠다. 갑갑하고 불안하다. 어디 멍이 들면 부딪혀서 그렇구나, 콧물이나 기침이라도 나면 감기 때문이구나 라고 인지하겠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라 막막하다. 우울증의 증상인 건지 그냥 내 기분인지. 



수면제 복용 초반 꿈을 꾸지 않았다. 
꿈도 없는 깊은 잠이 가벼운 아침을 주었지만
나의 세계를 약에게 뺏긴 듯한 기분이었다. 
수면제 내성이 생겼나 싶을 즈음에 -내성이 생겼나 싶은 건 그냥 내 생각이다-
새벽꿈을 다시 꾼다. 
아침은 좀 멍해졌고
오직 나만 가질 수 있는 세계가 다시 생겼다. 
그러나 대부분 기분 좋은 경험은 아니다. 

어제였나 그저께였나
꿈에 지름이 허벅지 만한 원통형의 분홍빛 고깃덩이가
기계로 스렁스렁 썰리는 장면이 나왔는데
공포스러웠다. 

배경은 어둡고 그 고기와 기계만 보였다.
테두리만 하얗고 속엔 하얀 지방이 하나도 없는 생고기 덩어리였다.  

어제오늘 저녁
가슴 갑갑함이 있었다. 

5/20
나의 우울증을 올려볼까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도 나의 우울에 관심이나 좋아요를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게 더 우울하게 만들 것 같다
40대 아저씨의 우울은 매력적이지 않다. 
'스물일곱'이 지나버린 초라하고 신선하지 않은 우울. 

(이랬다가 브런치에 글을 올리고 있다. 관심받고 싶은 우울증 환자)



"1980년 어느 봄날. 스물한 살의 프란체스카 우드먼은 자살을 시도한다. 그때 겨울 '어떤 혼란스런 내면의 기하학 Some Disordered Interior Geometries'이라는 제목의 작은 사진집을 출간했지만 반응은 소원했다. 예술가 지원금 신청은 거부당했으며 아끼던 자전거를 도둑맞았다. 프란체스카 우드먼이 고수하던 '영적인 분위기의 자화상' '고딕적인 픽션의 느낌'에 대해 세상은 냉담했다. 실비아 플라스처럼 그녀는 사진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 서운함을 느꼈다." 

--------------------p.125, 김신식, 우리는 그렇게 실비아 플라스처럼, 보스토크 6호 큐티큐티 멜랑콜리 중에서  


실비아 플라스, 프란체스카 우드먼, 라우라 호스퍼스 

이들은 젊었다. 지금 내 나이의 1/2도 안 되는, 이미? 벌써? 내게서 지나가버린 20대에 저들은 우울했다.  

내게 우울증 진단은 너무 늦게 내려졌다. 세상의 반응은 소원할 것이다. 아무도 관심 없을걸.


(작년에 사진집을 독립출판으로 냈지만 반응은 소원했다. 2군데의 책방에서 입고를 거절했고 1군데는 입고 문의 메일에 답변이 없었다. 4군데의 책방에 입고했는데 딱 한 권 팔렸다.

2020년 7월 한 책방은 폐점해서 반품이 들어왔다. 예술가 지원금은 받을 자격도 되지 않았다.) 



5/21
스스로 어딘가에 갇혀있고 껍질을 깨고 나가지 못한다는 마음이 든다. 이미 글러먹었다. 벗어날 수 없다는 심정에 슬프고 갑갑하다. 

5/22
세상 온갖 나쁜 캐릭터를 끌어들이는 지나친 죄책감
며칠째 진한 초콜릿(84%)을 많이 먹고 있다. 

5/23
간식을 많이 먹었다. 
뭔가 다 먹어치워버리고 싶었다. 
다 죽어버려라! 망해버려라!라는 마음이 좀 있는 것 같다
과자를 여러 봉지 사서 한 자리에서 다 먹었다. 
밤에는 급기야 후라이드 치킨을 시켜 한 마리 다 먹어놓고는 이렇게 처먹는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술을 끊고 살 빠진 이 몸을 유지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는 반면 망가지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5/24
헛살었다. 
라는 생각

내 우울은 못 먹을 정도로 쉬어서 버려진 오이지 같다. 싱크대 버려져서 양념이 씻겨나간, 음식물 쓰레기봉투에 들어가기 직전의 밍밍하고 축축한고 시들한 오이지. 

사회관계가 없다. 
만나는 친구도 없다. 
아내가 일을 하고 있는 시간 
쓸쓸하다. 
그런데 사람들을 만나고 대하는 게 싫다. 

배고파서 먹을 걸 잔뜩 사 왔는데
꺼내 놓으니까 먹기 싫다. 

인스타 사진을 내리고 있다
700여 개였는데 99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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