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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기 Jun 02. 2016

노란 잠수함

마일리 멜로이의 '트래비스 B'를 읽고

    


  반지가 없어졌다. 변속기 앞에 잘 놔두었다고 생각했는데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따박따박 빈틈없는 말투로 자신을 질타할 피터의 목소리가 벌써부터 관자놀이를 두드리는 것 같았다. '그건 그런 게 아니야'라는 말로 시작하는 그의 잔소리를 생각하자 목이 거북이처럼 움츠러들었다. 이 닷선을 샀을 때도 그랬다. '넌 그 차가 어떤 차인 줄 아니?'로 말문을 연 피터는 2차 세계대전 (2차였는지 1차였는지 생각도 나지 않는다) 이전부터 시작된 그 자동차의 역사를 죽 읊었고 일본 자동차의 특성과 미국 자동차 산업에 미친 영향에 대한 분석까지 들먹였다.

'내가 왜 공과대학 논문 발표 같은 얘기를 듣고 있어야 하지? 하……. 뉴욕 가고 싶다.' 

귓등으로 흘러내리는 피터의 말에 온몸이 잠길 것 같았다. 베스는 '딴생각'이라는 스노클로 겨우 호흡을 했다.          

  물론 연애 초반에는 박학다식하고 지적인 피터의 모습에 매력을 느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피터에게 베스는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을 자랑할 상대로 취급될 뿐인 것 같았다. 피터의 깔끔한 스타일과 세심한 배려가 마음에 들었지만 그것은 곧 베스를 피곤하게 하는 편집증적인 강박과 쪼잔함으로 변했다. 그의 옷장에 일정한 간격으로 걸려있는 똑같은 스타일의 검은 양복을 볼 때마다 브래지어에 호크를 대여섯 줄은 더 박아놓은 것처럼 느껴졌다. 베스는 그저 닷선의 노란색이 마음에 들었다. 베스에게 그 자동차는 심심한 풍경의 미줄라에서 벗어나 뉴욕의 번화한 거리를 유유히 돌아다니게 해주는 '옐로 서브마린'같은 존재였다. 베스는 머릿속으로 비틀스의 노래를 흥얼거렸고 피터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입술을 놀리고 있었다.          

  피터는 그 입술로 어디선가 수십 번 반복 연습한 것 같은 프러포즈 멘트를 재생하면서 베스에게 미니멀한 약혼반지를 끼워주었고, 베스는 외딴 길에서 서있는 마음으로 그 반지를 받았다. 지금 바로 그 반지의 행방이 묘연하다. 운전석에 앉자마자 안전띠를 채우기 전에 브래지어 호크부터 풀어버리고 운전대를 잡았다. 그러나 탄력 없는 모직 스커트를 입고 왕복 18시간을 운전했던 화요일은 몸 전체에 깁스를 한 것 같은 하루였다. 목요일, 굳이 오전 업무를 마치고 가라는 상사의 당부에 토씨 하나 달지 못한 신입사원 베스는 대신 여분의 편한 옷을 챙기는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반지가 사라진 건, 출발하기 전 급하게 차 안에서 초록색 터틀넥 스웨터와 청바지로 옷을 갈아입을 때라고 생각되었다. 어쩔 수 없다. 아직 갈 길이 너무 멀었다. 닷선의 라이트 불빛이 다시 부르르르 떨렸다.       


   


  베스는 성큼성큼 복도를 지나 교실에 들어서면서 바로 보폭을 줄이고 코트를 벗어 의자에 자연스럽게 툭 던졌다. 선생들에게 인쇄물을 나눠주면서 여유 있는 미소를 살짝 보여주었다. 오늘의 교육 주제를 칠판에 쓸 때 분필 잡은 손에 신경을 쓰다 보니 약지가 시작되는 곳이 더 도드라져 하얗게 보였다. 그 후로는 수업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모르게 아홉 시가 되었다.          

  "교실 문 좀 잠글게요." 베스가 말했다. 

화요일에 카페를 안내해 준 남자였다. 교실 앞문으로 다가온 남자는 나가겠다는 건지 교실에 있겠다는 건지 헷갈리게 머뭇거렸다. 약간 절룩거리는 그의 걸음걸이 때문에 더 그렇게 보였는지도 모른다

"아, 네. 카페에 가실래요?"

교실 문을 잠그느라 고개를 숙이고 있던 베스가 고개만 끄덕이다가 문 손잡이를 한번 밀어보고 확인한 후 대답했다.

"오 분 정도는 괜찮아요."

"아, 네. 가실까요?"

앞장을 서겠다는 건지 먼저 가라는 건지 헷갈리게 또 머뭇거리던 남자는 베스가 앞으로 손짓을 하자 그제야 앞장을 섰다. 뒤에서 그의 걸음걸이를 보았다. 한 걸음을 뗄 때마다 오른쪽 어깨가 조금 더 내려가는 것 같았다. 계속 보고 있던 베스의 고개도 살짝 기울어졌다. 복도가 삐딱해졌다. 그 남자의 발걸음이 피터의 옷장 속 가지런한 옷걸이를 조금씩 톡톡 치고 있는 듯했다. 

카페에 들어와서 주문한 음식들이 나올 때까지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베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이름도 모르네요." 그는 주머니 깊숙이 넣어둔 명함을 한참 찾다가 꺼내 보여주듯 입을 열었다.

"쳇 모랜이요."

간단하게 대답했다. 더 많은 말을 기다리다가 베스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다리는 왜 그렇게 된 건지 물어봐도 돼요?"

자신의 무릎에 땀을 닦듯이 손바닥을 문질렀다. 의외로 그는 아주 간단하게 그의 사연을 얘기했다. '피터라면 어떻게 얘기했을까?'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아마 집안의 내력부터 시작해서 미국으로 들어온 독일계 이민자들의 사연, 부모님의 생애, 그의 성장기 블라블라……. 다시 베스는 공상의 스노클링을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말에 관한 쳇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던 베스는 닷선 안 어딘가에 있을 반지가 다시 생각났고 또 운전을 할 걱정에 명치가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딸각 소리가 나지 않게 문 손잡이를 잡은 채 살금살금 방 안으로 들어온 베스는 침대를 향해 천천히 눈을 돌렸다. 일곱 시가 넘은 시간에 햇볕은 이미 침대를 향해 방바닥을 기어가고 있었고 침대 위의 피터는 아직 자고 있는 것 같았다. 욕실 앞에서 터틀넥 스웨터를 벗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후…….'  저절로 후련한 긴 숨이 내쉬어졌다. 내려놓은 스웨터는 거북이 등껍질처럼 그 자체로 모양을 유지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브래지어는 어쩐 거야?"

뒤에서 잠결이라곤 말끔히 쓸어 내버린 듯한 피터의 목소리가 울렸다.

"차에서 벗었어."

짜증이 확 치밀었다.

"9시간을 운전하고 이제 들어온 사람에게 하는 말이 고작 그거야?"

"아니 그러게 누가 벨그레이드랑 글렌다이브를 헷갈리래? 거기서 거기까진 무려 5시간 거리야. 371마일이나 된다고. 어떻게 그걸 혼동할 수 있지?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탓에 하루에 742마일을 더 운전하고 있는 거잖아. 10시간을 길바닥에 버리고 온 거고 그것 때문에 난……." 

"일절만 하자!"

"왜 말을 끊어?"

침대에서 내려오고 있는 피터를 보고 베스는 바로 욕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밖에서 웅웅 거리는 피터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샤워기를 틀어 그 소리를 덮었다. '말을 끊다니!' 베스가 글렌다이브로 교육을 가야 한다는 얘기를 꺼냈을 때 피터는 스타스키와 허치인지 뭔지 하는 우스꽝스러운 형사 둘이 나오는 텔레비전에서 눈도 떼지 않고 있었다. 텔레비전을 보던 피터와는 다른 눈빛으로 베스는 욕실 거울을 봤다. 곱슬머리가 푸석했다. 거울이 얼룩진 건지 눈이 침침한 건지 흐릿한 시야에 얼굴을 손으로 감싸 내리자 또 반지의 빈자리가 보였다. 반지가 언제부터 없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오늘 반지가 없다는 걸 알아챘지만, 반지의 부재가 바로 오늘부터인지 훨씬 전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청바지를 내려 오른발에 걸친 채 문을 향해 발을 휘둘렀다. 문을 때릴 거라 생각한 청바지가 욕실 천장을 치고 툭 떨어졌다. 돌아서서 욕조로 걸어 들어가는 베스의 어깨가 한쪽으로 축 처졌다.          

  지난주는 베스의 평생 가장 긴 주말이었다. 피터는 집요하게 지금 하고 있는 교육을 그만두라고 재촉했고 그 일을 처리하기 위해 베스는 회사와 변호사협회, 학교에 몇 차례나 연락을 해봐야 했다. 전화를 걸고 팩스를 보냈다. 회사 직원들이 회사일을 혼자 다 하고 있는 듯 한 베스를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유심히 볼 정도였다. 지난한 과정을 거쳐 마침내 최근 글렌다이브에서 개업을 한 변호사와 연결이 되었다.

"곧 알게 되겠지만, 최근에 이혼을 해서 제가 그 일을 맡을 수 있겠습니다."     

"이번 일이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고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해."

수업을 정리했다고 이야기하는 베스에게 피터는 건조하게, 하지만 자신의 넓은 아량을 자랑이라도 하듯 입 꼬리를 옆으로 당기며 답했다.

'너란 녀석은 정말이지…….'

베스는 반지 대신 피터를 향한 체념을 주먹에 꼬옥 쥔 채 뒤로 숨기면서 "그래. 화요일에 마지막으로 다녀오면 돼."라고 짧은 대답을 뱉었다.  


        


   말을 탔다. 

“세상에.”

베스의 머릿결을 스치고 가는 바람이 따뜻하고 부드러웠고, 촉촉한 밤공기가 볼에 신선하게 닿았다. 말이 들썩일 때마다 쳇의 허벅지에 가까워지는 몸이 약간 불편했지만, 지난 주말을 생각하면 그런 것은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 말이라니. 쳇의 트럭이 아닌 말이 주차장으로 들어오는 것을 볼 때부터 이미 베스는 허리가 꼿꼿이 펴지고 있었다.

쳇의 손을 잡고 어색하게 말에 오르자 밤 풍경의 소점이 달라졌다. 말 위에서 보는 어두운 거리는 훨씬 근사했다. 따각 따각 아스팔트를 밟는 말발굽 소리가 들리자 마사지 의자처럼 말 근육의 움직임이 허벅지로 전해졌다. 단단하지만 경쾌하고 탄력 있게 움직이는 말의 근육이 애써 균형 잡힌 어조를 유지하려는 피터의 말보다 더 포근하게 베스를 어루만져 주고 있었다. 말이 많은 피터에게선 정작 듣고 싶은 말은 들을 수 없었는데, 아무 말 없이 카페를 향해가는 말이 오히려 그 위로를 전해주는 것 같았다. 말의 움직임과 함께 박자를 맞추면서 말이 얼마나 따뜻한가라는 생각 말고는 머릿속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말과 함께 아래로 위로 흔들리는 몸에서 머릿속을 복잡하게 하던 피터의 말들이 탱글한 말의 엉덩이 뒤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 말 위에서는 쳇의 양쪽 어깨도 똑같이 오르내렸다. 그 시간을 영원히 묶어둘 것 같던 말 갈퀴가 아래로 가라앉자 카페의 네온사인이 눈앞에 들어왔다. 말에서 내린 베스는 말의 등과 허벅다리를 쓰다듬었다.

"고마워." 

말을 묶으러 가는 쳇과 눈이 마주치자 말에게 속삭인 것을 들킨 것 같아 눈을 크게  뜨고 웃음을 보였다. 베스는 카페에서 음식을 기다리며 뉴욕의 거리를 누비는 노란 택시만큼이나 한적한 어느 도시의 밤길을 말을 타고 가르는 것 또한 멋지다고 생각했다.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은 기분에 베스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쳇에게 늘어놓았다. 배가 고팠다. 햄버거가 화요일에 먹은 빵보다 훨씬 맛있었다. 케첩이 묻은 손가락을 쪼옥 빨면서 식사를 마무리했다.

"열 시네요." 

베스는 슬슬 일어나야 한다는 걸 내비쳤다.

"말을 데려오다니 정말 다정하네요. 차까지 다시 데려다 줄래요?"

베스는 다시 말 위에 올랐고 쳇의 허리에 팔을 두르자 말 위가 처음보다 훨씬 편안해졌다. 주차장으로 천천히 가는 말을 타면서 베스는 아무리 늦어도 좋으니 미줄라까지 그냥 이렇게 말을 타고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말 위에서 해가 뜨는 걸 보고 싶었다. 어둑한 학교 주차장에 다다르자 노란색 닷선이 마치 해라도 되는 것처럼 뚜렷해지고 있었다.          




  닷선을 주차장에 세우고 서류 가방을 뒤지던 베스는 자신의 눈앞에 쳇이 나타난 것 보고 흠칫 놀랐다. 

"당신을 보러 왔어요."

그는 최대한 반듯이 선 채로 말을 건넸다. 뭐라 딱히 대답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쳇은 베스가 수업을 그만둬서 너무 아쉽다고 했다. 

"화요일에 말하려고 했어요. 이미 대체 교사를 부탁해둔 상태였어요, 운전 때문에요. 어제 구해진 거죠."

입을 떼자 베스 자신도 모르게 변명거리가 줄줄 이어져 나왔다.

"그렇군요."

"네, 그렇게 됐네요." 조금은 미안한 마음에 얼른 대화를 얼버무렸다.

쳇이 뭔가 더 말하는 것 같았는데 차에서 내리는 피터가 보였다. 손을 흔들며 미소를 보여주었다. 다시 고개를 돌려 쳇을 보았다. 그의 입술이 달싹거렸지만 못 본 척 주차장을 둘러보았다.

"뭘 어쩌려는 게 아니에요." 쳇이 말했다.

"그래요."

베스가 어떤 말을 더해주기를 기다리듯이 쳇은 거기에 서 있었다.

베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만 가볼게요. 가서 먹이를 줘야겠어요."

"……. 네. 말들에게 안부 전해주세요." 베스는 말을 뱉자마자 후회했다. 9시간 넘게 차를 달려온 사람에게 말의 안부를 묻다니.

"네, 그럼."

쳇은 돌아서서 자신의 트럭으로 향했다. 베스는 잠시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고개가 기울어지고 있음을 알아챘다. 무언가 머릿속이 분명해지는 것 같았다. 피터에게 이제 약혼반지에 대해 얘기해야겠다고. 아니, 우리의 약혼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겠다는 얘기를 하리라 마음먹었다. 문을 열어 잠깐 선 채로 허리를 꼿꼿이 세운 베스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아침햇살이 주차장에 남겨진 닷선을 더 샛노랗게 칠하고 있었다.





책소개

마일리 멜로이 소설집 '지금 두 가지 길을 다 갈수만 있다면'

http://www.yes24.com/Product/Goods/11418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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