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태의 '성묘'를 읽고
"어, 아이들은 아픈 데 없고? 유 서방은?"
"그래 나야 일없다. 너희들이 건강하면 됐지."
"이번에 전세 뺀다는 것은 그리해도 괜찮은 거냐?"
"에헤이~ 안가~. 이번에 덕곡댁이 아들놈 직장 옮겼다고…. 그거 물어보러 간다고, 같이 가자고 워낙 달라붙어서 한번 가 줬지, 나는 원래 안 간다. 어쨌든 단단히 챙겨."
"그려…. 오라비하고도 연락 좀 자주 하고, 그래도 제일 오래 같이 사는 건 형제뿐이다."
"알았어, 알았어. 내 아무 말도 안 한다. 김치는 아직 많이 남았간? 고추 마르면 빻아서 보내주마."
"너희 아버지야 맨날 그렇지 뭐 아 몰라 끊어 전화비 많이 나온다. 오냐 그래 들어가거라."
대전 딸애와 통화를 끝내고 수화기를 내려놓았지만 심 씨는 미안한 마음은 차마 내려놓지 못했다.
집을 사도 은행 거지 자기들 거냐는 딸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대쪽 같은 성격의 영감과 아등바등 살았건만 자식 집 사는데 보태줄 형편도 안 되는 자신의 처지가 서글펐다.
문득 뭐가 생각난 듯 손으로는 허리를 잡고 썰매를 타듯 미싱으로 몸을 끌었다. 반짇고리함 안에서 정성스럽게 접어놓은 노란 종이를 꺼내 펼쳐보았다.
‘옴 아모가 바이로차나 마하무드라 마니 파드마 츠바라 프라바를타야 훔.’
덕곡 댁과 같이 찾아갔던 심학산 선녀 보살이 써준 것이었다.
"옴……. 아모가…….바이……. 어허, 참……."
한 글자씩 차근차근 읽는 것도 버거웠다.
덕곡 댁이 봉투를 상 위에 내놓은 뒤, 무릎을 꿇은 채 방석을 타고 옆으로 미끄러진다. 심 씨가 그 자리를 채운다. 자식들의 사주를 불러줬다. 선녀 보살이 뭔가 휘갈기다가 입을 열었다.
"문서 잡을 일 있어. 조심하라 그러고."
"아 네 안산 큰 애가 집을 하나……."
"거기는 물 조심하라고 해. 아주 큰물이구먼."
"아, 네…. 딸이 또…."
말을 막고 선녀 보살이 물었다.
"그런데 어디 갔다 온 거야?"
"네?"
"영감 말이야. 어디 갔다 온 거냐고? 멀리도 갔다 왔구먼."
'하이고 정말 용한가 보네.' 속으로 놀라서 심 씨는 대답했다.
"그러잖아도 영감이 젊을 때 월남을 갔다 왔는데요. 잠을 잘 못 자요. 맨날 죽은 전우들이 꿈에 나온다고……. 여태껏 베개 밑에 대검인가 뭔가 커다란 칼을 놔둬야 잠이 들어요.
"이미 죽은 양반들이 칼이 무섭간?"
선녀 보살이 말했다.
그리고는 눈을 감고 입을 우물우물하더니 노란 종이에 뭔가를 한참 또 휘갈겼다
"이거 가져가 "
"영감 사루마다 있지? 그거 중에 좋은 놈으로 하나 머리에 쓰고 이거 백팔 번 외우라고."
"이게 뭔데요, 부적인가요?"
"뭐란 들 알겠어? 아, 알든 말든. 자, 광명진언이라고. 넋 달래주는 거니까 정성 들여서 읊어주라고."
"아……. 네네."
심 씨도 흰 봉투를 상 위에 올려놓고 노란 종이는 노란 봉투에 넣어 잘 챙겼다.
심 씨가 고추밭에서 허리를 삐끗하고는 뒷방에 누운 지 며칠이 지났다. 박 노인의 눈치에 뒤통수가 따끔거렸다. 박 노인이 평소에 잘 보지도 않던 드라마에 욕지거리 한다. 심 씨는 그 목소리가 듣기 싫어 이불을 푹 덮어썼다. 영감 속옷을 슬며시 머리에 쓰고는 광명진언을 외우려고 애를 써 보았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머리를 세차게 흔들고 나니 선녀 보살에게는 말하지 않은 것 하나가 생각났다. 굿이라도 해야 된다 그럴까 봐 차마 말을 못 한 것이었다. 그게 입천장에 딱 붙은 김 쪼가리처럼 마음에 남아 신경이 쓰였다. 노란 종이 위의 글씨들이 붙어야 할 입에 걱정이 붙어있는 꼴이다. 다시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에라 관셈보살 관셈보살 관셈보살…….'
심 씨는 광명진언 대신 애먼 관세음보살만 찾았다.
"뭐하는 짓거리야!"
심 씨가 화들짝 놀라서 머리에 둘러쓴 걸 벗겨냈다.
"아이고 못 살겠다. 내가 허리가 똑 부러져야 시원하겠소?"
행여 박 노인이 주문 같은 걸 들었을까 봐 심 씨는 역정을 내는 것으로 선수를 쳤다.
"이녁이야말로 첩질도 아니고 웬 신발을 끌고 방에 들었소? 드러워라."
박 노인이 신발을 신은 채 방에 들어와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심 씨는 가슴이 조여들었다. 박 노인이 전투화를 자신의 갈비뼈에다 쓱쓱 긁어 흙을 터는 듯했다.
이제는 잘 때도 모자라 깨어서도 저러나 싶었다.
"야, 편하게 앉아 괜찮아. 운전하는 내가 다 불편하다."
"이병 이, 두, 식! 알겠습니다!"
승리상회 박 노인에게 맡겨 두었던 신병을 태우고 가던 김 중사는 신병의 어깨를 잡고 흔들어 힘을 빼줬다.
"뭐 좀 먹었냐? 주임상사님이 뭐 안주시든?"
"……."
"어허, 괜찮아. 그때 먹지 언제 먹냐?"
"라면……. 라면이랑 김치 먹었습니다."
"그래 맛있지? 요즘 군대 밥도 잘 나온다지만 어디 사제를 따라갈 수 있겠냐."
신병은 주먹에 힘을 빼고 검지 손톱으로 엄지를 긁고 있었다.
"전화도 했어?"
신병의 울대가 위아래로 한 번 덜컹거렸다.
"부모님이든 애인이든 너무 걱정하지마라. 사회에 있는 사람이 군대 생활하는 사람보다야 잘 지내지 않겠니? 이제 자대에서 잘 적응할 생각만 해. 그러다 보면 시간도 금방 가니까."
떨리는 신병의 눈동자 뒤로 위병소가 지나가고 초병의 경례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김 중사에게 다시 한 번 오늘이 일직을 서는 날이라는 것을 주지시켜주었다. 대충 경례를 받아주고 신병을 보자 떨리는 신병의 눈동자 앞에 그녀석의 얼굴이 겹쳤다.
일직 서는 날 신병을 데리고 오면, 작년 그 녀석이 다시 생각나곤 했다.
오 일병. 미끈미끈 오일병 오태성 일병.
2010 남아공 월드컵, 새벽에 나이지리아와 경기가 있던 날이었다. 그 때문에 부대도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김 중사는 하필이면 한국 경기가 있는 날 일직사관 근무를 서야 했다. 맥주와 함께 티브이에서 나오는 부부젤라 소리에 한껏 신이 나야할 시간에 김 중사는 시커먼 밤길을 순찰하면서 요란한 개구리 소리나 들어야 할 판이었다. 그 억울함을 병사들한테 내뿜었다. 관물대 검사, 손톱 및 위생 검사, 화장실 청소검사, 총기 검사. 저녁 시간이 금방 갔다.
"일직하사 점호 끝나고 전달사항 내무실별로 똑바로 전달한다. 오늘 허락 없이 새벽에 몰래 월드컵 보는 놈들 들키면 바로 군장이라고. 알았냐?"
"일동 취침"
새벽 4시 초소 근무 교대시간이었다.
나이지리아와 한국전은 이미 시작되었다.
근무교대를 할 인원들이 중대본부 앞에 대기하고 있었다.
괜스레 초조한 마음에 김 중사는 교대신고를 받기 위해 일찍 나갔다
아직 교대 인원들이 다 나오지 않았는데 오 일병이 쭈뼛하게 김 중사에게 다가왔다.
"일직 사관님 저 근무 시간 좀 바꿔 주시면 안 됩니까?"
비록 김 중사에게만 들릴 정도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였지만, 그 어이없는 요청이 김 중사의 신경을 건드리기엔 충분했다.
"미친 거 아냐? 야 새끼야 어디서 월드컵이라도 보겠다는 거냐?"
지금 근무 시간을 바꾸면 전반전 경기 중반부터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일직사관님 그게…. 아니라 이번만 좀 바꾸면 안 되겠습니까?"
"그게 아니면 뭐? 이 자식 개념 상실일세."
"그게……."
"뭐? 무슨 문제 있나? 야, 일직하사 오라 그래."
오 일병의 얼굴이 굳어졌다. 고개를 푹 숙인다.
"인마 근무 사수가 누구야?"
일병이 감히 이런 말을 꺼내진 못할 것이다. 배후가 있다.
"연 성구 병장님입니다."
"연 성구? 연병장? 연병장이 나보다 위냐? 님자를 붙이게?"
"연 성구 병장입니다."
대답하는 일직 하사는 줄곧 오 일병을 바라보고 있었다.
연병장. 성씨 때문에 졸병부터 놀림감이었던 연 성구 병장이었다.
"야, 연상병"
"상병 연성구"
"야, 너 다음 달에 병장 달더라. 국방부 시계 졸라 좋아. 아무나 다 병장 되부러. 넌 병장 되지마라 그랬지. 조또, 크크크끄끄……."
"아니지 말입니다. 될 건데 말입니다."
"말입니다는 빼고. 새끼, 요새 이뻐해주니까 졸라 빠져갖구……. 되고 싶긴 뭘 새꺄 . 네가 병장되면 뭐냐?"
"연병장이지 말입, 연병장입니다."
"그러니까 병장되면 넌 연병장부터 돌아, 새꺄. 크끄끄끄"
"아 왜 그러십니까. 유병장님~ 이제 그거 너무 옛날개그 아닙니까. 조금 있으면 사회복귀 하실 텐데 그러시면 따 당하십니다."
"뭐야 시끼, 내 맘이다. 새끼 졸라 귀여워 갖구."
유 병장이 연 상병에게 헤드락을 건다. 뽀얀 연 상병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이내 입술을 뾰로통하게 만들면서 유 병장을 바라본다.
연 성구는 병장이 될 때까지 특유의 유들유들함으로 자신을 향한 놀림의 무게를 가볍게 만들었다.
연병장이 탄띠도 결속하지 않은 채 방탄헬멧을 겨드랑이에 끼고 어슬렁어슬렁 걸어왔다.
"야 연성구 네가 이 녀석한테 뭐 시켰어? 월드컵 보고 싶어서 환장했냐?"
"병장 연성구. 에이 일직사관님 제가 어떻게……. 아니지 말입니다. 근무 열심히 서야지 말입니다."
병장이 되자 연병장은 부사관들에게도 그 능글맞음을 발라댔다.
"김 중사님, 근무 서면서 순찰함도 제가 체크해드리겠습니다."
"그걸 네가 왜 체크해. 이게 이제 말년이라고. 너 몇 개월 남았어? 새끼……."
"에이……. 4초소 제일 멀지않습니까. 중사님 오시느라 힘드실 텐데……. 오늘 월드컵도 있고…….네?"
"내 걱정하지 말고 이 새끼랑 근무나 잘 서 인마."
"넵! 알겠습니다. 충성!"
연 병장은 얄궂게 발랄한 경례로 김 중사의 날카로움을 무디게 덮어버렸다. 김 중사의 입에선 헛웃음이 나왔고, 옆에 서 있는 오 일병은 어금니를 꽉 깨물며 땅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일직하사 다른 근무인원 이상 없나? 그래, 보고 생략하고 출발."
"김 중사님! 김 중사님!"
"뭐야?"
일직 하사가 헐레벌떡 중대본부로 들어온 것은 이제 막 아침 점호를 시작하기 바로 전이었다. 김 중사가 이제 막 사령실에서 월드컵을 보고 중대본부에 돌아온 후이기도 했다. 순찰은 사령실에 들어가면서 돌지도 않았다.
일직 하사가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화장실에……. 화장실에……."
" 씨발….' 가보기도 전에 김 중사는 무슨 일인지 정확히 알 것 같았다.
화장실 문틀에 목을 맨 오 일병의 쭉 빠진 혀에 설태가 하얗게 보였다.
축축하고 허연 거품이 오 일병의 아랫입술을 넘어서 턱을 타고 흘러나와 있었다. 녹은 소금물 같았다. 긁어내면 설렁탕 서너 그릇에 넣고도 남을 만큼 흥건했다.
그 밑 전투복 상의 두 번째 단추에 흰 종이가 꿰져있었다. 거기에는 몇 글자 되지도 않는 한 문장이 거칠게 휘갈겨져 있었다.
'내가 좆 빤 새끼들 다 기다려라!'
'좆'이라는 글씨가 흘러내린 침에 번져 있었다.
"야 연병장 중대본부로 데리고 와."
그 종이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김 중사는 일직 하사에게 말했다.
"어서!"
"연병장에요? 중대본부를요?"
"야 연병장 말이야 연병장! 연 성구!"
김 중사는 '새끼' 뒤에 '들'을 지울 수 없을까? 라는 생각을 하며 그 유서로 추정되는 종이 쪼가리를 계속 뚫어져라 보았다.
읍내로 나가는 버스에 처녀 한 명이 올랐다. 하얀 남방을 입은 처녀를 본 박 노인은 어떤 직감에 몸이 경직되었다. 국화를 안고 적군묘지에 오르는 처녀를 그려보았지만 이내 다른 이미지가 그 모습에 겹쳐졌다. 월남의 처녀들도 저렇게 하얀 옷을 입고 다녔다. 유심히 처녀의 얼굴을 몰래 뚫어져라 뜯어보았다. 새까만 머리가 하얀 남방 때문에 더 검게 보였다. 커다란 눈이 북쪽보다는 남쪽 얼굴에 더 가까워 보이기도 했다. 눈이 마주칠까 박 노인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눈을 감았다. 다시 그 꽃을 생각해보려고 했지만, 코에는 이미 시큰한 남쪽 땅의 냄새가 배 들었다. 땀이 났다. 중국 사람이든 베트남 사람이든 이젠 다 한국에 온다. 더는 빨갱이 중공군 베트콩이 아니다. 그래서 박 노인은 불안했다. 길 한복판에서 갑자기 베트남 사람들에게 에워싸일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군인들이야 적군이라고 해도 저렇게 묘지라도 만들어주지만, 양민들은 어디까지 도망가다가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를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박 노인이 적군묘지에 술 한 잔 따르는 것이 비단 적군만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 술 한 잔 따른 날이면 그나마 좀 더 편하게 잠이 들 수 있었다. 그때는 확실히 먼저 간 전우들만 꿈에 나오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꿈에 하얀 옷을 입은 베트남 처녀가 나오면 다음 날은 몸이 더 천근만근이었고 다리가 뻣뻣하게 굳는 느낌이 들어 피곤했다.
새벽 2시 근무 교대 신고를 받고 김 중사는 순찰 나갈 채비를 하였다. 오늘 박 노인과 나눈 이야기도 있고 순찰 중에 적군묘지를 들를 참이었다. 그 시간에 묘지에 간다는 게 좀 찝찝하긴 했다. 하지만 국화 다발에 대한 김 중사의 호기심이 그보다 더 컸다. 그리고 국화 다발을 처음 발견한 사람도 자기이니 국화 다발 주인이 누구인지도 자기가 먼저 알아내고 싶었다. 잡초가 무성하게 허벅지를 스칠 정도로 자란 계절이었지만 새벽 공기는 으슬으슬하게 귀밑을 스쳤다. 검은 도로를 손전등으로 이리저리 비추며 김 중사는 걸어 내려갔다. 인적이 드문 곳이라고 하지만 그렇기에 누가 오고 갔는지는 복잡한 도시보다 더 눈에 띄는 곳이다. 그런데 여태 흰 국화 다발을 놔두고 간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는 게 이상했다. 저 멀리 보이는 승리상회의 지붕이 반짝였다. 어둠 속에서 보이는 그 모습이 더 멀게 느껴져 낯설었다. 그 방향으로 손전등을 비추려다 말고 적군묘지를 향했다. 적군 묘지의 초입에 들어서기 전에는 반드시 승리상회를 지나야 했다. 박 노인이나 심 씨도 본 적이 없다면, 아무도 없을 시간에 누군가 하얀 꽃을 놔두고 가는 것은 아니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렇게 깊은 시간에 여기까지 올 수 있는 사람이라면 외지인이 아니라 내부인 이어야 한다. 동네 주민이라면 승리상회를 지나올 것이고 아니라면 부대 내부 사람이다. 하긴 깊은 밤에 몰래 오는 사람이라면 어디 길로만 다니겠는가? 대낮에 온다고 해도 길이 아닌 곳으로 다니면 숨어서 적군묘지까지 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럼 굳이 한밤에 오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공간을 이용해 숨은 것일까? 시간을 이용해 숨은 것일까? '정말 매복을 시켜놔 봐야 하냐?' 머릿속에서 사건의 퍼즐을 몇 바퀴나 돌리다 보니 어느덧 김 중사는 적군묘지에 앞에 서 있었다. 박 노인의 고추밭을 가운데 두고 왼쪽이 북한군 묘역이었다. '그래, 김 대위 잘 있었나?' 김 중사는 뒷골의 으스스한 느낌에 쓸데없이 대답하듯 중얼거렸다.
국화 꽃다발은 없었다.
"그렇지 뭐. 헛헛."
김 중사는 헛기침 같은 웃음을 뱉었다. 한 밤 중에 여기까지 온 것이 허망하기도 했지만, 바로 돌아가기에도 아쉬워 목비들을 둘러보았다. 김 대위처럼 성명이 쓰인 것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무명인'이라는 검은 세 글자가 희고 앙상한 목비를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면에는 지역명이 쓰여 있었다. 출생지가 아니라 유해가 발견된 장소다. "이제 돌아갈까." 김중사는 혼잣말인지 아니면 또 김 대위가 들으라고 한 것인지 모르게 애매한 소리로 말한 후 돌아섰다. 나갈 방향으로 눈을 들자 저 멀리서 흰 목비 하나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자신도 모르게 김 중사는 풀숲에 몸을 숨겼다. 목비가 움직일 리는 없다. 한 곳만 계속 바라보면 착시가 일어날 수 있다. 잘 식별하기 위해 눈을 아래로 깔았다가 다시 그쪽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허연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목비는 아니었다. '꽃다발을 놔두러 온 사람인가? 이제야 정체를 밝히시는 건가?' 다시 식별을 위해 고개를 아래로 향했다. 그러자 풀숲에 하얀 쪽지 하나가 보였다. '뭐지? 지전인가?' 하지만 지전은 참배객들이 다녀가는 중국군 묘역에나 있지 북한군 묘역에 있을 리가 없었다. 그 쪽지는 제법 그 자리에 오래 있었는지 엉킨 풀들 밑에 구겨져 있었다. 그런데 흙도 많이 묻어있지 않고 달빛을 받아 새하얗게 눈에 잘 띄었다. 김 중사는 손으로 풀을 헤쳤다. 쪽지 끄트머리가 나왔다. 김 중사는 무릎을 꿇어 자세를 더 낮추었다. 불을 끈 손전등을 입에 물고 양손으로 다시 풀을 더 헤쳤다.
‘으으…….’ 희멀겋고 끈적한 것이 손에 묻었다. 한 손으로 쪽지의 끄트머리를 잡고 풀 사이에서 뽑아냈다. 나머지 한 손으로 쪽지를 잡고 빳빳하게 펼치자 거기에 쓰인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좆 빤 새끼들 다 기다려라! '
"으허억!"
턱에 힘이 빠져 손전등이 땅바닥에 툭 떨어졌다.
중심을 잃고 뒤로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자 멀리 있던 허연 무언가가 바로 코앞에 다가와 있는 것이 보였다.
"학?"
누구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말은 목젖에 걸려 나오질 못하고 있었다.
희멀건 무언가가 읊조리듯 말을 했다.
"이제… 좀…그…만 불…러 내소."
김 중사는 억지로 침을 한 번 삼키고 목소리를 끄집어냈다.
"꺽 주임 상사님?"
"이제 좀 그만 불러내소."
"주임 상사님, 저 김 중사입니다. 주임상삵!"
쉬이이이.
단단하게 음성이 뭉쳐 나와야 할 곳에서 프시식 바람이 새는 소리가 들렸다.
김 중사가 목을 감싸 쥐었다.
김 중사의 손가락 사이로 뜨뜻하고 붉은 게 흘러내렸다.
"이제……. 그만 좀……. 불러내."
힘없이 내뱉은 그 말을 붙잡고 허연 무언가가 뒤로 물러서자 김 중사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목을 잡고 있던 김 중사의 손에서 힘이 빠졌고 쿨럭 피가 쏟아졌다.
그 아래에 깔린 하얀 쪽지의 글씨들 사이에 피가 점점 번져나갔다.
"그러니까……."
둥그렇게 커진 김 중사의 흰자위에 비친 허연 무언가가 김 중사로부터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멀어져갔다.
자리끼를 찾아 심씨가 눈을 뜬 건 어둠이 어슴푸레 여명에 밀려나기 시작할 때 즈음이었다.
위로 올라온 복대를 다시 고쳐 내리고는 한 손으로 머리맡을 더듬거렸다.
축축했다. '물이 흘렀나?' 그러다 낌새가 좋지 않았다. 벌떡 일어나서 박 노인의 발을 보았다. 영감 발에 또 흙이 묻어 있었다. 걸레를 들고 와서 자는 박 노인의 발을 닦았다. 두툼한 굳은살에 간지럽지도 않은 지 박 노인은 꿈적도 안 하고 잤다. 심 씨는 침침한 눈으로 박 노인의 잠든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평생을 죽은 사람한테 시달린 영감이다. 아직도 꿈에 전우들이 부른다며 베개 밑에 칼을 놔두고 잔다. 발에 흙 묻히는 거야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심 씨는 혹시라도 그렇게 다니다 낙상이라도 해서 몸이 상하면 수발드는 게 더 걱정이었다. 어쩌겠는가. 별일 아니라고, 괜찮아질 것이라고 심 씨는 속으로 곱씹었다. 심학산 용하다는 선녀 보살에게도, 안산 큰 애나 대전 딸에게도 이 망할 영감이 밤이면 한 번씩 소리 없이 맨발로 나갔다가 들어온다는 말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발 닦은 걸레를 뒤집어서 쏟긴 물을 닦으려 하는데 걸레 쥔 손에 뭔가 묻어 있는 게 보였다. 자리끼 물이 아니었다.
어이구……. 영감의 베개 밑에 있는 대검을 꺼내보았다. 피가 묻어 있었다. 심 씨의 몸이 앞으로 쏟아졌다. 어깨가 가느다랗게 떨리다가 간헐적으로 들썩거렸다.
'끄으으…….'
오장육부로 짓누른 울음이 콧물과 함께 새어 나왔다.
박 노인이 일어났다. 오늘도 아침부터 몸이 천근만근이다. 허리 아프다는 할망구는 언제 일어나서 나갔는지 뒷방이 휑하였다. 오늘따라 부대는 더 조용하다. 바깥에서 그릇들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내밀어 보니 부엌 바닥에 목욕탕의자를 깔고 포대 앉은 심 씨의 등이 보였다.
"뭔 아침부터 밥도 안 먹고 설거지부터 한다고 달그락달그락 그래 싸. 엊저녁에 안 했어?"
심 씨의 대답 대신 그릇 소리가 더 커졌다.
"밖에는 왜 저렇게 조용하데? 아침 구보 소리도 안 들리네."
"모르겠소. 나는 모르겠다구요!"
"거참 아침부터 역정이야. 아프면 병원을 가."
"당신이 가요. 영감 당신이 가소. 허이구……."
오늘도 심 씨의 심산이 영 좋지 않은 것 같았다. 박 노인은 불똥이 또 튀기 전에 얼른 자리를 피해야겠다 싶었다.
"아침부터 쉰 소리는……. 참, 고추는 다시 펴놨나? 어이쿠 다리야…."
마른 고추 소리와 함께 박 노인의 추임새가 가게 앞 도로로 멀어졌다.
설거지통에 물을 비우자 단출한 그릇들과 함께 박 노인의 대검이 드러났다.
심 씨는 통에 다시 퐁퐁을 쭈욱 짰다.
솨…. 물소리가 요란하게 플라스틱 설거지통을 두드렸다.
미동도 안 하고 설거지통 안을 바라보던 심 씨의 입술이 움직였다.
"옴 …… 흑,
아……모가 끅,
바이로차나흑
마하……무드라
마니 파드마 흐어어어……
츠바……라 흑,
프라바를타야 헉
후……우……움
끄으……헐……."
설거지통에는 하얀 퐁퐁 거품이 뭉실뭉실 피어올라 박 노인의 대검을 감싸고 있었다.
책소개
전성태 소설집 '두 번의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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