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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기 Mar 13. 2017

내 맛대로 산다2

동네 맛집에서 여행까지

엄마의 손맛?

이 도시에 수많은 맛집이 생기고 또 사라지지만 누가 뭐래도 집밥이 최고라고 한다. 그 중에서도 고향의 맛, 엄마의 손맛이 깃든 음식이 최고라고 한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요리에 소질이 없는 엄마도 있다. 그리고 왜 엄마의 손맛인가. 아빠의 손맛은 없는가? 형의 손맛은 어떤데? 집밥이 최고, 엄마의 손맛이 최고라는 말은 아빠는 밖에서 일하고 엄마가 집안일을 도맡아 하는 것이라는 가부장적인 틀에 얽메인 말로 불편함이 느껴진다. 여성은 밖에서 일하고 오는 남성들이 만족할 수 있는 최고의 음식을 집에 있으면서 준비해 놓아야 한다는 건 두말 할 필요없이 차별이다. 아빠가 되었든 아들이 되었든 누구라도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요리 솜씨를 발휘할 수 있는 것이지 엄마에게만 그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냥 배고픈 사람이 스스로 해 먹으면 되는 것 아닌가. 엄마의 손맛을 찾기 전에 자신의 요리실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하는 건 어떨까. 그리고 지금처럼 산업화, 도시화가 된 사회를 사는 세대에게 고향의 맛이 강할까? 맞벌이로 생계를 유지해야 할 경제 시스템에서 엄마의 손맛을 요구할 수 있을까?




나의 인생 음식

그래서 나의 인생 음식은 내가 한 음식이다. 어허, 내 어머니의 요리 솜씨에 대한 섣부른 짐작은 금물. 어머니의 요리도 너무 맛있지만, 인생 음식이라면 그걸 먹었을 때의 상황에도 영향을 받는 법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레스토랑에서 최고의 요리를 먹었다 하더라도 그 때 가슴 아픈 이별을 통보 받았다거나, 몸이 너무 아파서 입맛이 하나도 없는 상황이었다면 인생 음식이었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고 음식에 얽힌 구구절절한 사연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맛이라는 것에는 혀에 미치는 화학적인 작용 뿐만 아니라 먹었을 때의 상황과 감정 상태 등 여러가지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얽혀있는 것이다..


도루묵의 어원에 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옛날 선조가 임진왜란 때  백성을 버리고 냅다 도망가서는 피난지에서 음식투정을 했는지 어쨌는지, 한 어부가 임금의 초라한 수라상을 어엿비 너겨 동네 앞바다에서 묵이라는 생선을 잡아서 줬다고 한다.

그것을 먹어보고 선조가


대~박! 이거 왜 이렇게 맛있냐? 이름이 무엇인고?


이름이 '묵'이라고 하자,


에이, 이름이 뭐 그래. 그래도 임금인 내가 먹은 생선인데 이름이 좀 근사해야 되지 않겠는가?

이 맛있는 녀석 이름을 좀 힙하게 '은어'라고 해라. 실버피쉬~! 고급지지 않느냐.


라고 이름을 지어줬다. 그 후 궁으로 돌아와 좀 편하게 지내다 보니 그 때 맛있게 먹었던 은어가 다시 생각이 난 것이다. 다시 먹고 싶다고 기미상궁한테 주문을 넣었겠지. 그래서 대령해 온 은어를 먹어보고,


쩝, 전에 그 녀석이 아닌 것 같은데, 이 눔이 왜 이렇게 맛이 없단 말이냐. 은어는 무슨, 됐다! 도로 묵이라고 해라!


해서 그 생선 이름이 '도루묵'이 되었다는 일화를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읽어볼 수 있다.


물론 산지에서 직접 잡아 온 것에 비해 물자수송 인프라도 지금 처럼 좋지 않던 시절에 서울까지 배송되어 온 생선이 그 신선도가 당연히 떨어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음식의 상태나 품질이 똑같다고 하더라도 상황과 분위기에 따라 느껴지는 맛은 분명 다르다. 어떻게 전시 상황 속 변변치 못한 식사와 화려한 궁에서 먹는   식사가 같을 수 있겠는가.


나의 부모님 역시 맞벌이 부부였다. 초등학교 2학년 때였던 것 같다. 오전 수업만 있었으니까. 학교에서 돌아오면 집에 아무도 없다. 우리들이 점심을 차려 먹어야 한다. 그게 슬프거나 부모님이 원망스럽거나 한 적은 없다. 그냥 배고프면 알아서 먹는 거다. 그때도 요리하는 것을 별로 귀찮아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할 수 있는 요리라고 해봤자 라면이나 볶음밥이었지만.


그 날도 별일 없이 학교에서 돌아와 배고픈데 뭘 먹나 하며 부엌으로 들어갔다. 내가 라면을 끓이기로 했다. 양은냄비에 라면을 끓여서 형이랑 나눠 먹었다. 모자란다. 양을 늘려야 한다. 남은 국물에 밥을 말아먹으려다가 갑자기 그냥 그러고 싶어서 밥을 넣고 김치를 넣고 다시 끓였다. 밥이 그냥 라면 국물에 말아먹을 때와 김치죽의 중간 상태 정도로 뭉큰하니 퍼졌다. 냄비째로 형과 함께 퍼먹었다. 초등학교 2학년도 맛있는 것 맛없는 것 다 안다. 쌀이라는 곡물이 이렇게다 달달한 것이었구나. 새콤하고 달짝지근하고 얼큰한 맛에 눈이 번쩍 뜨였다. 라면만으로는 모자랄 정도로 배가 고팠던 데다가 즉흥적으로 시도한 요리에서 라면 국물과 밥과 김치가 우연히 멋진 조화를 이루어 탄생한 그 맛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기억에 남아있을 정도였다.




여행이 불러온 맛

라면에 김치에 쌀밥. 생각해보면 클래식한 최상의 조합이다. 실패하기도 어려운 아이템이다. 하지만 외국으로 나가면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음식이기도 하다. 여행지에도 한국 식당이 있지만 나는 잘 찾지 않는 편이었다. 현지 음식에 비해 비싸기도 하고. 그럼에도 여행지에서 한국 음식에 대한 억압된 욕망이 한 번씩 폭발한 곳이 있었는데 그 중 한 곳이 바로 네팔이었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레킹 코스. 보통 ABC라고 부른다. 그 코스 중에 한 마을 촘롱. 여행 사진을 뒤져봐도 이 마을로 가는 길에 찍은 사진은 없다. 그 이유인 즉슨 무릎 지옥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진 찍을 여유도 없었던 것이다. 바로 계단의 왕국이다. 널따란 판석으로 만들어 놓은 계단이 끊임없이 이어져 있다. 영혼의 탈곡기 속에 있는 톱니바퀴와 컨베이어 벨트를 히말라야에 걸쳐 놓은 것이다. 말이 없어진다. 하늘을 올려다 볼 수 없다. 내가 왜 고생을 사서 하는가. 스스로 악마의 이빨을 밟으며 걷는 심정으로 걷다 보면 영혼은 이미 나의 것이 아니니 그 계단의 끝이 어딘지 알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다. 그렇게 넋의 통장에 0이 찍혀 나올 지경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촘롱 그곳에 당도할 수 있다.


침대에 쓰러져 여기저기 흘려 놓은 영혼을 줍는 시간을 보낸 후 샤워를 하고 숙소 앞마당으로 나왔다.

마당에는 식당의 테이블이 놓여 있어서 히말라야의 멋진 풍경을 감상하며 밥을 먹을 수 있었다. 배가 고프지 않다는 것은 거짓말, 이른 저녁을 먹기로 하고 메뉴를 보았다. 라면이 있다.


네팔에는 이미 많은 한국인들이 여행을 오는 곳이다. 한국에서 일하다가 온 네팔 사람도 많다. 그래서 그 트레킹 코스에도 라면이 있나 보다. 라면을 먹자. 몸의 피로를 매운맛으로 날려버리고 싶었다. 라면을 주문하고 은빛이 나는 바위산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구름이 산을 타고 유유히 흘러간다.


라면이 나온다.

은빛 냄비 위로 뜨끈한 김이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냄비가 테이블 위에 놓인다.

포크가 라면을 건져낸다.

그릇을 받치고 후루룩 입으로 면발을 빨아들인다.

그릇에 국물을 떠 담는다.

그릇 위에 구름이 생긴다.

후후 흐릅 뜨거운 국물을 마신다.

뜨거운 기운이 식도를 타고 온몸으로 퍼진다. 반찬들이 나온다.


김치가 있다.

네팔에 김치가 있다.

김치를 입에 넣는다.

아삭거린다.

김치라고 할 만한 맛이다.

라면을 먹는다. 김치를 먹는다.

흰 밥이 나온다.


밥 한 숟가락에 라면 국물을 적신다.

입으로 넣는다.

후~ 숨을 한번 내쉰다.

면발이 얼마 남지 않았다.

냄비에 바로 밥을 넣는다.

김치를 넣는다.

숟가락으로 밥덩이를 뭉개고 휘젓는다.

냄비에서 밥을 한 숟가락 높게 푼다.

안나푸르나 봉우리가 라면 국물을 덮어썼다.

이제 삼킨다.


여기가 맛집이다.

여기가 내 집이다.

지금이 나의 어린 시절이다.

이십여 년 전이 바로 지금이다.

잴 수도 없을 만큼 멀리 떨어진 네팔에서

기억 저 편에 간직되어 있던 맛의 기쁨을

여행이 다시 살린 것이다.


인생의 음식

언제일지 어디일지 모르지만

맛은 제멋대로 살아나고

여전히 내 맛대로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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