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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찬준 Mar 18. 2024

봄날의 망고

음악 일기 / 뉴욕 / 2014.10.23 망원

주변에 좋은 사람이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없다면, 내가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 되는 것 또한, 축복이다. 인연이라는 것은 어쩌면, 그저 고개만 왼쪽 혹은 오른쪽으로 돌리면 맞닥뜨리게 되는 것인데, 나는 보통 앞만 보고 갈 때가 많다.


그날도 윌리엄스 버그 골목골목을 돌아다녔다. 뉴욕에 오자마자 사 신었던, 중고 검정색 스니커즈의 바닥은 닳을 때로 닳아 발이 불편했다. 버팔로에 들러 20달러에 괜찮은 중고 단화를 장만했다. 기분이 상쾌했다. 쇼핑은 남자에게나 여자에게나 기분전환의 수단이다. 평균적으로 여자가 남자보다 기분전환이 많이 필요한 것 같지만.  


지하철을 기다리는데, 흑인 남자의 목소리가 귀를 끌어당긴다. 모른 척 듣고 있다가, 등에 메고 있던 기타를 꺼내, 옆에 가 조심스럽게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의 노래와 연주에 맞춰 기타를 쳤다. 노래가 끝나고, 흑인 남자는 이것저것 물어본다. 나는 간단히 내 소개를 하고, 다시 우리 둘은 연주를 시작했다. 사람들은 지나가다 발걸음을 멈추었고, 팁 박스에는 1달러짜리 지폐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일정한 간격으로 눈앞에서는 지하철이 굉음을 내며 지나갔고,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는 연주를 멈추지 않았다.


갑자기 백인 남자 하나가 우리 앞에 멈춰 서더니, 등에 메고 있던 케이스에서 색소폰을 꺼냈다. 그리고, 흑인 남자와 잠깐 대화를 나누더니, 우리의 연주에 색소폰을 얹는다. 듣기 좋다. 이미 둘은 아는 사인가. 몇 곡이 연주되었고, 기타 케이스에 1달러짜리는 점점 수북해졌다. 그리고, 백인 남자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는 믹스다. 비주얼만으로도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고, 연주 또한 나쁘지 않으니, 뭔가 해보자. 내일 이 역에서 다시 만나는 게 어떻겠냐'는 제의를 했다. 우리는 둘 다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다음 지하철을 타겠다고 말했다. 물론,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팁 박스의 팁은 셋이 나눠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흑인 남자는 수북한 달러 사이로 자신의 기타를 집어넣었고, 케이스를 굳게 닫았다. 미련을 버리고 지하철을 타려는 나를 백인 남자가 붙잡더니, 가방에서 신문지에 쌓인 뭔가를 꺼내 집에 가서 열어보라며, 내 손에 건넸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물컹한 느낌이었다. 무게도 제법 묵직했다.


피곤한 몸을 침대에 누이고,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인 오늘의 수입을 쳐다본다. 

조심스레 열어보았더니, 

망고다.


모과보다 조금 더 큰 사이즈의 노란색 열매. 코를 가까이 가져갔더니, 부드럽고 달콤한 냄새가 은은하게 났다. 망고를 실제로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저걸 어떻게 먹는 거지?'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 봤더니, 나는 오늘 만난 그 친구들과 연락처조차 교환하지 않은 상태였고, 또 몇 시에 만나자고 약속한 것도 아니었다.


다음날은 살랑살랑 봄비가 내렸다. 나는 약속장소에 나가지 않았다. 나갈 수 없었다고 해야하나.

머리맡에서 달큰한 봄날의 망고향이 코를 간지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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