찣겨진 페이지의 비밀
아주 먼 옛날, 세상에서 가장 귀한 책이 한 권 있었어요. 왕실 도서관의 가장 깊은 안쪽, 보석보다 귀하게 모셔진 그 책은 제목이나 작가의 이름 대신 기묘한 이름으로 불리곤 했어요.
“25쪽에서 27쪽까지, 단 세 쪽을 쓰는 데 20년이 걸린 책.”
사람들은 그 책을 읽으며 진실한 사랑의 형상을 찾으려 애썼어요. 하지만 그 책은 세상에 단 두 권뿐이었어요. 한 권은 아주 오래전 궁궐 밖으로 빼돌려져 행방이 묘연했고, 나머지 한 권만이 궁궐 사람들의 손에서 손으로 옮겨지며 비밀스러운 전설을 이어가고 있었어요.
그 궁궐에는 에일린이라는 이름의 하녀가 살고 있었어요. 하얀 앞치마를 두르고 묵묵히 궁궐의 복도를 오가는 그녀는, 고된 노동 속에서도 밤하늘의 별빛 같은 눈빛만은 잃지 않는 이였어요.
에일린에겐 사랑하는 연인, 로엔이 있었어요. 그는 궁궐의 마구간에서 말을 돌보는 정직한 청년이었죠. 두 사람은 하루 일과가 끝난 밤, 퉁퉁 부은 발을 이끌고 담벼락 아래서 몰래 만나 손을 맞잡으며 약속하곤 했어요.
“에일린, 우리가 저 전설의 책을 읽게 되는 날, 그 속에 담긴 완벽한 사랑의 문장으로 서로에게 청혼하기로 해요.”
마침내, 긴 기다림 끝에 에일린의 차례가 왔어요. 떨리는 손으로 책을 받아 든 그녀는 등불 아래서 조심스럽게 25쪽을 펼쳤어요.
『 ....아름다운 2월의 눈이 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세상은 어느새 눈부신 순백의 침묵에 잠겼고... 하얀 앞치마를 두르고 궁궐을 오가는 벨라는 그때 안개 속에서 더 눈부시게 달려오는 하얀 말을 볼 수 있었다.... 눈의 요정들은 그녀에게 속삭였다.
"그대는 저 말의 주인과 운명 같은 사랑에 빠질 거예요." 』
에일린은 여기까지 읽다가 숨을 멈췄어요. 20년에 걸쳐 쓰였다는 26쪽은 아주 예리한 칼날로 한 치의 흔적도 없이 도려내어졌고 26쪽 뒤에는, 단 여섯 줄만이 남은 마지막 27쪽이 기다리고 있었어요.
『 ..... 20년이 지나도 여전히 사람들의 세상엔 아름다운 2월의 눈이 내렸다. 벨라는 그녀가 사랑을 꿈꾸었을 때와 똑같은 옷차림으로 눈부신 눈을 받아내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 위에도 눈이 내린 것 같았다. 그녀는 더 이상 아름다운 갈색의 머리카락을 지니고 있지 않았음에도 반짝이는 눈빛은 여전히 별빛과 같았고 그녀는 매우 아름다워 보였다. 눈의 요정들이 그녀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녀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있어." 』
비극은 예고 없이 찾아왔어요. 책이 훼손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에일린을 범인으로 몰아세웠어요. 책의 맨 뒷장에는 차가운 율법이 낙인처럼 찍혀 있었어요.
『 이 책을 찢거나 손상시키는 자는 한 쪽당 10년의 형을 살아야 한다. 단, 찢겨진 페이지와 똑같은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곧 형에서 풀리리라. 』
에일린은 뾰족탑 맨 꼭대기 방에 갇히게 되었어요. 철창 너머로 에일린을 바라보던 로엔은 그녀의 떨리는 손을 붙잡으며 굳게 맹세했어요.
“에일린, 부디 무너지지 말아요. 내 반드시 궁궐 밖으로 흘러나간 그 한 권의 책을 찾아 돌아오겠소. 그 책의 26쪽과 27쪽을 알아내어 당신의 결백을 증명하고, 이 문을 열겠소. 그때까지 부디 살아만 있어 주시오.”
로엔은 그 길로 말 한 마리를 빌려 안개 너머로 떠나갔어요. 에일린은 그가 남긴 맹세를 심장 가장 깊은 곳에 품고 펜을 들었어요. 그가 돌아와 이 문을 여는 날, 가장 아름다운 문장으로 그를 맞이하겠다는 희망 하나로 찢겨나간 페이지 위로 사랑을 옮겨 심기 시작했답니다.
그녀의 앞에는 한 페이지당 10년이라는 고독한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