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귀한 책 (2/2)

사라진 페이지의 비밀

by 최종병기
1편 : https://brunch.co.kr/@killm3/150


에일린이 써 내려간 종이들은 매번 뾰족탑의 높은 계단을 내려가 심사관의 책상 위에 놓였어요.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늘 비웃음 섞인 차가운 거절뿐이었죠.


“아니야. 이런 이야기가 아니야.”


그 말은 예리한 칼날이 되어 에일린의 가슴을 매일같이 베어냈어요. 그렇게 수천 번의 거절이 반복되고, 1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후에야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 심사관의 평가에 더 이상 상처받지 않을 수 있었어요. 그녀는 무뎌진 가슴으로 새로운 사랑 이야기를 계속 써 내려갔어요.

에일린의 이야기는 창문을 넘어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퍼져 나갔어요. 세상 사람들은 그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읽으며 눈물을 흘렸지만, 정작 에일린이 기다리던 로엔에게선 아무런 소식이 없었어요.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에일린의 마음 한구석에는 짙은 안개가 내려앉았어요. 어쩌면 그는 머나먼 어딘가에서 이 지독한 약속 같은 건 잊어버린 채, 아름다운 아내를 맞이하고 자신을 닮은 귀여운 아이들을 낳아 행복하게 잘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로엔이 어딘가에서 평온한 삶을 꾸리고 있을 거라는 상상은 에일린을 안심하게 했지만, 동시에 그녀의 심장을 갈가리 찢어놓았어요. 그 상상이 커질수록 그녀의 펜은 더 이상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쓸 수 없었어요. 에일린은 언젠가부터 시리도록 슬픈 사랑 이야기들만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어요.



어느덧 20년의 형기가 끝나는 날, 뾰족탑의 무거운 문이 열렸어요. 에일린은 비틀거리며 밖으로 나왔어요. 그녀는 바닥에 고인 웅덩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어요.

윤기 흐르던 갈색 머리카락은 어느덧 빛바랜 회색으로 변해 있었고, 눈가에는 세월의 골짜기가 깊게 패어 있었어요. 청춘을 고스란히 탑 안에 묻어버렸지만, 눈빛만은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어요.


그때였어요. 저 멀리서 힘겹게 달려온 하얀 백마 한 마리가 에일린의 앞에 멈추어 섰어요. 에일린은 단번에 그 말이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있었어요. 떨리는 손으로 백마의 거친 갈기를 어루만지던 그녀는, 말의 등 위에 얹힌 낡은 책 꾸러미를 발견했어요.

에일린은 서둘러 꾸러미 속의 책을 꺼내 26쪽과 27쪽을 펼쳤어요. 하지만 그 책 역시 26쪽과 27쪽은 누군가에 의해 도려내진 듯 사라져 있었어요. 그리고 그 빈 페이지 사이에는 로엔의 마지막 편지가 가만히 끼워져 있었지요.


“에일린.

당신을 위해 책을 찾아 끝없이 이 세상을 돌아다녔소. 그러나 당신의 형이 끝날 무렵인 20년이 거의 다 되어서야 이 책을 찾게 되었소. 하지만 비참하게도 이 책 역시 26쪽과 27쪽은 없었소.

나는 온 세상을 돌아다니며 이 책을 읽었다는 수많은 사람을 수소문하고 만나 물어보았소. 26쪽과 27쪽에 있던 이야기를 단 한 줄이라도 기억하는지에 대해서 말이오. 하지만 그들이 기억하는 것은 옛 전설이 아니었소. 그들이 눈물을 흘리며 내게 들려준 것은, 바로 당신이 그 뾰족탑의 방에서 외롭고 힘들게 써 내려갔던 이야기들이었소. 난 길을 외로이 떠돌면서 당신이 세상에 뿌린 그 이야기들을 통해 당신의 영혼을 느꼈소.

우리가 마지막 본 그날 이후로 단 한 번도 당신 생각을 하지 않았던 날이 없었소. 당신을 정말 사랑하고 있소. 내 삶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소. 아마 이 책이 당신 손에 전해질 무렵이면, 난 어쩌면 하얀 눈이 되어 당신에게 뿌려지고 있을지도...

당신의 로엔으로부터.”


에일린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어요. 흩날리는 눈송이들이 로엔의 손길처럼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어요. 그때 허공을 떠돌던 은빛 눈송이들이 기묘한 형상으로 변하기 시작했어요. 그것은 지난 20년 동안 그녀가 써 내려갔던 슬픈 문장들이었어요. 로엔이 길 위에서 온몸으로 받아냈던 그 간절한 글자들이 눈이 되어 내려와 에일린의 머리카락 위로 내려앉았어요.


에일린은 생각했어요. 어쩌면 사라진 페이지를 채운 것은 잉크가 아니라, 자신이 이 뾰족탑에 갇혀 있었던 20년의 시간 그 자체가 아닐까 하고요.

하늘에서 내려온 사랑의 문장들이 그녀의 머리 위에서 눈부신 면류관처럼 빛나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 빛 속에서 20년 전 그 책의 마지막 문장들이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지요.


『 ..... 20년이 지나도 여전히 사람들의 세상엔 아름다운 2월의 눈이 내렸다. 에일린은 그녀가 사랑을 꿈꾸었을 때와 똑같은 옷차림으로 눈부신 눈을 받아내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 위에도 눈이 내린 것 같았다. 그녀는 더 이상 아름다운 갈색의 머리카락을 지니고 있지 않았음에도 반짝이는 눈빛은 여전히 별빛과 같았고 그녀는 매우 아름다워 보였다. 눈의 요정들이 그녀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녀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있어." 』


<끝>

수,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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