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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줍은 비가 좋다.

육아휴직 200일차

by 허공

2021년 8월 21일 새벽

‘투둑 투둑’

흐린 하늘에서 한 방울, 두 방울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삐삐 삐삐’

풀벌레가 비가 오는 게 반가운지 울어대기 시작한다.

아니 웃음소리인가?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는 사람이 결정하는 게 아닌데, 지레짐작으로 운다고 생각해본다.


창밖의 나무와 나무에 매달린 초록 잎들이 바람에 흔들린다.

바람에 몸을 맡기며 춤을 추기 시작한다.

격렬한 몸부림이 아니다.

그저 힘을 빼고 바람에 맞춰 마치 리듬을 타는 듯하다.


풀 냄새가 비 냄새와 섞여 콧속으로 살며시 스며들어온다.

시원한 바람이 분다.

바람이 피부 위에 솜털을 간질이며 어루만져 준다.


장대 같이 쏟아지는 비가 아니다.

살며시 다가와서 가을이 성큼 다가왔음을 알려주는 비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모습을 바꿔 세차게 내릴 수도 있지만,

아직은 수줍은 비다.


예전부터 수줍은 비를 좋아했다.

창밖으로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바람을 느끼면

내 마음도 시원히 씻겨 내려가는 듯 했다.

세차게 쏟아 내리는 비는 시원하긴 하다.

하지만 막상 밖으로 나가 즐기기는 쉽지 않다.

수줍은 비는 우산을 쓰고 살포시 맞아주는 맛이 있다.

주변을 둘러보고 살피는 여유를 가질 수 있다.


아침 10시, 집을 나서자 수줍은 비가 거칠게 변했다.

전날 펑크가 났던 타이어 수리를 하러 카센터에 갔다. 출동했던 서비스기사가 타이어 옆면이 갈려 갈아야 될 것 같다고 했다.

“대기 시간이 2시간 정도 됩니다. 괜찮으시겠어요?”

“아 그럼 다음에 오겠습니다.”


바로 전에 타이어를 갈았던 타이어 가게로 이동했다.

“안녕하세요 손님, 타이어를 보니 가루가 너무 많아 교체해야 될 것 같습니다.”

“한 번 볼 수 있을까요”

타이어를 휠과 분리하니 안에는 검은 타이어 가루가 한 가득이다.

“와 교체 해야겠어요”

“네, 근데 다른 타이어들과 맞추어야 하니 새 것 같은 중고 타이어로 교체하는 게 날 듯 합니다.”

전에 타이어 4개를 한꺼번에 갈았는데 1개만 새 것으로 다시 갈면 상태가 맞지 않아 오히려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말이었다.

타이어는 사람의 두 다리와 같다. 다리에 문제가 생기면 도로에서의 안전이 담보될 수 없다.


오후에는 일이 있어 어머니께 아이들을 잠시 맡겼다.

일을 마치고 아내와 브런치를 먹기로 했다.

가까운 행주산성의 ‘리오리코’라는 브런치 카페로 이동했다.


어느덧 거칠었던 비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맑은 얼굴로 바뀌어 있었다.

토마토 스파게티와 빵, 커피, 딸기스무디를 주문하고 루프탑으로 올라갔다.

저 멀리 한강과 아파트들이 보였다. 전망이 좋았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음식을 즐겼다.


모처럼 만의 여유, 부부 만의 시간도 소중하다.

아이들과 함께라면 누리지 못할 시간이다.

때로는 이런 여유가 필요하다.

긴 시간이 필요치 않다.

짧은 시간이라도 좋다.


맑은 하늘은 다시 수줍은 비로, 거친 비로 변해 간다.

수줍은 비도, 거친 비도 다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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