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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순이 Oct 08. 2023

 ㅎ. 히치하이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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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악회를 이용해서 '함백산' 에 다녀왔다. 나흘간의 설연휴 중 셋째 날을 앞둔 지난밤, 잠들기 전에 내일은 뭐하지 하고 생각하다가 갑자기 등산 생각이 나서 즉흥적으로 산악회에 신청서를 작성하고 다음날 새벽에 바로 실행에 옮겼다. 산악회에 3에서 7만 원가량의 회비 (산 별 금액 상이) 를 내면 왕복차량과 아침식사를 제공받을 수 있는데 혼자서 가기 힘든 먼 산에 다녀오기에 꽤 괜찮은 것 같다. 다 같이 차를 타고 가되, 마음이 맞는 사람과 함께 산행해도 되고 혼자서 해도 되며, 함께든 혼자든 알아서 산행을 마치고 시간만 잘 맞춰서 차에 도착하기만 하면 된다. 이번 함백산의 경우 4만 원을 지불했다.


대구에서 함백산이 있는 강원도 태백까지는 편도 4시간이 걸렸다. 처음에 입구를 잘못 들어서 함백산이 아닌 태백산 가는 길로 한참을 가다가 뒤늦게 그 사실을 알고 유턴하는 바람에 출발이 늦어졌다. 다시 제대로 도착한 입구에서 혼자 있는 나를 보고는 함께 산을 오르자는 분이 계셔서 초반에 잠깐 함께 올랐으나 속도차이로 멀어져서 결국 혼자 하게 됐다. 상대방은 내 속도를 따라오지 못했고, 나는 상대방에게 맞춰주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사실 애초에 혼자서 산을 오르고 싶었기 때문에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산행경험이 없어도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는 초급코스라던 함백산 정상 가는 길은 생각보다 가파르고 힘들었다. 아무래도 쌓인 눈 때문에 바닥이 미끄러워서 더 오르기가 힘들었던 것 같다. 등산스틱을 안 챙겨간 게 후회가 됐다. 하지만 스틱이 없어도 등산이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오르막길을 오를 때는 나무를 잡고 올라가면 됐다. 다행히 아이젠은 챙겨갔는데, 이게 없었으면 거의 등산이 불가능했을 뻔했다. 두껍게 쌓인 흰 눈을 밟으며 걷다 보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눈이 부셔서 선글라스를 꺼내 썼다.


오르는 내내 마주치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몇몇 사람들과는 세 마디 이상의 대화를 나눴다. 한 남성의 어디서 왔냐는 질문에 대구에서 왔다고 대답하니 자신들도 대구에서 왔다고 몹시 반가워하며 대구에 가거든 술 한잔 하자는 둥 자주 보자는 둥 농담을 던졌다. 같이 있던 여자일행이 그 남성에게 뭘 어떻게 자주 볼 거냐고 깔깔대며 웃었고, 나도 적당히 같이 웃으며 맞장구쳐주고 가던 길을 갔다.


함백산 정상까지는 어찌어찌 잘 도착했으나 다음코스인 중함백으로 가는 길에는 길을 잘못 들고 말았다. 초행길이라 길을 잘 모르겠어서 산행인들에게 길을 물어보면서 갔는데 그분들 말을 너무 철석같이 믿어버렸다. 한 산행인이 가라는 데로 갔더니 내가 처음 진입한 입구가 나왔다. 맙소사, 원점회귀코스로 잘못 들어와 버린 것이다.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갈 엄두가 안 나서 다른 방법이 없을까 싶어서 일단 산악회 가이드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시 왔던 길을 돌아오게 되면 차량 출발 시간을 맞추지 못할 수도 있으니 그냥 거기서 택시를 타든 다른 사람들 차를 얻어타든 해서 절 앞 주차장까지 곧장 오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


일단 도로로 나가서 사람을 찾았다. 마침 벤치에서 두 남성이 앉아서 쉬고 있었다. 은근슬쩍 말을 붙이고 현재 내가 처한 상황을 알려줬다. 혹시 여기에 택시가 다니냐는 나의 질문에 '당연히 안 다니죠' 라는 답변을 들었다. 그러더니 자신들이 목적지까지 태워주겠다는 호의를 먼저 보여서 고맙다고 꾸벅 인사하며 바로 수락했다. 자신들은 이제 막 산행을 마치고 쉬면서 어디로 갈지 고민하던 중이었는데, 나를 태워주고 그 길로 또 새로운 목적지로 향할 계획이라며, 덕분에 갈 길이 정해졌다는 둥 서로 타이밍이 좋아서 다행이라는 둥 살갑게 말을 붙였다. 두 남성 중 한 명은 운전대로 바로 갔고 나머지 한 명은 차 뒷문을 열고 급하게 뒷좌석에 가득 찬 짐을 옆으로 대충 치우고 사람 한 명 앉을자리를 만들어주고 내게 앉으라고 권했다. 차유리에는 차박이라는 글자스티커가 붙어있었고, 차 안에는 캠핑용품이 가득했다. 뭐 하시는 분들인지 대충 파악이 됐다.


차를 얻어 타고 가는 동안 짧은 이야기를 나눴다. 본인들은 '서경둘' 이라는 산악회를 운영 중이라고 했고,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나중에 서울이나 경기도 지역에 올 일 있으면 같이 산을 타지 않겠냐고 했다. 전화번호를 교환하지 않겠냐, 커피 한잔 하지 않겠냐, 뭐 그런 이야기도 넌지시 꺼냈으나 내 반응을 살피고 집요하게 굴지는 않았다. 나쁜 기분은 전혀 들지 않았다. 네이버밴드 가입을 권유받았는데 당장 서울에 등산하러 갈 일은 없어서 가입은 안 했다. 아무튼 너무 고마운 두 남성 덕분에 무사히 주차장까지 도착했고, 예정보다 한참 일찍 도착해서 절 구경을 조금 하고 차 안에 들어가서 차가 출발하기 전까지 내내 눈을 붙이고 선잠을 잤다.


평소에 모르는 사람의 차를 얻어 타는 위험한 행동을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상황이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아무런 나쁜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위기상황에서 의외로 전혀 당황해하지 않고 바로 문제해결을 시도하는 내 적극적인 태도를 발견할 수 있었다. 비록 멀리까지 가서 산을 제대로 못 즐긴 건 아쉽지만, 등산을 정해진 코스대로 제대로 마친 것보다 차라리 이런 에피소드를 겪은 게 더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악회 차량을 타고 왕복 8시간을 앉아있으니 좀이 쑤셨다. 이 날 하루를 전체적으로 봤을 때 뭐가 대단히 즐겁거나 보람되지는 않았다. 다만 설연휴 동안 함백산이라도 다녀왔다 하는 경험 정도는 얻었다는 생각에 아주 약간의 만족감을 느꼈다. 그다음 날은 집에서 좀비영화를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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