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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순이 Nov 05. 2023

파수꾼

아이와 어른, 없어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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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때부터 친구였던 기태와 동윤 그리고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만나게 된 백희, 이렇게 셋은 여자애들과 짝을 맞춰 월미도에도 가고 부모님이 안 계시는 집에서 같이 밤을 보내기도 하는 등 꽤 가깝고 사이좋게 지내왔지만, 언제부터인가 사소한 사건들과 소통 부재로 인해 서로 오해가 생기고 틀어지기 시작한다.


어릴 때는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던 학교와 친구들. 어른이 되고 돌이켜보면 그냥 지나가는 터널이었을 뿐인데 그때는 도대체 그게 다 뭐라고 그렇게까지 극단적인 선택을 해야만 했는지, 친구를 잃고 모든 걸 잃었다고 생각한 기태는 결국 자살하고 만다.


평소 기태에게 무관심했던 아버지는 뒤늦게 아들이 왜 죽었는지 알고 싶어서 기태의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대화를 원한다. 가장 친했다던 두 친구 중 하나는 전학을 가고 또 하나는 자퇴를 하고 장례식장에도 오지 않은 것이 분명 무슨 일이 있었던 것 마냥 의심스러운데, 다들 자세한 대화를 회피하기만 한다.


영화 전반에 깔린 숨이 턱턱 막히는 소통부재와 그로 인해 겹겹이 쌓여가는 오해들. 영화를 보는 내내 기태가 너무 불쌍했다. 맞는 친구들보다 때리는 기태에게, 피해자보다 가해자에게 동정이 가는 이 아이러니. 기태의 행동은 분명 잘못됐지만 기태가 느끼는 고독과 애정결핍과 불안정함 따위에 너무나도 많은 공감이 됐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폭력에 동의하는 건 절대 아니고 마음이 이해된다고 행동도 인정하는 건 아니다. 나는 각각의 입장을 전지적 시점으로 바라보는 관객이라 기태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지, 그래서 내가 백희였다면? 동윤이었다면?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이게 적절한 비유인지는 모르겠는데, 기태는 마음에 드는 여자애에게 오히려 폭력을 휘두르는 꼭 철없고 미성숙한 남자초등학생 같다. 하지만 여자애 입장에서 제 아무리 속마음을 알아챈다고 한들 그 폭력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제목이 왜 파수꾼인지 생각해 봤다. 이 영화에는 어른이 없다. 복도에서 아이들끼리 싸움이 일어나도 말리는 교사 하나 등장하지 않고, 그나마 등장하는 기태의 아버지는 기태가 살아생전에는 무관심하다가 죽고 나서야 뒤늦게 나타나서 관심을 가질 뿐이다. 아이들을 지켜줄 파수꾼이 없다. 그래서 파수꾼인가 싶기도 하다. 아이들을 지켜주지 않는 어른들에게 책임을 묻고자 하는 취지의 제목이랄까. 정확한 의도는 모르겠다.


동윤이가 말하기를, 없어지는 거에 목매지 마라 피곤하다. 근데 세상에 없어지지 않는 게 있긴 하나. 어딘가에 목매지 않고서는 활기 있게 살기가 힘든 것 같다고 요즘 자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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