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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현 Nov 11. 2019

<나는 이제 공을 차지 않는다>

또 차게 될지도 모르지만




(c) Joshua Hoehne            




사람들이 안 믿는다. 내가 축구를 좋아했단 사실을. 비웃는 이들도 있다. 썩 유쾌하지 않지만 내가 봐도 안 어울린다. 직접 공을 차는 건 물론이거니와 TV 축구 중계도 안 볼 것 같으니까. 하지만 나의 어린시절을 기억하는 이들은 안다. 축구는 내 세계의 전부였다. 전부까지는 아니고, 그냥 '내 어린 시절을 책임진 건 팔 할이 축구'였다고 해두자. 



매일 운동장에 나가 공을 찼다. 꽤 잘 찼다. 반 대표가 아니라 동학년 베스트 멤버였다. 7살 때부터 YMCA 축구교실을 다니며 울산으로 제주로 서울로 전국대회도 나갔다. 마음만큼은 더 멀리 바다를 건너고 대륙을 넘었는데, 새벽마다 프리미어리그를 챙겨 보며 정말 자주 욕하고 아주 가끔 웃었다.(나에게 처음으로 애증이란 감정을 가르쳐준 선생은 리버풀 FC다.) 축구를 하며 다양한 사람을 만났고 축구를 통해 풍부한 감정을 느꼈으며 축구를 통해 넓은 세상을 알게 됐다. 나는 진심으로 축구를 사랑했다. 



문제는 음악도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거다. TV도 사랑했고 좋은 문장들과 장면들도 사랑했다. 내 사랑을 받아줄 대상은 여기저기 널려 있었고, 나는 내 눈길을 뺏는 것이 있으면 냅다 마음까지 가져가라며 자발적으로 무장해제하는 인간이었다. 내게 ‘식어버린 마음’이란 차라리 언제나 준비되어 있는 것에 가깝다. 하나만 좋아하고 하나만 오래 붙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타고나기를 한 우물만 진득하게 파지 못하는 나는 무수히 많은 것들과 이별했다. 그리고 그 옆에서 자연스레 준비를 마친 마음이 천천히, 짜게 식어갔다.




(c) John-Mark Smith




그간의 식어버린 마음들에 감사를. 덕분에 시야가 트였다. 미련없이 찾은 축구의 대체재는 또 하나의 세계를 열어줬고, 얼마 후 그 세계의 대체재로 만난 것이 새로운 기회를 선사했다. 이별과 환승의 시간은 손해가 아니다. 식은 건 식은 거지 증발해서 사라진 게 아니니까. 하물며 연애하다 헤어진 사람도 어떤 식으로든 나를 성장시킨다는 걸 우리 모두 알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축구와 음악과 영화를 사랑해본 경험을 가지게 되었다. 정보와 지식과 이를 바탕으로 한 나름의 관점도 얻었다. 그렇게 식어버린 마음들이 쌓이고 합쳐지고 정돈된 게 오늘의 나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더 거창하게 표현하면, 식어버린 마음이란 내가 품은 스펙트럼의 기원 혹은 증거다. 



살다 보면 내 안에 어떻게든 남는 것들이 있다. 금방 사라질 게 아니라면 현명한 공존을 모색하는 게 합리적인 태도다. 식어버린 마음도 마찬가지. 거기에 나의 어제가 있고 오늘이 있고 심지어 내일의 단초까지 있다. 언젠가 아빠는 내게 말했다. “진짜 우물을 깊게 파려면, 넓게 파야 해.” 다음에 만나면 난 이렇게 말해줘야겠다. 

“진짜 내 마음을 깊게 들여다보려면, 더 많이 더 자주 식게 만들어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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