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 자취를 감춘 밤, 여수 바다는 파도 소리로 존재하고 있었다. 멀리 건너편 소호동에서 나오는 빛에 인근 바다만 반짝일 뿐 내 앞의 바다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주백색 간접 조명만 남긴 채 호텔 방 모든 조명을 껐다. 그녀의 손을 잡고 창에 바짝 다가갔다. 커튼을 완전히 젖히자 호텔 근처 홀로 있는 가로등 아래로 바다가 보였다. 밀려들고 물러나며 둥둥 떠다니는 불빛. 우리는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바다를 바라보는 건 어떤 기분이야?"
"어릴 때부터 봐서 이제는 덤덤해."
그녀는 여수에서 나고 자랐다. 창문을 열면 큰바람이 불며 바닷소리가 방으로 들어와 잠자는 그녀 곁에 머물렀다. 마음이 복잡해질 때면 바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누워만 있었다. 그게 오히려 그녀의 마음을 편하게 하였다.
"하긴, 나도 내 고향 넓은 평야 봐도 덤덤해."
"그래도 이런 밤에는 달라. 바다가 마음으로 오는 날이 있어."
그녀는 창으로 바다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런 밤이라. 바다가 온다는 건 어떤 거지. 고개를 돌려 바다를 보았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에 파도의 윤곽이 보였다. 하늘과 맞닿아 서로 까맣게 엉긴 지평선에서부터 파도는 내게 다가오려다 부서졌다. 끝없이 부서지며 끝없이 일어섰다. 파도가 마지막으로 뻗으며 만드는 손톱 같은 하얀 띠. 그 위로 바람이 날아올라 창문에 부딪혔다. 내게 오고 있구나. 바다가 마음으로 오고 있구나.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마음에도 똑같이 파도가 오고 있겠지.
"사랑해."
"응?"
"사랑해."
"나 사랑해?"
"응"
그녀의 눈을 바라보다 나도 모르게 사랑한다는 말이 나왔다. 바다가 내 마음으로 온 이 순간 언젠가 해야 했던 말이 그녀에게로 갔다. 손잡고 바라보았던 달빛을 담아낸 작은 섬의 바다 앞에서부터 지금까지 나는 이 말을 하기만을 기다린 것이다. 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오빠에게 사랑한다는 건 뭐야?"
"어……."
예상을 벗어난 대답. 바다를 앞에 두고 나도 사랑해 같은 말이 나올 줄 알았는데 사랑이란 무언지 내게 되물었다. 그러게. 내게 사랑한다는 건 무얼까. 보고 싶은 마음 부여잡고 만날 날만을 기다리는 것일까. 너의 오른쪽 눈 아래 작은 점이 있다는 게 잠자기 전에 생각나는 것일까. 여러 생각이 앞다투어 나오려다 머릿속이 꼬였다. 멋지게 말하고 싶어 생각의 매듭을 풀어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머리에서 정리가 되지 않으니 입은 당연히 움직이지 않았다. 초 단위로 시간은 지나고 그녀는 내 눈을 바라보고 있다. 이제 대답을 해야 할 시간이 되었는데 나는 넋이 나갔다.
"그냥 보면 느껴져."
"그래?"
제시간에 답을 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아무 말이나 나와버렸다. 그녀는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알 수 없는 표정. 그녀는 나의 사랑을 무엇이라 생각하고 있을까. 갑자기 튀어나온 사랑과 빈약한 근거. 빈약한 근거만큼 내 사랑도 가볍다 생각할까. 속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처음 바깥으로 나온 사랑이었는데 그냥 보면 느껴진다니. 앞뒤 맞지 않더라도 구체적인 이유를 대야 했다. 시간이 걸려 조금 더 무안해지더라도 정리해서 나와야 했다. 바다가 마음으로 오고 있는 날에 나는 그녀의 마음을 향해 손만 뻗고 가라앉아버렸다.
가벼웠던 나의 사랑은 끝내 이별로 무너졌다. 아니, 쉬운 사랑이었을지도. 그녀를 처음 봤을 때 우리는 세상과 나뉘었다. 둘만 존재했고 주인공이었다. 그때는 운명의 사랑이었고 모든 것이 완전했다. 완전했기에 덜지 않아도 더하지 않아도 됐다. 그렇기에 쉬웠다. 아무런 노력 없이 그저 그녀의 옆에 있으면 됐으니까.
'사랑해'라는 게으른 말이다. 내 안과 밖에 있는 그녀를 하나하나 대면해서 알려고 하지 않고 쉽게 3어절로 줄여 내뱉는 말이다. 내 감정에만 취해 무책임하게 내뱉는 말이다. 그녀에게 이야기해주고 싶다. 그 순간 바다처럼 네가 내 마음에 오고 있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