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다시 보게 된다면
장근이는 머리가 까만 아이였다. 내 머리도 까만데 장근이 앞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없었다. 덥수룩하게 내려와 귀의 1/3을 가린 머리는 햇빛을 받으면 뚜렷한 외곽선이 나타났다. 외곽선 사이사이에는 어둠이 자리했고 장근이가 고개를 움직이면 서로 겹치며 깊어졌다.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쑥 들어간 색. 오묘했다. '검정'이라는 같은 이름이 붙었지만 내 머리와 장근이 머리의 색은 달랐다. “검은색은 모든 색깔의 빛을 흡수해서 검게 보이는 거예요.” 과학 시간 선생님의 가르침. 그 후로 장근이의 머리를 보면 내가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장근이는 아버지가 없었다. “맹진아, 애비 없는 자식이랑 놀지 말어라. 알긋냐?” 장근이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할머니는 내게 떨어져 지내라 신신당부했다. 애비 없는 자식은 버릇이 나빠 친해지면 나까지 물들 거라는 할머니 말씀. 장근이는 버릇이 나쁜 아이가 아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눈에 금방이라도 깔깔 웃을 준비가 된 큰 입. 실수를 하면 “아이코야” 내지르며 오른손을 머리 뒤로 넘기는 우스꽝스러운 동작. 자기가 어떤 상황인지 파악하는 게 어려워 모자라 보이기도 하는 장근이는 언제나 착한 애였다. 그리고 작은 동네에서 나랑 동갑인 남자아이는 장근이뿐이기도 해서 나는 할머니 말을 듣지 않았다. 동갑 친구가 없다는 건 매우 허전한 일이다. 언제나 같은 편이 되어주는 건 아니었지만 마지막 순간에 동갑이니까 곁에 있어줄 것 같은 예감. 든든한 그 느낌을 할머니는 알지 못할 것이다.
장근이는 나와 곧잘 놀아주었다. 할아버지 집 마당에서 개미들이 줄지어가는 걸 보다가 심심해지면 나는 누나와 남동생과 같이 곧잘 장근이 집으로 뛰어갔다. 오른편에 가지가 자라는 작은 텃밭과 고추가 열리는 비닐하우스를 헤치고 언덕을 조금만 내려가면 장근이 집이 있었다. 대문이 없던 장근이의 집. 한쪽 담벼락에는 키가 작은 대나무들이 창호지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마당은 시멘트가 아니라 흙으로 덮여 있어 선을 긋기 좋았다. 나는 툇마루 앞에 서서 장근이를 불렀다. “장근아, 놀자~ 대머리 깎아라~ 하나님이 깎아주신대~” 대머리를 왜 깎아야 하는지 몰랐지만, 장근이 부를 때는 이 노래를 불렀다. 방에서 우다다하는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리면 장근이는 앳된 목소리로 나를 반겼다. 뒤따라 나온 미옥이 누나는 명진이 왔냐며 반갑게 맞아주었고 우리는 장근이 집 마당에서 오징어, 비석 치기를 하며 하루 내 놀았다.
장근이는 수업 시간에 항상 졸았다. 수업 듣는 게 너무 좋아 학교 갈 때 콧노래를 부르던 나는 장근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렇게 재미있는 걸 왜 듣지 않는 건지 어떨 때는 한심했다. 시험성적은 졸던 시간과 반비례했다. 장근이는 항상 꼴찌였다. 나는 장근이가 꼴찌를 한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동네 유일한 동갑내기 친구가 꼴찌를 한다는 것도 자존심 상했다. 그래서 나는 장근이가 옆에서 졸면 어깨를 툭툭 쳐 깨웠고 지금 진도가 어디까지 나갔는지 짚어줬다. 자세를 고치고 집중을 한 것도 잠시 장근이는 다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이걸 두어 번 반복하면 내가 먼저 지쳐 그만둔다.
한 번은 장근이가 나와 멀리 떨어진 자리에 앉아서 졸고 있었다. 나는 장근이를 깨우려고 지우개 조각을 장근이에게 던졌다. 지우개 조각은 정확히 정수리로 날아들었고 장근이는 퍼뜩 잠에서 깨어나 까맣고 큰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선생님은 나를 나무랐다. “왜 친구에게 지우개를 던지니?” 나는 당연히 할 일을 했다는 듯 말했다. “장근이가 잠을 자서요.” 친구가 열심히 공부하도록 도와준 거니 갸륵한 일이 아니냐고 항변했지만 선생님은 나를 나무랐다. 친구가 잠을 잔다고 지우개를 던지는 건 나쁜 일이라며면서. 억울했다. 장근이가 졸지 않고 공부를 열심히 해 꼴찌를 벗어나게 해주고 싶었던 건데. 나는 선생님과 옆에서 눈을 똥그랗게 뜨고 있는 장근이에게 입을 삐쭉 내밀었다.
장근이는 멀어졌다. 중학교에 들어가고 나는 두렵고 혼란스러웠다. 중학교라는 야생의 초원에 풀어놓은 중학생이라는 동물들. 그중에는 위험한 맹수들 몇몇이 으르렁댔고 나는 밀림 속에서 살길을 찾아 나서야만 했다. 장근이는 수풀 속에서 도움이 될 거 같지 않았다. 자신의 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어떤 불길한 일이 있을지 모르는 어리숙하고 착한 아이였으니까. 오히려 기다란 나무뿌리에 자주 넘어질 것 같았다. 장근이를 일으키러 가면 어디선가 숨어 있던 맹수에게 나까지 잡아 먹힐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장근이에게서 떠나갔다. 아무런 말도 징조도 없이. 나는 이곳을 헤쳐나갈 새로운 친구를 찾았다. 장근이도 새로운 친구를 찾았지만 자신을 보호하기에 너무 약한 무리였다. 결국 장근이는 철퍽 넘어졌고 맹수들의 먹잇감이 됐다. 매일 쏟아지는 날카로운 손길들. 장근이는 점점 말이 적어졌다.
어느 날 같은 학교에 다니던 미옥이 누나가 우리 반을 찾아왔다. 앞문을 부서질 듯 열어젖힌 미옥이 누나는 반을 향해 외쳤다. “너네 왜 이렇게 못됐니? 장근이가 뭘 잘못했다고!” 꽉 쥔 누나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명진아 너 그러면 안 돼. 너 장근이 친구잖아. 친구면 도와줘야지.”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눈을 마주칠 수도 없어 고개를 떨궜다. 나 살자고 장근이를 버리고 갔으니까. 동네 유일한 동갑내기 친구였는데 내가 살아남기 위해 짐처럼 느껴지던 장근이를 매몰차게 밀어냈으니까. 이기적인 놈. 나는 동물이었다. 비겁한 동물. 그 후로 장근이는 보이지 않았다.
장근이는 무얼 하고 있을까? 가끔 불을 끄고 누우면 까만 천장에서 장근이의 모습이 떠오른다. 커다란 눈과 커다란 눈동자. 까만 피부와 시커먼 콧수염. 실수했을 때 보여주는 우스꽝스러운 동작. 그 동작을 참 좋아했었는데. 장근이 이름을 구글을 찾아보아도 페이스북을 찾아보아도 김장근을 찾을 수 없었다. 장근이를 찾았다면 연락을 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동물이던 내가 장근이에게 저지른 잘못을 고해야 할 텐데. 눈을 감고 울멍울멍 찾아오는 까만 어둠을 안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