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다페스트의 밤

둘은 초승달이 뜰 때 여행을 시작했다.

by 김연큰

"와우~"

"짝짝짝짝!"


비행기의 무사 착륙을 축하하는 사람들의 환호성과 박수 소리에 J와 P는 정신을 차렸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도착했다는 건 몇 초 뒤에 깨달았다. 튀르키예 이스탄불을 경유하는 비행기였기에 비행시간이 길었지만 J와 P 둘 다 비행기에서 정신없이 곯아떨어져 순식간에 도착한 느낌이었다. 여행 직전까지 마무리할 일이 많았고 특히 출발 당일은 새벽에 출발해야 했기에 초긴장 상태였다. 비행기에 무사히 탑승한 후에야 둘의 긴장은 풀렸고 그 결과는 이코노미 좌석의 불편함도 이겨내고 만 꿀잠이었다.


헝가리의 입국 심사는 매우 간단했다. 정확히 말하면 한국인이라 간단했다. 얼마나 한국인이 많이 오기에 그런 정책이 생겼는지 모르겠지만 한국인 전용 게이트가 몇 개 있었고 그쪽에 여권과 얼굴을 스캔하면 입국 심사가 끝났다. 하지만 관문이 하나 더 있었으니... 무장 경찰로 보이는 이가 둘을 불렀고 짐 검사를 했다. 당연히 무사 통과했지만 그렇게까지 짐 검사를 받을 인상이었나 둘은 의문이 들었다. 이후 화장실에 가보고서야 알았다. 아무리 비행기에서 꿀잠을 잤다고 해도 피곤에 찌든 둘의 꼴이 정말 말이 아니었다는 걸.




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숙소 근방에 하차하니 오후 8시 40분경이었는데 아직도 밖이 밝았다. 날씨 앱을 확인해 보니 일몰 시간이 9시 10분 경이라고 한다. 시간 감각이 없어지는 느낌이었다. 체크인 후 짐을 대충 정리하고 야경 보러 밖에 나올 때가 오후 9시 20분쯤이었고 그제야 어스름한 상태가 됐다.


부다페스트에서는 2박 3일간 있을 예정이다. 다만 첫날 밤에 도착했고 셋째 날 아침에 다음 장소로 출발해야 하므로 사실상 첫날 밤과 둘째 날 하루 종일만 관광이 가능했다. 그리하여 첫날에 도보로 야경을 구경하고 다음 날 밤에는 야경을 볼 수 있는 유람선을 예약하기로 했다. 도보로 야경을 구경하는 것은 ChatGPT에게 부다페스트의 치안에 대해 물어봤을 때 야경으로 유명한 곳이다 보니 치안이 괜찮은 편이라고 한 답변을 참고하여 정한 일정이었다.


부다페스트는 도나우 강을 중심으로 서쪽의 부다 지구, 동쪽의 페스트 지구로 나뉘어 있다. 둘의 숙소는 페스트 지구에 있고 도보로 가려는 야경 목적지는 부다 지구에 있는 어부의 요새이다. 서울 한강에 있는 많은 다리처럼 도나우 강에도 여러 개의 다리가 있지만 그중 가장 유명한 세체니 다리를 통해 어부의 요새를 가기로 했다. 사실 유명세를 떠나 경로상으로도 가장 좋은 선택이기도 했다.


숙소에서 세체니 다리를 향해 가는 길에 한 공원을 지나게 됐다. 그곳에는 큰 관람차가 있었고 그 너머에 초승달이 떠있었다. 아주 실 같은 초승달은 아니고 약간 차오른 초승달이었다.


둘은 초승달이 뜰 때 여행을 시작했다.


관람차는 마치 LED 조명을 켜놓은 듯 하얀빛을 내뿜었는데 돌아가는 속도가 여태 본 관람차 중 가장 빨랐다. J는 자신은 절대 저 관람차를 타지 않겠다며 보는 것만으로도 무섭다 했다. 근방에는 야외무대가 있었는데 주말이라 그런지 어떤 밴드가 공연을 하고 있었고 많은 이들이 모여 즐기고 있었다. J와 P도 그 분위기를 즐기며 도나우 강으로 이동했다.

tempImage2RNjWy.heic 부다성 그리고 세체니 다리

듣던 대로 도나우 강 주변의 야경이 반짝반짝했다. 야경을 좋아하는 J는 특히 감탄을 금치 못했다. 둘은 야경을 즐기며 세체니 다리를 건넜고 이윽고 어부의 요새로 가는 길에 진입했다.


문제는 어부의 요새로 가는 길이 내내 오르막이고 둘은 그걸 몰랐다는 것이다. 요새의 꼭대기가 보이니 목적지는 명확히 보이는데 왜 가까이 오질 않는 거니. 정인의 노래 <오르막길>이 브금으로 깔릴 것 같은 상황이다.

아니, 가사를 톺아보니 정정해야겠다. 그 노래와 둘이 처한 상황은 많이 다르다.


이제부터 웃음기 사라질 거야
가파른 이 길을 좀 봐

이 노래는 예고라도 했지, J와 P는 그냥 야경이 보기 좋다는 것만 알고 어부의 요새를 간 거다.


이제 끈적이는 땀
거칠게 내쉬는 숨이
우리 유일한 대화일지 몰라

이건 맞다. 분명 밤이 되어 시원한 바람이 부는 걸 느꼈었는데 땀범벅이 됐다. 말수도 점점 줄었다.


한 걸음 이제 한걸음일 뿐
아득한 저 끝은 보지 마

아니, 그럴 수 없다. 꼭대기가 보이는데 어떻게 보지 말라는 것인가!

첫날부터 이렇게 강행군이라니 잠도 문제없이 잘 거 같고 시차 적응도 왠지 바로 될 것 같은 느낌이다.


그렇게 힘들게 도착한 어부의 요새는 생각보다 화려했다. 지붕에는 갖가지 타일이 붙어있었고 여러 장식이 많았다. 어부의 요새에서 조망할 수 있는 강 건너편 야경에 감탄하고 있는 J와 달리 P는 유심히 어부의 요새를 관찰하고 있었다.


"여기 내려가면 국회의사당 뷰 포인트가 있대."

"그건 나도 구글맵에서 보긴 했어. 근데 어부의 요새 여기는 낮에 오면 정말 예쁠 거 같아."

"에, 어떤 점 때문에?"

"지붕에 타일도 여러 색으로 붙어있고 뭔가 장식이 많은데 밤에는 그 색깔이 잘 안보이잖아. 조형물도 잘 안 보이고."


(낮에 보는 어부의 요새는 정말 아름답다.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국회의사당 뷰 포인트는 말 그대로 국회의사당 바로 건너편의 강변을 뜻했다.

https://maps.app.goo.gl/d2oFAiKTSXLyuXvEA


어부의 요새에서도 관광객이 꽤 있었지만 이쪽이 훨씬 많았다. 사진 찍는다고 정신없는 인파를 피해 그나마 한적한 곳으로 갔다. 어부의 요새에서 보는 야경은 멀리서 국회의사당 및 도나우 강을 전반적으로 바라보는 느낌이라면 강변의 뷰 포인트는 정확히 국회의사당에 집중한다. 그래서 바로 눈앞에 꽉 차게 펼쳐진 느낌이었다. 다만 어부의 요새에서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시점이고 강변에서 보는 것은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이므로 보이는 부분에도 차이가 있다.

tempImage4qFWD9.heic
tempImageSuzif2.heic
(좌) 어부의 요새에서 본 국회의사당, (우) 뷰 포인트에서 본 국회의사당

야경을 좋아하는 J 입장에서는 각기 다른 매력을 볼 수 있어 대만족 했다. 반대로 야경에 시큰둥한 P 입장에서는 어부의 요새에서 본 야경은 고생한 것 대비 매력이 떨어진다 느꼈다. 그냥 처음부터 편하게 강변에서 보는 게 낫다 싶다. 물론 어디까지나 결과론적인 이야기일 뿐, 시간과 체력이 된다면 둘 다 보는 게 좋다는 건 P도 동의한다.


무엇보다 그 풍경을 보고자 했던 쪽이 '아쉬움을 남기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둘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다만 둘이 선호하는 여행 가치관은 대체로는 비슷하되 미묘하게 다른 지점이 있기에 어디서든 둘 중 한 명은 고생할 가능성이 있는 여행의 시작이라 볼 수 있겠다.




다시 숙소로 돌아가는 길, 세체니 다리를 향해 강변을 따라 걷는데 야경을 즐기는 유람선들이 곳곳에 보였다. 조용히 감상하는 유람선도 있는 반면, 쿵짝쿵짝 파티 타임을 즐기는 유람선도 있었다. 심지어 K-pop 유람선이라는 것도 보았다. 그 유람선을 탑승하는 곳 앞에선 한국인으로 보이는 두 청년이 BTS의 <Dynamite> 노래를 부르며 버스킹을 하고 있었다. 주변 분위기는 흥겹고 뜨거웠지만 그와 별개로 내심 P는 걱정이 되었다.


"설마 내일 우리가 타는 유람선이 저런 분위기인 건 아니지?"

"아... 절대 아니야. 내가 그런 걸 예약할 리가 없잖아."


미리 말해두자면 J와 P 둘 다 내향인이다. 그리고 추후 체코 프라하에서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 된다.

keyword
이전 07화예약보다 중요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