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김영갑갤러리 두모악
여행 중에는 어쩔 수 없이 많은 정보를 받아들이게 된다. 여행 전 숙소를 찾고 계획하는 것, 여행 중 먹는 것 보는 것 이동하는 것 심지어 생각하는 것까지 새로운 정보 습득의 연속이다. 한정된 시간 안에 하고 싶은 것이 많을수록 몸도 바쁘고 뇌도 바빠진다. 그러한 자극이 좋아 여행을 끊지 못한다. 다녀봐야만 알 수 있는 시간이 쌓여 지식으로 엮이고 채워져감이 즐겁다.
그런데 갑자기 무력감이 찾아왔다. 근 1년 1달 1회 이상 여행을 했다. 짧게는 이틀, 길게는 사흘씩. 이번 여행은 출장과 겹쳐 일주일을 훌쩍 넘기다 보니 뇌에 과부하 신호가 온 것 같았다. 게스트하우스 침대에 누워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아무것도 안 하기 위해선 뭘 해야 하는가'에 골몰했다. 숙소에 틀어박혀 TV나 책을 보는 일마저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는 일'로 여겨졌기 때문.
거기에 누워 바람소리 새소리 들으면 좀 살 것 같았다. 두모악 외에 선택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삼달교차로에서 두모악까지 쉬엄쉬엄 걷는 길에 벚꽃 비가 내렸다. 늦은 동백도 기다려 주었다.
두모악에서 일하는 지인과 점심으로 새알팥죽을 먹었다. 내게 팥죽은 할머니 생각나서 맘 따뜻해지는 소울푸드. 탁월한 메뉴 선정이었다. 사장님이 화개장터에서 죽 팔던 분이라며, '화개'라는 이름이 예쁘지 않냐는 얘길 나눴다.
두모악으로 돌아오는 길에 벚꽃길 드라이브를 했다. 두모악 직원들 출퇴근용 트럭으로.
네 잎 클로버 두 개, 다섯 잎 클로버 한 개를 찾았다. 클로버 사이로 난 쑥도 뜯었다. 한참 뜯다가 향을 맡아보니 쑥이 아니길래 잔디밭에 고이 두었다.
클로버 찾기에 몰두하는 중 개 한 마리가 후다닥 품에 들어와 비벼댔다. 갑자기 나타난 친구가 반가워 만져주고 놀아주고 같이 뛰었다. 한참 만지다가 쉬니까 더 만져달라고 앞 발로 내 손을 끌어당겼다. 그 동네 사는 아롱이라는 녀석인데 그렇게 종종 두모악에 찾아와 놀다 간단다. 두모악 손님들이 내 개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찻집 앞 공간에 뭐 바뀐 거 없냐는 질문에 "새싹이 났어" "누가 동백꽃으로 만들어둔 하트가 시들었어" 하다가 "음.. 두 사람이 생겼어" 했다. 사람 모양 조각상이 새로 놓였다. 새싹이 나는 것보다 더 자연스럽게, 원래 그곳에 있던 것처럼.
두모악 정원에는 고인의 지인인 조각가 김숙자 님의 토우 작품이 어우러져 있다. 이번에 제주를 떠나며 소장품을 더 기증하셨다고 한다. 입구에서 갤러리 건물로 가는 길에도 새 작품이 놓였다.
갤러리에 들어가 25분짜리 영상을 다시 주의 깊게 시청했다. 죽어가는 중에도 더 많은 전시를 하고 싶다며, 나름의 계획을 갖고 찍은 미공개 필름들을 제3자가 아무리 잘 전시한들 작가 본인이 하는 것과 다를 거라고 말하는 대목에 뭉클했다. 그리고 벌써 7년째 '어쩌면 잘' 전시하고 있는 지인의 생각이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대신, 작가의 마음과 큐레이터의 마음을 모두 느끼기 위해 노력하며 천천히 오래 전시장에 머물렀다.
셀카 찍으려는 손님에게 "전시장 내 촬영 금지에요"라고 말해줬다.
정원 구석구석 다니며 꽃과 나무를 관찰했다. 겨울에 안 보이던 새 얼굴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었다. 이름 모를 아이들이 대부분이라 물어보고 검색하며 공부했다. 이런 류의 정보라면 본격적으로 공부해봐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해질 무렵이 되자 바람이 거세졌다. 물기 없이 청명한 바람이 좋아 잔디밭에 조금 더 머물렀다. 고인의 작품을 떠올리며 필름 카메라에 바람을 담았다.
2010년부터 십 수 번 찾은 두모악을 이제야 제대로 다녀온 것 같다. 완벽한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