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노
동양인이 귀한 도시.
길에서 말 거는 쿠바노 열에 아홉이 "치나~"라고 부르거나 "니하오?"라고 인사한다. 중국인인 줄 알고 차이나를 치나라고 발음하는 건데 그 말투와 행동에 은근한 조롱이 섞여 있다.
"치나~"
- 노! 아임 꼬레안!
"니하오?"
- 노노~ㅂ 안, 녕, 하, 세, 요? (라고 해)
이렇게 정정하면 그들은 태도가 싹 바뀐다. "오호~? 꼬레안~?"하면서 눈을 반짝이고 한 마디라도 더 나누고 싶어서 입술이 달싹거린다. "알랍 께이팝! 빅뱅~ 샤이니~"를 연호하며 대화를 이어간 사람도 여럿. 즉석에서 빅뱅 노래를 틀고 따라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지드래곤을 좋아한다면서, 거의 내한할 기세. BTS가 대세라지만 쿠바에서 케이팝 대통령은 빅뱅이 틀림없었다. 폐쇄적이라는 사회주의 국가에도 한류 열풍이라니 어깨가 막 으쓱하다. 고마워요 케이팝.
버뜨, 오늘은 좀 지친다.
체감 온도 40도. 식사하면서 칵테일 두 잔 마셨더니 몸이 달아올라 네 배는 더 덥다. 걸음걸음 따라붙는 '치나' 소리가 슬그머니 짜증 난다. 대꾸하면 말 길어지니까 못 들은 체 하려니 뒤이어 키득키득 소리가 따라붙는다. 말 거는 사람 수만큼 짜증 지수가 올라간다. 리얼 차이니즈였다면 한판 붙었을 것 같다. 우쥬플리즈 모른 척 좀.
"앙용하세요?"
불쑥.
달팽이관에 한쿡말이 꽂혔다.
여기 한국인은커녕 동양인 비슷한 사람도 없는데 갑자기 웬 안녕하세요?
까만 얼굴의 이 쿠바 남자는 유창한 영어 사이사이에 한국말을 섞어가며 자신을 모델이라고 소개했다. 포카리스웨트 같은 티셔츠 안으로 가히 모델다운 피지컬이 엿보였다. 묻지도 않았는데 직업부터 대는 게 좀 허세끼가 있는 것 같지만 뭐, 귀엽다. 그나저나 우리 한국인인지 어떻게 알았어? 그리고 너, 한국말 어디서 배웠어?
"내 와이프가 한국인이야"
- 헉 리얼리? 뻥치지 마라!
그가 대뜸 윗옷을 걷어 올린다.
"마이 와이프 이름, 킴 민 켱"
대-박.
옆구리에 '김민경', 목덜미에 'MIN GYEONG KIM' 타투가 선명하다. 헤나 말고 타투. 리얼 타투. 이 정도 증명이면 혼인신고서 수준이잖아? 너 되게 쿨하다! 갑자기 잘 생겨 보여! 짜이와 나는 흥분했고 그도 신이 났다. 와이프 자랑을 한참 하더니 한글이 얼마나 예쁜지, 한국 여자가 얼마나 예쁜지 말하면서 혼자 감격한다. 귀엽네. 얼굴도 모르는 김민경 씨가 조금(손톱만큼) 부러워졌다.
"그래서, 와이프는 지금 어디 있어? 아바나에 살아?"
- 지금은 일 때문에 서울 갔어.
저런. 아쉽다. 왜 아쉬운지 모르겠으나 아쉽다. 와이프는 한국에 보내 놓고 길에서 한국인 붙잡고 와이프 자랑이라니 기러기 남편이 따로 없네. 게다가 잠깐 간 게 아니라 몇 개월 보낸 모양이다. 너 괜찮은 거야?
"암쏘쏘리"
- 와이? 난 지금 자유의 몸이야! 프리! 이따 클럽 갈 건데, 같이 갈래?
저, 저기? 잘못 들은 거 아니지? 내 영어가 짧아서 잘못 들은 거라고 해주라.
"얔ㅋㅋ 그러면 안되지!"
- 노 프라브럼~ 살사바 수요일이라는 클럽 알아? 거기 되게 좋아!
"어? 우리 오늘 밤에 거기 가기로 했어!"
지금 맞장구 타이밍 아닌데.. 왜 하필이면 살사바 수요일이야..
- 리얼리? 몇 시에 갈 거야?
"이따가 밤늦게"
- 그러지 말고 나랑 같이 가자! 지금 내 친구 집 가서 놀다가 같이 가. 어떤 친구냐면~
이생키...... 뭐지..?
지 친구가 어떻고 저떻고, 친구네 집이 어디고, 그 클럽이 어떻고, 한국 여자 예쁘고, 너네도 예쁘고, ...... 투머치 토커 나셨다. 김민경 씨에 대한 사랑은 어디 갔니. 김민경 씨는 지금 서울에서 뭘 하고 있을까. 별에 별 생각이 다 든다. 잊고 있던 피로가 제곱으로 밀려든다. 진짜 막 눈이 감길 지경.
우린 지금 너무 피곤해서 놀 기운이 없으니까 집에 가서 좀 쉬다가 클럽에 가겠다고, 거기서 만나자고 달랬다. 왜 달래야 되는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겨우 달랬다. 그가 좀 시무룩해졌다.
"혹시 너희... 커플이야?"
- 왓?! 우린 저스트 친구야!!
"미안 혹시나 해서 물어봤어~"
자기 꼬임에 안 넘어가는 걸 정체성 탓으로 의심했나 보다. 확인 후 급 눈빛이 끈적해졌다. 신체적 거리도 자꾸 좁아진다. 안 되겠다.
"우리 이제 그만 갈게. 정말 너무 피곤해서 그래. 이따 클럽에서 보자"
- 몇 시에?
"글쎄, 11시쯤?"
우리 발은 이미 방향을 틀었는데 붙잡고 이름을 알려달란다. 징하다 진짜. '키미'라고 했더니 성을 묻는다. 영어 이름이라니까 한국 이름 알려달란다.
"킴 같은 성이 있고 세 글자인 한국 이름"
너 쓸데없이 너무 많은 걸 아는 거 아니니? 하..
내 이름 세 글자, 짜이 이름 세 글자를 또박또박 발음하고 나서야 만족했는지 작별 인사를 해준다. 공손하게 내 오른손을 쥐더니 손등에 제 부드러운 입술을 포개고, 볼 인사 섞은 포옹까지 나눈 뒤 길 건너편에 가서 손을 흔든다. 인사마저 투머치해. 이따 꼭 만나자면서 활짝 웃는다. 내 볼에 있던 비비크림이 제 얼굴에 허옇게 묻어난 줄도 모르고.
그 날 우리는 살사바 수요일에 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