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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광 Aug 05. 2020

현실주의자 선언  

저는 이번 방학 동안 "나의 꿈을 찾아서"라는 매거진에서 1991년 대학원생 시절부터 2016년까지의 지난 시절을 회고하는 내용을 적었습니다. 부끄러운 기억도 있고 아쉬운 기억도 있지만 그래도 치열하게 열심히 살았던 시절이라 그 과거의 나를 만나 수고했다고 어깨를 두드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습니다. 돌이켜보면 자만한 시절도 있었고 좌절한 시절도 있었지만 그래도 꾸준히 성장을 했습니다. 그리운 시절이지만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서 그 정도의 노력을 다시 하라고 한다면 아마도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기에 결과에 큰 미련은 없는 것 같습니다.


제 회고에서는 자랑거리를 많이 써서  늘 승승장구하고 즐거웠던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도 않습니다. 논문을 투고하면 10번 중에 7-8번은 리젝을 먹습는다. 석가모니께서 인생의 본질을 괴로움이라고 설파하셨듯이 내 논문 투고의 디폴트는 리젝인 것입니다. 매일 괴롭다가 가끔 즐거운 것이 인생인 것처럼 매번 리젝을 먹다가 가끔 accept 가 되는 것이 논문입니다. 이는 저만 그런 게 아니라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그럴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현실주의자는 이러한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데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나이브하게 높은 기대치를 갖고서 그렇지 않은 현실에 괴로워하는 것은 낭만주의자들의 특징인데 그런 낭만주의자들은 현실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의 사고가 관념이 아닌 현실에서 출발해야 뿌리 깊은 나무가 비바람에 견디는 것처럼 행운과 불운의 장난을 더 잘 견디게 됩니다. 이를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포함하여) 세상을 당위의 관점으로 보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인생은 한 번도 공평한 적도 없습니다. 그걸 절망스러운 현실이라고 이야기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현실이 나를 비관주의자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로맹 롤랑의 말처럼 "이성은 비관주의적이지만 나의 의지는 낙관주의"를 지향하는 것이지요. 수많은 리젝 가운데에서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하다 보면 결국은 accept를 얻게 되듯이, 수많은 실패 안에 사실 성공의 씨앗이 숨어있습니다. 어차피 현실주의자는 현실을 바탕으로 사고하기에 닥친 불운에도 보다 담담할 수 있고 힘을 낼 수 있습니다. 힘든 사건 가운데에서 우리가 낙담하기보다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다시 힘을 내는 것이 중요한데 이는 어려운 현실에서도 유머와 마음의 여유를 잃지 않는데서 시작합니다.  이는 리젝션 레터의 행간에서 희망의 씨앗을 발견하려고 하는 것과 비슷할 것입니다.


이러한 저의 다짐은 현실주의의 선언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동화책에 나오는 허구의 세상이 아니라, 우리가 실제로 발을 디디고 있는 이 현실세계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보다 책임감 있는 자세를 갖기 위해서 현실주의적 자세를 취하는 것입니다. 현실주의는 약육강식의 세계를 정당화하고 속물적 세상에 순응해서 살겠다는 자세가 아닙니다. 현실주의란 내 삶을 나의 순진한 기대나 타인의 망상에서 출발하지 않고, 두 눈을 부릅뜨고 이 세상을 직시하면서, 성실함과 자아성찰을 바탕으로, 그 안에서 내 삶을 개척하고 희망의 씨앗을 찾아내겠다는 적극적인 자세입니다. 유아적인 감상적인 자세로 현실을 안일하게 인식하고 자기 합리화에 빠져서 사는 것은 나약한 자세이고 어른답지 못한 행동인 것입니다. 내 앞에 있는 커다란 현실의 무게를 깊이 인식하고 그 앞에서 또한 주눅이 들거나 조급해하지 않고 당당하고 성실하게 살고자 하는 다짐이 저의 현실주의자 선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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