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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이 Nov 23. 2021

긍정에 대한 망상

11/20/21

토요일 일기. 집안에만 있으면 뭔가 고립된 느낌이 든다 세상과 동떨어진 느낌.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이 작은 아파트. 외부세계와 단절되어 온전한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공간. 조용하고 안전한 우리만의 공간. 완전히 다른 세계의 공간... 이라고 생각하면 평온하겠지만 심심하고 지루하고 재미없는 무한궤도에 갇혀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나에게 엄청나게 큰일이 일어나서 피난처로 안전하게 대피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은 굉장한 안정감을 준다. 그리고 나를 온전히 받아들여주고 위로해 줄 사람이 있다는 믿음 역시 상당한 위안을 준다. 그게 집이다. 우리 집. 그 사실에 집중해야 한다. 




물론 단점도 있다. 그리고 장점도 있다. 단점에만 집착해서 안 좋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를 괴롭게 해도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는다. 내가 단점만을 보는 순간에도 장점은 분명 항상 존재해왔다. 그 존재를 인정하기. 무조건적인 낙관주의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상황을 볼 수 있는 시각이 필요하다. 좋은 점, 장점, 강점도 볼 줄 알아야 한다. 내가 작은 일들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기대했던 일들이 일어나지 않을 때 장점이나 긍정적인 면도 인정할 수 있도록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내 경험에 비추어 보면 끊임없이 부정적인 생각이나 걱정이 들 때는 내가 그 걱정보다 더 나은 다른 할 일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남편의 물건이 집안에 널브러져 있는 것이 거슬렸을 때, 남편이 스스로 자신의 물건을 치울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는 이유는 깨끗한 집안을 유지하고 싶은 나의 욕심이 그 외 다른 일들을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 당시 내가 마감에 쫓기고 있었다면, 내가 휴식이 절실해서 바로 잠들었다면, 내가 오랫동안 기대했던 약속이 있어서 바로 외출해야 했었다면, 조금 널브러진 집안 정도야 덜 거슬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다른 이유는 그 일이 나의 일이라는 강박관념 때문이다. 어지르는 사람 따로 있고 치우는 사람 따로 있냐는 잔소리는 바로 내가 나를 치우는 사람으로 정의 내리는 상황이었다! 가사분담으로 팽팽하게 대치했던 우리는 주방일은 남편이 그 외 청소는 내가 하기로 극적 타협하면서 나는 더 이상 싱크대에 설거지 거리가 아무리 쌓여있어도 스트레스받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쓴 그릇을 싱크대에 놓으면서도 미안함이나 죄책감이 들지 않는다. 나는 나의 몫의 집안일을 하고 남편은 남편 몫을 하는 것이니까. 남편이 바쁠 텐데 그냥 내가 후딱 대신해줄까? 하는 얄팍한 배려심 역시 내가 정말 진심에서 우러나올 때만 발휘한다. 나중에 나는 이렇게 도와줬는데 너는 왜 안 해? 하는 원망이 들지 않도록, 내가 선택해서 하는 일이고 내가 책임을 질 수 있을 만큼.




객관적인 시각으로 나의 상황을 바라보면 가장 좋은 점은 지금 바로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일들이 생각나는 것이다. 내가 부정적인 면만 보고 불평불만을 하는 그 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더 나은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더 건설적인 사고, 더 합리적인 계획, 더 효율적인 방법 등등을 찾아내서 내가 불만인 상황을 고칠 수도 있고 나의 불평을 해결해서 환경을 바꿀 수도 있다. 무엇을 할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고 바로 실천하기. 


불평불만하며 그 상황에 안주하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내가 싫은 것만 생각하며 하지 말아야 할 것이나 하면 안 되는 것에 집중하면 내 행동반경이 그만큼 좁아진다. 안된다 못한다 하면 정말 못하게 된다. 그냥 내 인생 자체가 너무 불행해진다. 할 수 있는 일,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나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고 나의 가능성을 실험해 볼 수 있다면 닫혀있던 마음이 조금 열린다. 

단점이 자꾸 눈에 띌 때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은 그 불안정한 상황을 잘 견딜 수 있도록 해준다. 뼛속까지 한국인인 나는 빨리빨리가 기본 신속 정확 지금 당장이 당연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증명서가 필요하면 인터넷으로 클릭 한 번에 발급받을 수 있고, 문의도 메신저로 바로바로, 배달도 금방금방. 그런 환경에 익숙한 사람이었는데 이곳에 오면서 참을성과 인내심을 배웠다. 거의 모든 행정처리는 한 두 달 기다려야 하고, 문의 전화도 한 시간을 기다려도 연결이 안 될 때도 있고, 2-3주 전에 예약을 해야만 하는 그런 상황. 


처음에는 내가 원하는 것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굉장한 절망감과 상실감을 느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을 때 그때 엄청난 좌절스러움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아무리 화를 내도 해결되는 건 없다. 그냥 그 화를 내는 사람만 안타까워질 뿐이다. 사실 그 몇 주, 몇 달, 몇 년을 기다리는 그 기간 동안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을 때도 있다. 그 무기력함, 그 절망감, 앞이 보이지 않고 희망도 잃게 되는 그런 상황이 생긴다. 이곳은 그런 상황이 정말 많아서 불확실성을 견디는 자세가 필수 불가결한 능력이 된다. 소극적 수용력, negative capability. 




한 가지 나에게 굉장히 도움이 되었던 점이 있다. 내가 예전에 취업허가가 나오기 전 한 초등학교에서 봉사활동을 했었는데, 저학년 아이들에게 감정표현 단어들을 굉장히 다양하게 가르쳐주는 수업을 보았다. 감정 조절이 어려운 아이들이 불안을 느끼거나 불편한 상황이 있으면 폭력성을 보일 수도 있는데, 이렇게 단어를 여러 개 알려주면서 자신의 상황을 말로 표현하게 도와주고 무엇을 원하는지 설명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굉장히 인상 깊었다!! 정말 필요한 교육이었다. 그렇게 내 감정을 표현하고, 내가 원하는 것을 알고, 어떻게 해야 할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한다면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상황에서도 어느 정도 버틸 수 있게 된다. 


우리나라에서 살았던 나의 경험은 항상 정해진 규칙이 있었다. 예를 들어 감정표현도 내가 할 수 있는 정해진 규칙이 있었던 것 같다. 화난다, 짜증 난다, 슬프다 등의 감정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보통 노력한다 성실하다 공부한다 등 딱히 감정은 아니지만 그 당시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행동들만 받아들여졌다. 내가 원하는 것이 분명하게 있어도 그 정답으로 정해진 학생의 삶에 맞지 않다면 표현조차 할 수 없고 결국 그렇게 억압당한 아이들이 자신의 감정도 제대로 모르고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 때문에 어떤 행동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그렇게 큰 것 같다. 


금쪽같은 내 새끼나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에 출연한 부모들도 그렇게 커서 아이들에게 그렇게밖에 해줄 수 없었겠지. 사실 부모들도 잘 모르는 거 아닐까. 어린 나이에 부모가 됐거나 마음의 준비가 안된 상태에서 부모가 됐거나 자신도 어떻게 사랑을 주는지 또는 사랑을 받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부모가 됐다면... 


우리 감정을 정확히 알고 표현할 수 있는 능력, 내가 원하는 것을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능력,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하고 싶은 것, 해야만 하는 것 등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 등 모두 중요하다. 긍정적인 사고를 할 수 있도록 생각의 물길을 터주는 큰 디딤돌이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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