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이 Mar 21. 2022

남편의 하드웨어

갈 수 없는 이유 4

결혼하면 사소한 것에서부터 불만이 시작될 때가 있다. 대체 왜 저럴까 아무리 머리 싸매고 고민해봐도 도대체가 이해가 가지 않을 때. 사실 저 사람이 왜 저러는지 이해도 안 될 뿐만 아니라 이해해 봤자다. 어차피 쟤는 계속 저럴 거고 옆에서 내가 백날 이야기해봐야 귓등으로도 안 듣는 사람이니. 느릿느릿 그의 방식을 보고 있자니 내 속만 터진다. 시간은 시간대로 버리고, 돈은 돈대로 얼마를 쓰고도, 생색은 생색대로 그렇게 내고서도 간단한 일처리 하나를 제대로 못하니...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범위 밖의 사고방식이나 생활습관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던 이유는 내가 너무나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착각 하)기 때문인 것 같다. 더 효율적인 방법 더 빠른 방법 더 나은 방법을 나는 알고 있고 제일 좋은 방법으로 하는 것이 내게는 당연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건 남편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자신의 방법이 가장 익숙하고 편안하니 그 방법을 고수하는 것일 뿐. 결과가 어찌 됐든 그는 그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것이다.


우리는 그냥 사양이 서로 다른 것. 나고 자란 환경도 다르고, 보고 듣고 느끼는 것도 다르고,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생각하는 것도 다르고, 말하고 행동하고 표현하는 것까지. 어느 누가 맞다 틀리다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냥 애초에 처음부터 다르게 태어난 것이다.




랩탑으로 치면 우리는 제조사도 다르고 설치된 OS도 다르고 CPU, RAM, SSD, 배터리 등의 스펙이 다르지만 랩탑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해내고 있는 것. 나는 배터리가 거의 두 시간이면 끝난다. 중간에 틈틈이 충전도 해줘야 하고, 일이 다 끝나면 풀 충전될 때까지 좀 쉬어야 한다.


나는 배터리 닳기 전에 할 일을 끝마치고 싶어서 순간 집중력 최대치로 끌어올려 멀티테스킹도 거뜬하고 초스피드를 선호하여 메모리 용량이 크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지난번 보다 더 효율적으로 할 수 있을지 이전의 일들과 여러 상황들을 고려하여 고민하기 때문에 저장공간도 크다.


그러나 만약 내가 계획했던 대로 일이 되지 않아 다시 해야 한다면 시스템 오류 난다. 이렇게 저렇게 빨리 해서 끝내야지 하고 그것만 보고 있었는데 내가 간신히 지탱하고 있던 끈이 뚝 끊어진 것과 같은 좌절감을 느낄 때도 있었다.




반면 남편은 배터리가 오래가니 느리게 작업해도 전혀 문제 될 일이 없다. 그러나 어차피 배터리가 많이 남았으니 동시에 두 가지 일을 할 필요도 없고 만약 한 번에 일이 안 끝나더라도 아직 체력이 충분히 남았으므로 그냥 다시 하면 되니 전혀 문제 되지 않는다.


반면 메모리나 저장공간의 용량은 적은 편. 메모리가 적으니 그는 자신에게 충분히 납득되는 것들만 보이고 들린다.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들만 완벽하게 여과시켜 그것들만 뇌까지 전달된다. 그러니 전체적인 맥락 안에서의 일의 순서나 중요도, 효율적인 시간 분배와 동선, 몇 가지 경우의 수와 리스크 등을 생각하기 위해 관심을 분산시키지 않는다. 오로지 자기가 생각하는 것만 생각한다.




그러니 같은 일을 해도 시간이나 노력을 더 써야 하며 한 가지 일을 할 때에는 다른 것들을 신경 쓸 여력이 없는 그런 사람이다. 행동이 느리고 손도 느려 한 번에 하나의 일을 제대로 하기에도 벅찬 사람인 것이다. 그러니 다른 일(직장, 요리, 식사, 휴식, 영화감상 등 모든 일)을 하면서 나에게 규칙적으로 연락을 하는 것은 무리인 것. 그래, 그냥 이 사람이 그런 사람이라 그런다 치자. 죽었다 깨나도 안 되는 걸 너도 참 어쩌겠냐. 너무너무 머리가 좋아서 위치 기록 숨기고 카톡 내용 삭제하고 이 여자 저 여자 양다리 삼다리 걸치는 거 아닌 게 어디냐. 차라리 그게 더 속 터질 수도 있다.




https://link.inpock.co.kr/loveyourlife ​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