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눈치도 없냐? 제가 왜 당신 눈치를 봐야 하나요?
지난 주말, 마음이 심란했다. 한국 사람들을 만나서 재밌게 노는 게 나의 낙인데... 요 몇 달간 내가 만났던 사람들에게 점점 더 넌씨눈이 돼가는 것 같았다. 내가 점점 공감력이 부족해지는 것 같았다. 내가 이 구역의 또라이인가?
나도 중학교도 반이나 한국에서 나왔는데, 나도 대학교는 한국에서 나왔는데, 나도 한국에서 알바며 직장이며 10년 가까이 다녔었는데. 대화 중에 물망에 오른 젊은이들의 행동이 나는 이해됐다. 왜냐면 내가 그랬으니까 ㅠㅠ 그때 내가 빌런이었나? 내가 MZ세대의 선두주자였나? 아니 그게 그렇게 욕먹을 짓 인가? 나 되게 열심히 일했었던 것 같은데... 내 기억이 왜곡됐나?
내가 처음으로 기억하는 건 한국의 어느 사기업에서 외국인 대상으로 일했을 때였다. 규정에 따라 환불 불가하다는 안내를 죄송스럽게도 몇 번이나 해야 했던 한 시기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덩치 큰 미국인 남성 두 명에게 환불은 규정상 안 된다며 계산 시 동의한 내역을 보여드리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부장님이 나오시며 "오케이~ 여기 환불해줘~" 하시는 게 아닌가?
당시 나는 입사 한지도 얼마 안 됐을 때라 직원의 입장보다는 고객의 입장에 더 가까웠다. 그리고 동병상련의 심정이었을까? 나도 환불을 물어보기는 하지만 안 된다고 하면 받아들였을 것 같아서, 환불을 못 받고 돌아간 고객님들에게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부장님께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여쭤봤다. "환불되는 거면 환불 문의했던 분들이 몇몇 계신데 그분들도 해줘도 되나요?" 돌아오는 답변은 이미 지나간 일이니 그럴 필요 없다고. 아니, 이 미국인 남자 둘은 해주고 왜 다른 국적 사람들은 안 해주는지? 진상을 부리면 해주고, 쎄 보이면 해주고, 본인 맘대로 해주고? 이럴 거면 규정은 왜 있는지?
부장님은 대체 왜 그러셨을까? 자신의 권위에 대한 재량을 인정받고 싶었을까? 본인이 영어를 알아 들었다는 사실을 뽐내고 싶었을까? 그 천조국 출신 대기업 입사 예정이신 분들께 땡큐 땡큐 소리를 듣고 싶으셨을까?
근데 나는 그 당시 부장님께 관심이 1도 없었다. 내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단 하나였다. 이곳이 내가 일할 가치가 있는 곳일까? 아니 이렇게 큰 회사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솔직히 이게 인종차별 아닌가?) 알고 보니 공공연히 이런저런 일들이 더 많았다.
나는 반 년 만에 퇴사했다.
그다음으로 기억나는 건 한국의 어느 공기업에서 외국인 상대로 일했을 때였다. 내가 입사한 지 몇 주 되지도 않았던 어느 날, 외국인 VIP 님들을 위한 연말 행사가 있었다. 큰 라운지에 준비된 행사장에는 핑거푸드~ 샴페인~ 풍선~ 크리스마스 트리 장식~ 등이 있었다. 통유리 밖의 세상은 어둡고 추운데 라운지 안의 세상은 밝은 조명에 따뜻하고 사람들 북적북적해서 굉장히 좋아 보였다. 오 공기업 스멜~
그.런.데. 나는 그날 나의 귀를 의심하게 되는 한마디를 들었다. 그것도 외국인에게서. 행사가 사전에 공지된 시간을 넘기면서 친구와 늦은 저녁 약속이 있었던 나는 살짝 걱정됐다. 늦으면 어떡하지? 언제 끝나지? 왜 아무도 안 가지?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속은 안절부절이었다. 그러자 어떤 외국인 한 분이 내 옆에 슥- 다가와서 하는 말. "너네도 퇴근하고 싶은데 우리 때문에 못하지? 껄껄껄!"
운명의 장난일까. 그다음 해 내가 그 행사를 담당하게 되었다. 그 행사를 준비하면서 나는 한 가지 확실하게 했다. "정해진 행사시간 내에 끝내도 되나요?" 그리고 내가 들은 답변은 "할 수 있으면 하라"는 말이었다. 물론 "근데 그렇게 안 될걸..." 이 뒤따랐지만. 나는 할 수 있으면 하라는 말이 긍정의 대답인 줄 알았다 ^^; 나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행사 당일 오후 5시 45분, 나는 마이크를 들고 기념품을 나눠주며 와주셔서 감사하다는 클로징 멘트를 했다. 그리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의 감사인사를 했다. "메리 크리스마스~ 해피 뉴 이어~" 평소보다 짧은 행사에 당황한 듯 보였으나 이내 문 밖으로 퇴장하며 서로에게 하는 말을 들었다. "우리 어디 레스토랑이라도 갈까?"
그랬다. 행사가 일찍 끝나고 더 놀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그들끼리 더 놀 수 있었다. 만약에 오래 연회를 하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면 충분이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행사를 일찍 시작해서 끝나는 시간에 맞추거나, 행사 끝나는 시간을 사전에 늦은 시간으로 정하거나, 1차, 2차로 나눠서 공식 행사는 정해진 대로 진행하고 뒤풀이 식으로 연회를 계속하거나...
나에게 행사를 길게 하라고 지시가 있었다면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충분히 초과 근무도 할 의향이 있었다. 다만 정해진 시간은 6시까지였는데, 당연하게도 (그것도 무급으로) 상황을 봐가면서 알.아.서. 남고 싶지는 않았다.
그게 또라이라면 나는 또라이였나 보다. 그런데 반전은 나는 내가 일했던 모든 사무실에서 최선을 다해 일했고, 그래서 그런가 미련도 후회도 없었다. 정해진 체제가 없다면 체제를 만들었고, 규정이 있다면 대상자에게 모두 알려 서명을 받았으며, 필요한 게 있다면 했고, 내 업무라면 했다. 일이 없으면 나서서 홈페이지라도 보면서 수정 보완할 부분을 찾고, 그래도 일이 없으면 창고 정리라도 했다.
하지만 나는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억지로 하려고 무리하지 않았다.
몇 년 만에 한국에 오시는 아빠와 미국에서 먼길 온 미래의 사위가 될 당시의 남자 친구와 역사적인 첫 만남을 성사하기로 했다면, 나는 과감히 나의 퇴사 송별회를 불참하기도 했다.
1박 2일 워크숍도 내가 일정이 어려우면 첫날까지만 참여하기도 했다. 그게 나의 최선이었고, 그 첫날 나는 워크숍이 정말 재밌었다. 그때 처음 먹어본 꼬막의 맛이란... 잊지 못해
내 담당 업무의 성수기에 4박 5일 해외 출장은 힘들 것 같다고 거절하기도 했다. 물론 노트북 들고 가서 일할 수도 있었겠지만, 꼭 필요한 출장이 아니라 결국 아무도 가지 않은 출장이었다.
그 대신, 근무기간 동안 나는 해외 출장 가서도, 타 부서 업무 지원이나 외부 교육을 가서도 재밌게 열심히 일했다. 나는 회식이 잡혀도 내가 가고 싶을 때만 가서 회식이 정말 재밌었다. 특히 홍콩에서 일할 때 한식당에서 회식하면 백퍼 참석. 맛집도 가고 고기도 먹고 술도 먹고 ㅎㅎㅎ
물론 실수도 엄청 많이 하고 고치려고 노력했고, 욕도 배 터지게 먹기도 하고, 정말 값진 경험을 했다. 좋은 동료 분들도 많이 만나서 인복 넘치게 도움도 많이 받았다.
어쩌면 내가 융통성 없이 규정만 찾았을 수도 있다. 사랑합니다 고객님의 마음가짐이 안됐을 수도 있다. 열과 성을 다해 뼈를 묻겠다는 의지가 없었을 수도 있다. 그게 또라이? 사회 부적응자? 넌씨눈? 이라면 어쩔 수 없다. 뭐 법에 걸리는 것도 아니고.
"누가 몰라서 안 하냐?" 하는데 "알면 해야지, 하면 되지 않느냐?" 하고 반문하고 싶다. 적어도 이러이런 문제가 있는데 저러저런 대안을 찾아 해결하려고 하는 중에 있으니 그때까지 이렇게 저렇게 하자. 라고 찾는 시늉이라도 해야지, 까라면 까야지 안돼도 되게 하라! 하는 고자세는 진짜 아니다.
문제가 있다면 공론화해서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회사 시스템을 고치고, 당사자간의 합의를 이루어야 한다. 대안을 찾고, 자원을 찾고, 항상 방법은 있다. 불평불만만 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지나치게 공동체 의식을 강조하며 이용당한다. 불필요하게 높은 책임감에 압박받지 않아도 된다. 나는 회사가 아니다. 나는 사장님이 아니다. 나는 직원으로서의 권리를 알고, 아는 만큼 행사해야 한다. 억지로? 강제로? 어쩔 수 없이? 상황을 그럴 수밖에 없게 만드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곳에서 버티는 것도 하나의 선택이다. 내가 만약 생계를 책임지고 토끼 같은 자식과 여우 같은 남편이 있었다면 버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잠시 시간을 갖고 생각해 볼 필요는 있다. 이곳이 진정으로 내가 몸과 마음을 다해 일할 가치가 있는 곳인가? 방법은 많다.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네가 운 좋아서 그런 거지 상황이 다르다고 한다. 그래, 운 좋았다고 치자. 나에게 수많은 기회가 왔고 나는 그 기회를 잡았다. 나는 내가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선택을 매 순간 했다. 물론 다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그래도 이미 지나간 일인데 어쩌겠느냐. 그 선택들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다.
그래서 나는 지금 열심히 일하고 있다. 내가 바라는 나의 모습을 위해. 내가 원하는 나의 경력을 위해.
가끔 스스로 쫄릴 때가 있다. 이래도 되나 싶을 때. 팀장님보다 부장님보다 더 무섭게 다가왔던 시어머니께도. (그냥 내가 느끼기에 그랬다 시어머님은 죄가 없다)
그런데 나 이제까지 살면서 가장 사랑으로 낳아주고 키워준 우리 엄마 아빠 말도 드럽게 안 듣는데? 제가 왜 당신 눈치를 봐야 하나요?
사랑하는 고객님~ 상사님~ 어머님~ 남편~
눈치 주는 것은 당신의 자유이지만, 저는 눈치 보지 않겠습니다! 저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있으며, 자유의지를 행사할 수 있고, 제 행복 추구권을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저는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하며 사회의 일원으로 제가 맡은 바 최선을 다하며 제가 옳다고 믿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당신도 당신의 인생에서 진심으로 행복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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