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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이 Jun 28. 2022

일라이-지연수, 미국인 남편 한국인 아내의 부부 갈등1

우이혼2를 보며... 직접 살아보지 않으면 몰랐을 정서 차이

前 <사랑과 전쟁> <미워도 다시 한번> 애청자, 現 <애로부부> <연애의 참견> <우리 이혼했어요> 애청자로서 내가 요즘 너어어어무 감정 이입되는 커플이 있다. 일라이-지연수 부부. 


그 이유는 내 눈에는 이 부부가 우리와 너무나도 닮은 것 같아 보여서 ㅜㅜ 우리가 겪었던 비슷한 양상의 갈등을 겪고, 진심은 따로 있는데도 표현하지 못하고, 아주 미묘한 차이를 인정하지 못하는... 예전의 우리와 비슷해서 자꾸만 보게 된다. 사실 방송에 나오지 않은 둘 만의 이야기가 있고, 남은 절대 알지 못하는 상황들도 있겠지만 말이다.


나와 남편도 서로의 기억도 다르고, 각자의 입장도 다르고... 물론 모든 미국인 남편이 그렇다는 건 절대 아니고, 모든 한국인 아내가 그렇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일라이 하는 말이 우리 남편이 했던 말과 너무 똑같고, 지연수 하는 생각이 옛날에 내가 했던 생각들과 너무 비슷하다... 그래서 나는 지연수도 너무 공감되고 일라이도 너무 이해된다. 


옛날의 우리가 생각나 써보는 글.




1. 인정받고 싶은 나의 감정



나도 예전에 남편에게 대화하자 그러고, 내 감정을 쏟아부었던 적이 많았다. 상처받은 나의 마음을 너는 알고 있어야 한다고, 네가 나에게 이만큼이나 상처를 줬고 그래서 내가 얼마나 힘든지를 깨달아 보라고. 


그런데 남편은 왜 네가 그런 걸로 상처받냐고, 상처받을 필요도 없는 일이라고, 나의 감정을 묵살해버렸다. 그럴수록 나는 내 감정이 무시당한 것 같아 계속 과거 얘기를 꺼내고, 그러면 남편은 나의 이야기를 더더욱 듣기 싫어했다.




"공감을 원하는 거야"


옛날에 물론 좋은 기억도 있겠지만, 힘든 기억이 너무 압도적이어서 그 기억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으니까. 그래서 대화를 끝내지 못하고 자꾸 과거 얘기나 상처받은 얘기를 꺼낸다. 거기에 주변 사람들의 의견을 덧붙여서 나의 감정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한다. 


실제 지연수가 한 말 중에 나도 했었던 문장이 있다.


"왜 피해를 당한 나에게 그러지 말라고 해!"

"네가 나를 버렸다." 

"넌 내 기분 생각해 봤어?" 

"나도 힘들었어!"




나는 왜 자꾸 다 지난 얘기를 끄집어냈을까? 내가 옛날 얘기를 꺼낼 때마다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도 아닌데 말이다. 결국 말싸움만 계속되고, 나는 더 억울해지고, 남편은 죄책감을 느끼지도 않는데, 왜 자꾸 그게 한이 되어 말을 해야만 했을까? 


이유는 간단했다. 나의 감정을 인정받고 싶어서... 


그런데 내가 그렇게 느꼈다는데, 나의 감정이 계속 무시당한다면... 진짜 너무 억울하고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인 것이다. 나는 그렇게 느꼈고 그 감정은 아직도 이렇게 생생한데, 자꾸 남편이 그렇게 느꼈던 내가 잘못이라고 왜 스스로를 힘들게 하냐고 그냥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고 지적해대면. 진짜...







2. 불확실성 회피



이건 어쩌면 개인 성향의 차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쩌다 한국인> 에서 한국인의 특징으로까지 소개됐고, 실제로 내 주위의 수많은 한국인 (나의 지인들은 대부분 나와 비슷한 30-40대 여자) 들이 비슷하게 생각을 한다.


바로 '불확실성 회피' 성향. 일라이가 지연수에게 "1부터 100까지 정해놓고 스스로를 힘들게 한다"라고 지적했던 성격. 우리 남편이 나에게 왜 그러냐며 이해하지 못했던 성격. 상황을 봐가며 그때 가서 결정하자고, 계획대로 안 될 수도 있고 다른 기회가 언제든지 있을 수도 있는데, 왜 처음부터 끝까지 정해놔야 하냐고. 내가 남편에게 가장 답답했던 부분이기도 하다. 




"당연하지"


모든 걸 다 갖추고 시작해야 하는 우리. 그래서 한국사회에서는 결혼할 때 부모님과 시부모님의 전폭적인 지원까지 받으며, 집 혼수 다 완벽하게 갖추고 시작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독립하기가 어려워지고, 시집살이가 대물림되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완벽하게 준비하지 않으면 시작조차 안 한다. 결혼할 때 준비하지 않으면 앞으로 평생 기회가 없을 것처럼 말이다.


기러기 아빠도, 미국 행도, 시댁과의 합가도 거부하며, "당연하지, 그건 가족이 아니야" 라고 말하는 지연수가 너무나도 이해가 된다. 지연수가 원하는 가족이란 사소한 일상을 공유하고 다 같이 식사하는 생활 그런 단란한 모습일 수도 있으니까. 


나도 비슷하게 생각했었던 때가 있었다. 우리가 정착할 수 있는 곳에서 안정적으로 살아야지. 부부라면 저녁 한 끼라도 같이 먹어야지. 결혼했으면 배우자가 싫어하는 행동은 하지 말아야지. 상대를 생각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배려하는 게 당연하지. 




"진짜 리얼을 원했어"


그러니 "예쁘다" "고맙다" "사랑한다" 애정표현을 해줘도 부족하게 느껴지고, 그게 진심인지 항상 시험해야 했다. 지연수가 "카메라 앞에서만 잘해주는 건지 헷갈린다" 고 한 것처럼 나도 남편이 왜 남들 앞에서만 호인인 척하는지 가증스러워했다. 일라이가 사과를 해도 사과를 해도 "왜 갑자기?" 그런 얘기를 하는지 못 미더워했던 것처럼 나도 남편의 진심을 계속 의심했다.


일라이가 아무리 수영장 있는 펜션을 예약하고 여행을 계획해도 "남자들은 모르는 게 있어. 내가 춘천을 다시 가자고 왜 안 했겠어." 하면서 여행지에 대한 실망감을 털어놓는 것처럼. 

일라이가 "대낮에 길거리 데이트할 때 좋았냐"고 물어보면 "진짜 리얼 데이트를 원했었지. 카메라 없이." 라며 진짜 리얼 데이트는 해본 적 없다고 선 긋는 것처럼.

"오로지 민수를 위한다"는 일라이에게 "누구를 위해 한국에 오는 거냐"고 "믿지 않는다"고 자꾸 궁지를 모는 것처럼.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자기 자신을 갈아 넣고 쏟아부어도, 만족하지 않는 아내와 그로 인해 드러나는 자신의 무능력함에 남편은 좌절했다. 자신이 진심이, 자신의 최선이 재단당하고 평가당하고 폄하당하니까. 그럴 바에 내가 왜 최선을 다해야 하는 거지? 하는 마음이 들 수도 있겠다.


나도 남편에게 그렇게 좌절감을 안겨줬고, 남편은 왜 자기가 노력한 건 보이지 않냐며 나를 원망했다. 나는 결과주의적인 태도와 단기적인 성과에만 급급해 남편을 패배자로 만들어버렸다. 과정을 즐기고, 노력에 감사하며, 의도를 받아들이면 됐었는데...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할 것과 못했던 것들에 집착하다 보니, 우리가 왜 함께하는지를 잊었다. 


우리는 서로를 사랑해서 함께 하기로 했었는데, 그 사랑은 어디로 도망가 버렸을까? 누구를 피해 도망간 것일까? 나를? 남편을?







Loving someone who expected more of life is a big responsibility.
SVU: Law and Order Season 1 Episode 5







3. 당연한 희생


한국 문화 속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는 ‘나’보다는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이나 소속감이 주는 안전한 사회 망이 당연했었다. 대의를 위한 개인의 희생이 미화되어 크고 작은 부조리함이 가정이나 사회, 국가를 겨우겨우 지탱해 감에도 고맙다는 말 한마디로 위안받는 것을 보고 결국 나도 그렇게 받아들이게 된 것 같다. 

<남편이 미워질 때 보는 책>
2장 남편을 찾아서 1 신문물 개인주의 1) 넘지 못할 개인주의의 벽



부모라면 아이의 행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게 당연하고, 엄마는 항상 죄인이라고 미안하다고 하는 장면이 낯설지가 않다. 


우리는 왜 희생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그냥 이유도 없이 희생하는 건 당연했다. 나보다 남을 우선시하는 게 왜 당연해졌을까? 배우자를 위해, 부모를 위해, 아이를 위해, 회사를 위해, 사회를 위해... 나보다는 남을 위해 사는 그런 부조리함에 약자를 갈아 넣어 사회가 유지됐다. 




"민수한테 행복을 주고 싶다"


지연수의 말 중에 "민수의 행복이 나한테는 가장 큰 이유고 의미거든. 내 인생에서 민수가 제일 중요해서 언제든지 오케이야."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고라도 아들을 위한 희생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한다.


"보통의 부모들은 그런 불편함이나 싫음을 아이를 위해서 참고 견디면서 살잖아. 혹시 그러고 싶진 않은 거야?" 

"나중을 위해서 그러는 거야."


그러니까 둘 다 민수를 위하는 마음은 같다. 하지만 그 방법이 다를 뿐이다. 서로 원하는 게 같은데 갈등이 생기는 이유는 각자의 방법만이 옳다고 믿기 때문이다. 


같이 살아야만 행복하다? 따로 살아야 행복하다? 그런데 민수가 같이 살기를 원하니까, 자신의 여자로서의 삶을 희생하면서까지 노력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도 민수를 위한 마음이고, 장기적으로 볼 때 민수의 곁에 남을 수 있도록 자신의 숨 쉴 구멍을 확보하는 것도 민수를 위한 마음일 테니까 ㅠㅠ







"미안해"


지연수가 민수에게 "미안해" 라는 사과에 민수가 묻는다. "뭐가 미안해요?"


그러게. 대체 뭐가 미안할까?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상황이 있다면 그건 엄마 잘못이 아니지 않나? 오히려 미안하다고 하면서 상대에게 죄책감을 심어주는 거 아닐까? 나 때문에 엄마가 이렇게 희생해야 하다니. 나 때문에 엄마가 이렇게 미안해하다니. 차라리 내가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겠다... 하는 슬픈 생각...


일라이에게도 미안하다고 하면서,

"내가 더 잘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못돼서 미안해."

라고 말한다. 물론 전부 진심이겠지만 그리고 그 마음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나를 낮춤으로서 나의 부족함을 부각함으로써 상대의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게 아닐까? 이렇게 사과를 하는 이유가 나는 바뀌지 않을 거지만 상대에게 먼저 미안하다고 함으로써 우위를 선점하게 상황을 이끌어 갈 수도 있으니까...


물론 상대가 아, 이렇게 나를 위해주는구나 내가 더 잘해서 그 은혜에 보답해야지 하는 마음이 들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기원전 어느 역사가에 따르면 이런 말도 있다. "사람들은 은혜보다는 상처에 보답할 준비가 되어 있다. 왜냐하면 감사는 짐이 되고 복수는 즐거움이 되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죄책감을 심어 마음의 짐을 지우는 것이 우리가 진정 원하는 일일까? 




Tacitus
Men are more ready to repay an injury than a benefit, because gratitude is a burden and revenge a pleasure
 ― Tacitus







4. 프레임에 갇혀서


이렇게 우리나라처럼 국민의 반 이상이 보편적인 상식, 사회적 통념, 책임과 의무 등 어느 한 관점에 동의하는 것도 굉장히 드문 일이다. 그러다 보니 조금만 달라도, 조금만 튀어도, 조금만 잘나도, 조금만 못해도, ‘와이라노?’라는 평이 나올 수도 있겠다 싶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그런 개인의 선택을 개인의 책임으로 몬다. 네가 더 공부하지 않아서 대학도 떨어졌지. 네가 더 스펙을 쌓지 않아서 취업도 못 하고 있지. 네가 더 재테크를 잘했어야 아파트라도 사지. 네가 더 노오력을 해야지 잘 살지. 사실 대학을 안 가도 취업을 못 해도 자가가 없어도 만약에 그게 본인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라면 존중해줘야 하는 문제 아닐까? 법에 정해진 것도 아니고. 그것 또한 어쩌면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희생하면서 다른 사람의 기대치에 꼭 맞춰야 한다는 강박이 아닐까?

<남편이 미워질 때 보는 책>
2장 남편을 찾아서 1 신문물 개인주의 4) 하고 싶으니까 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프레임 안에서 보게 되면 큰 그림을 보기가 힘들다. 가족이라는 프레임을 씌우면 우리는 실패한 가족이 되는 거고, 남녀관계라는 프레임을 씌우면 우리는 실패한 부부가 되는 거니까. 


그냥 아이의 엄마, 아빠로서 각자의 삶을 살 수도 있다는 걸 안다. 물론 머리로는 당연히 알고 있다. 그런데 진짜 그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실천이 정말 어렵다. 




"민수 엄마로서 사랑해"


일라이가 계속하는 말 중에 "민수 엄마로서 사랑해" 라는 말이 있다. 그게 부모와 자식으로 이루어진 가족이라는 단 하나의 모습만 알고 있는 사람에게 가족 = 부모 = 부부 = 재결합이라는 오해를 줄 수도 있다. 


다양한 형태로 결합되는 가족의 존재를 인지하고 말하는 입장에서는 사뭇 다른 이야기일 수 있다. 이혼, 재혼, 삼혼, 사혼..., 동거, 한부모, 입양, 동성부부 등 수많은 모습의 가족이 있고, 가족마다 각자의 상황이 있으니까. 타인의 시선에서 조금 더 자유로울 수 있는 사회와, 정상의 범주가 너무나도 확고해서 조금만 다르면 손가락질 받는 사회는 또 다르니까...




가족의 다양한 모습

부부의 다양한 모습

행복의 다양한 모습

사랑의 다양한 모습


꼭 결혼을 한다고 행복한 것도 아니고,

꼭 이혼을 한다고 불행한 것도 아니다.

그냥 다르게 그때그때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지연수가 한 말 중에 내 귀에 꽂히는 말이었다. 나도 정말 많이 했던 말. 나는 최선을 다했는데 그것마저 너에게 부족하다면 대체 내가 어쩌길 바라냐고. 


나중에 되돌아보니, 내가 그때 할 수 있는 걸 다 했다는 말은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것만은 다 했다는 뜻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할 수 있는 건 다 했지만 내가 생각하지 못한 그 밖의 일들이 또 무수히 많이 있었다.


예를 들어 남편을 그대로 내버려 두기. 내가 그걸 생각지도 못했던 이유는 그게 정답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해진 길이 있는데 왜 굳이 어먼 길로 떠나려는지, 정답이 있는데 왜 굳이 오답을 실험해보려 하는지, 왜 빨리빨리 안 하고 이렇게 느릿느릿 천천히 사람 속을 터지게 하는지.




그런데 내가 그냥 아무것도 안 하는 것도 한 방법이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리저리 동동거리며 온갖 방법을 강구해봐도 나아지지 않았던 우리 상황이 내가 손을 놓으니까 조금씩 나아졌다. 


아무것도 안 한다는 건 상대에 대한 기대치도 놓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에 사랑하니까 기대도 하게 되고 질투도 하게 되는 거라고들 했다. 그게 내가 사랑하는 방법이었다. 내가 알고 있던 단 하나의 방법. 


그런데 상대에 대한 기대치를 놓는다고 해서 상대를 포기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상대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우리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는 것. 


"내가 바라는 우리의 모습" 이 아니라 "지금 그대로의 우리의 모습" 을 볼 수 있어야 거기서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었다.











일라이-지연수, 미국인 남편 한국인 아내의 부부 갈등1

일라이-지연수, 미국인 남편 한국인 아내의 부부 갈등2




<남편이 미워질 때 보는 책>




<외국인 남편 덕분에 배운 자존감 대화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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