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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이 Jul 16. 2022

우린 이것을 편집증이라 부르기로 약속했어요

어리석은 중생이여, 자신을 스스로 해치지 말라.

한바탕 내 마음속의 태풍이 휘몰아친 후 쓰는 글.


결혼기념일 때문에 싸운 게 벌써 열흘이 지났다. 그 당시 격했던 감정이 무색하게도 일상은 잔잔히 흘러갔다. 마주치는 일이 없어서 그랬나 큰 소리 나지 않고 그렇게 지나갔다.


단 한 가지의 주제로 3년을 끌며 싸웠던 지난날과는 분명 달랐다. 이걸로 싸우다가 과거 일까지 죄다 끄집어내서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 채 서로 감정만 상했던 그때와는 달랐다.


그리고 나는 분을 삭이기 위해 예전에 공부했던 자료들을 다시 찾아보았다. 그리고 재작년과도 다르게, 작년보다도 더 깊이 있게 깨닫게 됐다. 인생에 대해, 사랑에 대해, 인간에 대해. 그리고 내가 출간했던 내용이 얼마나 미숙했는지도 ㅎㅎㅎ 그렇지만 그땐 그게 최선이었다.




세속에서는 이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남편이 죽고 아내도 따라 죽으면 ‘열녀’라고 해요. 그런데 정신적인 관점에서 설명하면 이것은 질환에 속합니다.
법륜스님




법륜스님께서는 지나친 사랑은 집착이고 현대의학에서는 편집증에 속한다고 하셨다. 편집증. 정신 질환. 이 말이 왜 이렇게 와닿았을까.


사실 옛날에 남편이 나보고 상담 좀 받아보라고 할 때에도 듣지 않았다. 심리상담가인 시어머니께서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실 때에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왜 구하지도 않은 조언을 하시지 그게 잔소리란 걸 모르실까? 남편은 왜 자신의 잘못은 보지 못하고 시어머니는 왜 아들을 잘못 키우셔서!


아무튼 나는 락다운 상황에서 긴급으로 우울증 치료까지 받게 됐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 백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죽음으로 충성을 사랑을 증명하는 그런 왜곡된 생각을 어쩌다 하게 됐을까? 대의를 위해 개인을 희생하는 것에 왜 아무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을까?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그래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 우리가 살아남았지 않는가. 지금도 살고 있지 않는가. 살아서 행복해야지 죽어버리면 무슨 소용인가?


죽음이 숭고한 희생, 절대적인 사랑의 표현, 가슴에 묻을 비극의 결말이라고 착각했던 것 같다.


사실은 사는 것이 더 어렵다.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용기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나의 생각을 나의 감정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타인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오로지 마음이 넓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거절을 당해도 사랑을 믿는 것. 상대를 포기하거나, 상대에게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사랑을 믿는 것. 배신을 당해도 인생을 믿는 것. 상대에 의해 휘둘리는 가치관이 아니라, 내면의 중심을 잡고 내가 옳다고 믿는 행동을 해 나가는 것.







첫 번째, 부작용이 없는 사랑.
두 번째, 대가를 바라면 부작용이 있는 사랑.
세 번째, 나는 사랑을 안 하고 사랑을 받으려고만 하는 사랑. 이것은 욕심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범부 중생의 사랑입니다.
법륜스님




법륜스님께서는 내가 바라는 게 하나도 없는 것이 순수한 사랑이라고 하셨다. 바라는 게 없으니 어떤 결과가 나와도 부작용이 없는 사랑.


내가 하는 사랑은 대가를 바라는 사랑. 그래서 엄청난 부작용이 생기는 사랑. 받으려고만 하는 사랑. 욕심쟁이의 사랑.


결혼을 하려면 둘이 살 때 오는 손실을 감수할 각오가 있어야 한다고 하셨다. 나는 손해 볼 준비는 돼있었는데, 그 손해를 상쇄시켜줄 더 큰 보상도 바라고 있었나 보다.


장사를 하면서 사랑 타령을 하니 괴로움이 생긴다. 나는 남편과 거래를 하고 있었던 걸까? 사랑이 아닌 장사를 하고 있었던 걸까?


내가 만약 스님께서 말씀하신 순수한 사랑을 한다면, 남편이 밤늦게 귀가했을 때 고생했다 해주면 되는 걸까?

"늦은 시간까지 수고했어요"

"집까지 안전하게 와줘서 고마워요"

그렇게 말했을 때 우리의 사이는 좋았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외로웠다. 바라는 게 여전히 남아있었으니까.


우리는 함께 보내는 시간이 없다고 원망만 할 게 아니라, 늦은 시간 집에 들어오는 남편을 위해 저녁이라도 차려놓고 잠들 수 있는 거기도 하니까...


그렇지만, 내가 돈도 벌고 살림도 하고 청소에 빨래까지 다 하는데, 남편은 원래 주방 담당이면서 이제는 요리에 설거지까지 내가 다 하면! 불공평하다는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그럴 거면 왜 같이 살지? 차라리 한국인 남편이라면 내가 내조해줬다고, 그 덕분에 자기가 꿈을 이룰 수 있었다고, 그동안 고생 많았다고 인정해주기라도 할 텐데. 우리 남편도 그런 생각을 코딱지만큼이나 하고 있을까?


그냥 확 퇴사해버리고 집안일만 할까? 그럼 우리 집 수입이 땡전 한 푼 없다.


사랑을 버리든지, 바라는 마음을 버리든지, 둘 중에 하나는 해야 한다고 하셨다. 바라는 마음을 내려놓자... 핑계는 남을 대지만 결국 자신이 스스로를 해친다. 어리석은 중생이여... 자신을 스스로 해치지 말라.







수행은 뭐라고? 자기 치료.
자기 병을 누가 치료한다? 자기가 치료하는 거예요.




친구들은 나보고 보살이다 해탈했다 득도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모른다. 여전히 수행이 필요하다.


오히려 나에게 바라는  진심 하나도 없는 남편이 순수한 사랑을 하고 있는 걸까? 남편이 부처다. 내가 부처님과 살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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