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로 보는 미국인들의 보수적인 삶의 태도
넓고 넓은 바닷가에 월세 살이 집, 1967년에 지어진 건물에 벌써 5년째 살고 있다. 작은 집 한 켠에 마련된 더 작은 주방, 그 주방의 꽃 274리터 냉장고. 이 냉장고로 말할 것 같으면 겉에는 낡았고, 찢어지고, 흠집 나고, 녹슬고, 기계 소음까지 나지만, 냉장과 냉동 기능만은 아직도 잘 작동해서 교체할 수가 없는 그런 냉장고이다.
소비의 나라, 물질의 왕국, 자본주의 끝판왕, 미국에 대한 나의 오해 아닌 오해가 있었다. 그러나 이 냉장고로 미국인들의 보수적인 삶의 태도를 직접 겪으면서, 이미 절판된 몇십 년 전 냉장고라도 감사하며 사용하게 된 계기를 적고자 한다.
이사한 지 한 달도 안 돼 우리 집에 에어컨이 고장 났을 때는 부동산에서 바로 새 에어컨을 설치해 주셨고, 수전에 물이 조금씩 새서 수리 요청했더니 새 거로 교체해 주셨고, 싱크대에 설치된 음식물 분쇄기에 물방울이 새는 것 같아 검사 부탁드렸더니 또 새 제품으로 바꿔주셨다. 그래서 냉장고가 고장 났을 때에도 혹시 냉장고도 바꿔 주시는 거 아닐까 하는 기대가 없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우리 집 냉장고가 처음 고장 났을 때에는, 냉동고 뒤판이 ‘쩍’ 하고 튕겨 나왔다. 냉동고에 아무리 제거해도 몇 시간 만에 성애가 껴서 계속 고민이었는데 얼음에 밀려 뒤판이 분해되어 튀어나오다니! 그것보다 더 충격이었던 점은 냉동고의 환기구 커버였다.
냉동고 중앙에 위치한 환기구 커버에는 온도조절 손잡이가 있어서, 당연히 저 손잡이가 냉동고의 온도를 조절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뒤판이 튕겨 나오면서 딸려 나온 환기구 커버에는 오직 성애만이 가득 차 있었고... 온도조절 손잡이와 연결된 부품은 하나도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저 커버는 원래 이 냉장고 부품이 아니라, 고장 나서 간이로 다른 제품 커버를 덮어놓기만 한 것이었다. 이제까지 저 손잡이가 실제로 냉장고와 연결된 줄 알고, 미니멈에서 맥시멈으로 돌리려고 갖은 노력을 했던 지난날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안쪽이 이렇게 꽁꽁 얼어 있어서 손잡이도 안 돌아가 한참을 고생했었는데 말이다.
이 냉장고는 굉장히 오래된 제품으로 더 이상 부품들도 판매되지 않아서, 나는 냉장고도 새 상품으로 교체해 주실 줄 알았다. 그런데 수리기사님께서 냉장고 전원을 끄고 해동시킨 뒤 어디에서 온지도 모르는 저 냉장고 커버를 그대로 붙여주시고 가셨다. 아니, 이런 식이면 이 냉장고, 천년만년 쓸 것 같은 예감에 살짝 소름이 돋았다.
이곳에서 살면서 느낀 특징 중 하나는 변화에 보수적인 태도이다.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더욱 편리하게 생활할 수 있음에도 오랫동안 이어진 관습을 유지, 보수하며 살아간다.
한국은 새로운 문물에 대한 습득과 적용이 굉장히 빠르고, 하나의 유행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이 새로운 성능과 편리성을 즐길 수 있는 환경이다. 예를 들어 스마트폰, 도어락, 내비게이션, 블랙박스 같은 전자제품은 물론이고, 스크린 도어가 대부분의 지하철역에 설치되거나, 시스템 에어컨이나 벽걸이형 티비가 설치되고, 아파트에도 도어벨에도 씨씨티비가 상용화되고, 대중교통 환승 시스템도 정말 잘 돼있고, 좋은 제품이나 패션이 빠르게 순환한다.
하지만 이곳은 여전히 열쇠를 사용하고, 2G 폰도 안 쓰고 유선 전화만 쓰는 분도 있다. 블랙박스나 씨씨티비보다 개인의 사생활을 더욱 중시하기도 하고, 은행업무도 인터넷 뱅킹보다는 수표(체크)를 쓰고 온라인 서비스가 있어도 직접 방문하거나 직원과 통화하는 걸 선호한다. 지금 일하는 곳도 더 이상 업데이트를 지원하지 않는 윈도우 옛날 버전을 사용하고, 심지어는 타자기나 수기로 작업하는 일도 상당수다.
우리나라는 상향평준화가 되어있어 발전을 빠르게 적용하고 변화에도 쉽게 적응한다. 하지만 이곳은 기능중심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일처리는 된다. 그렇기에 변화나 발전의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것 같다. 낡으면 낡은 대로, 느리면 느린 대로, 불편하면 불편한 대로.
냉동고에 성에가 가득 껴도 주기적으로 제거해 주면 된다고 하고, 냉장실이 차갑지 않았을 때가 있었는데 냉동고에 여유롭게 자리를 비워야 냉장실도 온도조절이 된다고 한다. 에어컨은 바꿔주고 냉장고는 안 된다는 게 아니라, 에어컨은 정말 오래된 모델이라 대체 가능한 부품조차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새 제품을 사준 거였고, 냉장고도 엄청 옛날 모델이라 부품은 못 구하지만 수리는 가능해서 고쳐준 거였다. 기능적으로 문제 있는 것이 아니니까 다른 냉장고에서 쓰던 부품으로 때우기도 하면서. 참 분하게도 전부 다 고쳐지긴 했다.
나는 새 물건을 정말 좋아했었다. 유행하는 물건들과 머스트 해브 아이템을 매일 구경하며 계속 새로운 뭔가를 샀다. 하지만 더 좋은 물건들은 끊임없이 나왔고, 성능은 갈수록 좋아졌고, 유행은 매번 바뀌었다. 멀쩡한 냉장고를 두고 나는 새 냉장고를 왜 사고 싶었을까? 나에게 새 냉장고가 꼭 필요했을까? 오늘도 성애를 제거하며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에게 냉장고는 어떤 의미인가? 그나마 우리가 먹는 음식이 전부 이 냉장고에서 나오는데, 미워하려야 미워할 수가 없다. 당장 지금이라도 냉장고가 멈춰버리면 그것도 큰일이다.
새로 살 수도 있지만 안 사는 것. 그게 진정한 절제요, 미니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꼭 모델하우스처럼 새 집 새 물건이 아니더라도, 내 손길 닿지 않은 곳이 없을 만큼 정갈하게 유지하고 고쳐 쓸 수 있는 데까지 잘 사용해야겠다. 오늘도 고맙다 고맙다 하면서.
글쓰기로 우주정복을 꿈꾸는 브런치 작가들이 모여 팀라이트가 되었습니다. 팀라이트 매거진은 매월 한 가지 주제를 선정하여 각양각색 이야기를 작가들의 다른 시선과 색깔로 담아 갑니다. 이번 달 주제는 <냉장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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