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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이 Feb 24. 2024

하와이에서 지진을 겪으며 (규모 5.5)

2/9/24 저 한국 갈 수 있나요?!

이 날은 2024년 2월 9일 금요일, 하필 12시 30분에 출발하는 인천행 하와이안 항공편을 타기 위해 상쾌하게 준비하고 있었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무슨 말이냐면 똥 싸고 있었다는 뜻. 그것도 아주 오랜만에 온 반가운 신호라 쉽게 나오기 어려웠다는 뜻이다. (더러운 얘기 죄송 ㅠ)


그 절체절명의 순간!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아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 순간! 엄청난 고통의 끝에 희열이 느껴질랑 말랑 하는 그 숨 막히는 순간! 


나는 화장실에 앉아있었는데, 눈앞의 문과 문틀이 양 옆으로 흔들리는 게 시야에 보였다. 그러니까 원래 일직선으로 벽에 존재하던 문틀이 갑자기 왼쪽 오른쪽 좌우로 왔다 갔다 하는 게 아닌가. 


그 짧은 순간. 몇 초나 흘렀을지는 모르지만 아마 1분까지는 안 됐을 것이다. 


죽기 직전에는 주마등처럼 살아온 날들이 펼쳐진다고 하지 않았나. 나는 그 짧은 순간, 매우 본능적이고도 원시적인 생각이 스쳤는데... 처음에는 엥, 뭐지? 하는 생각. 그다음은 어떡하지? 대피해야 하나? 그리고 그다음은 정말 슬로우모션처럼 아주 천천히 생각들이 뇌리를 스치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천천히 흘렀다. 다아아앆고 오오오옷 이이이입을 수 이이이있을까? 무우우우울 내려도 되에에에는 건가? 소오오옷아 오오오오르지는 아아아않겠지? 마아아아악히면 어어어어떡하지?


찰나였지만 정말 별의별 생각이 들었다. 약간은 비현실적인 상황에서조차 일상의 구질구질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중이라니. 그런데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말도 안 되게,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난 적 없었던 것처럼 다시 고요해지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문 밖의 남편에게 지진 같은 거 느껴졌냐고 물어봤더니, 머리가 꽃밭인 우리 남편 왈, 자기는 아무것도 못 느꼈다며, 내가 요새 너무나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어지럽거나 한 것이 아니냐며 묻는다. 예전에 본 영화에서 어떤 등장인물이 엄청 스트레스받는 상황이어서 병원에 갔었는데, 귀에 균형감각을 관장하는 기관에 이상이 생겼었다며, 몇 주 안에 자연 치유된다는 내용이 있었다고... -_-


내가 진짜 미쳐버렸나 하는 마음에 핸드폰으로 지진을 검색했더니, 실시간 지진 상황이 뙇! 남편에게 이거 보라며 의기양양하게 핸드폰 화면을 들이대니 자기는 진짜 아무것도 못 느꼈다고 한다. 남편이 둔한 것도 있겠지만, 나의 생존본능이 동물적인 감각을 깨웠을 수도 있고, 아니면 화장실 쪽이 건물이 약하게 되어있나? 


나도 하와이에서 지진 여러 번 겪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느꼈던 적은 처음이다. 모르고 지나가거나 뉴스 보고 알거나 했었는데. 이리저리 물어봤는데 이 날도 실제로 지진을 못 느꼈다는 사람들도 많았다. 활화산이 있는 하와이 빅아일랜드 섬은 이 정도 지진은 일상이라는 사람도 있다는데, 믿거나 말거나ㅠ




어쨌든 이때 내가 을매나 예민했냐면 이번에 옮긴 사무실에서 온갖 스트레스를 혼자 다 받아가며 일하다가 킹 받아서 부장님께 단도직입적으로 내일 휴가가도 되냐고 물어보고 바로 다음 날 출국하는 비행기표 바로 사버림. 흐밍. 하지만 해야 할 일들 시간 안배 잘해서 미리미리 끝내놓고 부재 중일 때 일도 부탁해 놓고 갔다 와서 할 일들도 싹 정리해 놨으니 막무가내는 아니었다고 믿고 싶다ㅠ


당시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은 나머지, 초 예민 보스였던 대장의 배변활동 파업으로 인해 며칠을 화장실을 못 갔었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까마득해질 무렵이었는데... 목요일 휴가 내고 나서부터  집에 오자마자 화장실과의 조우를 시작으로 금요일 아침에는 화장실만 세 번을 방문하였던 것. 그 사이 지진이 왔는데 내 뱃속의 지진에 비하면 어쩌면 약과일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또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아서 얼굴에 염증이 왕 크게 여러 군데나 올라왔었다. 아픈 건 둘째치고 얼굴이라 너무 눈에 띄어서 패치를 붙였는데 패치 붙인 자리가 그대로 착색이 되어버리기도 ㅠㅠ 진짜 더 스트레스. 그래서 피부과 가고 싶어서 한국 가는 것도 있었는데 금요일 아침에 거울 보니 싹 들어갔네? ^^?


역시 정답은 퇴사인가~~ 하지만 퇴사는 못하니 숨통 트이게 한국 좀 가려고 하는데 아침부터 지진이라니...! 비행기는 당연히 뜨겠지 하는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무작정 우버 타고 공항 가서 하와이 탈출했다. 에코백 하나 가지고 떠나는 한국 급행 여행~~ 지진 안녕~ 여름 안녕~ 섬나라 안녕~~ 







이 사건은 나에게 큰 교훈을 주었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아직 바뀐 건 없다. ^^; 그래도 그 마음을 기억하고 싶어서 적어본다.


언제 어디서나 용모단정


나에게 폼페이 최후의 날처럼, 화산이 폭발해서 순식간에 묻혀야만 한다면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품 안에 안고 있는 어머니의 숭고한 모습이라던가, 우리는 아이도 반려동물도 없으니 남편과 둘이 끌어안고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하는 모습이라던가, 혼자라도 책과 함께 우아하게 쓰러져 있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발견되고 싶지... 변기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발견되고 싶지는 않아 ㅠㅠ 너무나도 취약하고 무방비상태야


도둑들의 전지현처럼 수건만 걸치고 나가도 아름다울 수 없으니 ㅠㅠ 마지막 순간이라도 인간의 존엄성을 잃고 싶지 않다. 언제 어디서나 용모단정히. 꽃단장은 아니더라도 깔끔하게 다니기.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하루하루인데, 앞으로 살아갈 날들 중 가장 젊은 날인데.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나를 위해 내가 해줘야 할 일들이 정말 많다. 

제때에 빨래를 하고

청소기를 돌리고

화장실도 청소하고

물건들을 정리하고

설거지를 하고

음식을 만들어두는

그런 규칙적인 생활을 매일 해야 하는 것.


한국 여행 10일 다녀왔는데, 화장실은 곰팡이 천국에 빨래가 쌓였다. ㅠㅠ 마음먹고 바로 하면 되는데, 어려운 일들도 아닌데, 왜 이렇게 하기가 싫은지...




순간의 소중함


만약 지진이 나서 우리가 고립되거나 대피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면 얼마나 무서울까. 상상도 안 간다. 심지어 나는 없는 휴가 영끌해서 겨우 내놨더니 비행기가 안 떴다면? 어휴 생각도 하기 싫다. 그러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가!


그동안 힘들어서, 피곤해서, 귀찮아서 못 했던 많은 일들이 후회됐을 것 같다. 참고 참고 참다가 터뜨리거나, 피하고 피하고 피하다가 도망가는 게 아니라, 하루하루를 충만하게 행복하게 살았어야 했는데.


시간 낭비라 생각되는 일도 흔쾌히 할 의향이 있다면

쓸데없는 일에도 시간과 정성을 쏟을 체력이 남았다면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감정을 소비해도 괜찮다면!

무언가를 순수하게 좋아하는 마음으로 즐길 수 있다면!!

앞 뒤 재지 않고 열쩡으로 도전할 수 있는 의지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실 나도 그냥 그러면 되는데, 참 그러기가 쉽지가 않아요. ㅜㅜ 


내가 좋아하는 건 무엇일까?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을까? 오늘도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언젠간 답해줄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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