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학바라지의 결말은?
어렸을 때, 그러니까 지금보다 더 철이 없었을 때에는 나는 나 혼자 큰 줄 알았다. 내가 알아서 잘 컸다고 믿었다. 내가 열심히 했으니 좋은 결과를 얻었다고, 그만큼 그 상황에서 또 최선을 다했다고 믿었다.
내가 가장 바쁘게 살았다고 생각되는 시기는 아마 대학 신입생 시절이 아니었을까. 아침에는 학보사 일을, 낮에는 강의를 듣고, 저녁과 주말에는 과외를 했었다. 당시 시세 30만 원, 일주일에 두 번, 수업 당 두 시간씩. 월수, 화목, 토일 하루에 두 탕 씩, 기진맥진해서 집에 가면 11시 12시였는데, 6시에 일어나 7시부터 학보사 신입생 교육을 받으러 나갔던 기억. 그렇게 월 150 벌어서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 물으면 대학생 용돈 벌이는 됐지만 생계를 이어가기에는 정말 힘들었었다.
내가 왜 그렇게 돈에 연연하며 알바를 전전했냐면, 남의 돈 벌기 어렵다는 걸 알아야 한다는 엄마의 교육철학 때문. 용돈 받을 때마다 하도 치사해서 내가 내 돈 벌어서 펑펑 써야지 하는 욕망의 대학생이 되었다. 그 결과 시간을 내서 동기들과도 어울리지 못하니 점점 멀어지고 학과에서도 겉돌게 되었지...ㅜ 그러다 결국 2학년 2학기부터는 교환학생을 간다는 핑계로 알바를 모두 그만두고,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진리를 깨달았달까.
그때까지도 사실 전혀 생각하지 않고 나 잘난 줄 알았다. 알바해서 모은 돈으로 유럽여행하는 개념 찬 학생이라고 이 여행은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처럼 그동안의 고생을 보상받는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빈털터리가 되어 학교로 돌아와 보니, 그동안 나의 삶을 지탱해 주던 가장 큰 기반은 부모님의 지원이었다는 아주 당연한 사실을 깨달았다.
대학 4년, 대학원 3년 (장학금을 받았다 하더라도) 졸업할 때 학자금 대출이 없고
서울에서 학교 다니며 기숙사비나 월세가 지출되지 않아도 되고
지역 보험료나 공과금, 핸드폰 요금, 심지어 쓰레기봉투까지 자잘한 생활비가 추가적으로 출혈이 없이
노트북이나 핸드폰 같은 고가제품은 생일 선물로 주시고
교통비 교재비 외식비 여행비 모임 비용 등 다달이 내가 직접적으로 하는 일들만 책임지면 되니까.
0에서 시작하기 위해서는 마이너스를 메꿀 엄청난 희생과 노력과 시간이 들어간다는 사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뒤로는... 부모님께 매우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며 ^^;; 죄송스럽게도 여러 지원을 받으며 여기까지 온 것이다.
만약 내가 졸업 후 4000만 원 학자금을 갚아야 한다면, 직장인 평균 연봉이 4200 전후라는데 정말 기본적으로 전월세 보증금을 마련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보증금을 마련하기 위해 또 대출을 받아야 하거나 월세는 월세대로 매 달 나가고. 세후로 따지면 정말 숨만 쉬고 일만 해야 학자금도 갚고 저축할 수 있겠지. 주식이니 코인이니 하는 투자도, 주택청약이니 연금저축이니 모두 여윳돈이 없으면 꿈도 꾸지 못하고. 게다가 어디라도 아파서 병원이라도 계속 다녀야 하면 정말 벼랑 끝에 내몰린 처지가 되겠지.
“뒤에 있나 돌아보면 전부 등에 올라타있어요.” 어느 방송에서 들은 문장이다. 대충 내용이 한 아버지가 가족을 위해 정말 열심히 앞 만 보며 뛰어갔다고. 내가 조금만 더 고생해서 우리 가족이 행복할 수 있다면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고 일해왔는데... 잘 따라오나 뒤돌아보니 전부 등에 올라타 있더라는...
지금 남편이 그렇다. 자기가 잘나서 여기까지 공부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본인이 학업에 집중할 수 있도록 내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러운 꼴 보아가며 피땀 묻은 돈을 벌어온다고 생각조차 못하는 것 같다. 우리가 영위하는 이 모든 안락함이 누구 덕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 월세를 내는 것도 보험을 내는 것도 핸드폰 요금 인터넷 요금 식비 생활비, 그리고 가장 중요한 본인 학비!!!!! 이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지출이 나가는데.
옛날에 파트타임 일을 그만두며 회사에서 보장받던 보험이 끊겨서 새로 등록할 수 있는 기간까지 반년 정도 이가 아파도 치과도 못 가고 불의의 사고로 응급실이라도 갈까 봐 불안했다는 사람이, 내가 다니는 회사 보험에 5년 동안 피보험자로 있으면서 그 불안감을 잊었나?
바로 어젯밤, 서러움 대폭발해서 울고 불고 난리 난 일이 있었다.
내가 남편에게 네가 최선을 다해 시험 준비하고 있다는 걸 알아. 너도 내가 최선을 다해 너를 지원해 준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라고 물었더니... 남편 왈.
“most of the time”
내가 이민 와서 외노자로 하루도 안 쉬고 일하면서 지금껏 우리가 이렇게 지낼 수 있었는데. 모.스.트. 오.브. 더. 타.임. 이라고? 네가 3년을 수입이 0원인 채로도 빚 없이 공부만 할 수 있게 가능하게 만들어 준 게 누군데!
이 대화는 남편이 5월에 시험을 보고 6월에는 일을 시작할 것이라고 장담을 한 뒤의 이야기이다. 남편이 스스로 6월부터 일을 시작한다 했으니, 내가 남편에게 지금 뭐라도 지원하라고 미국은 파트타임도 채용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니까 지금 지원해야 6월에 일할 수 있지 않겠냐고 채용 사이트 검색 결과를 보내면서 벌어진 일.
남편은 자기 공부하는 데 방해되지 않기를 바라고, 나는 본인이 6월에 일을 시작한다는 말을 했으니 지켜야 하지 않겠냐며 그럼 대체 6월에 어떻게 무슨 일을 할 거냐고 따지면서 대화가 점점 심각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남편도 결국 감정적으로 격양돼서 내가 자신을 무능력하다고 느끼게 만든다고, 자신에게 선택권이 없고 자신의 의사를 존중받지 못한다고 느껴진다고 했다. 최악으로 자신이 지금 이 상황에서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시험을 안 보고 미루는 것 뿐이라 느껴진다고
사실 남편의 이 발언에 억울해서 팔짝 튈 건 나였다. 수험생이 벼슬이라고 나는 항상 남편에게 시험이 얼마나 진행됐는지,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지를 매우 조심스럽게 물어보고 100번 말할 거 참고 참다가 한 번만 말 꺼내고... 조금만 수 틀려도 진상 진상, 아주 얼마나 눈치를 보는지 모른다.
특히 6월에 일을 시작한다는 합의는, 내가 5월 말에 퇴사하고 싶다고 앞으로의 계획을 세워보자며 나왔던 이야기이다. 남편이 바라던 호수에 여행 가기 위해서는 내가 언제까지 일하면 언제까지 보험이 커버되고 언제까지 일하면 휴가를 며칠을 쓸 수 있고 등등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만들어가며 여러 번 말했던 내용이기도 하다.
그래서 내가 직접적으로 물었다. 6월에 일을 시작하는 건 네가 원하던 일이 아니었냐고. 네가 하고 싶은 일을 강요할 마음은 나에게는 전혀 없고, 네가 억지로 내 말을 들어줄 필요도 전혀 없다고. 그럼 네가 원하는 것은 대체 무엇이냐고. 남편은 6월에 일을 시작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럼 대체 무슨 선택권이 박탈되었고 무슨 의사가 존중받지 못한다는 걸까? 남편의 자격지심일까? 단순한 능력부족일까? 본인이 일을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은 머리로는 알지만 일을 시작하기 두려운 심리일까? 본인이 일을 안 해도 이제까지 불편함 없이 지내왔으니 당연한 권리라도 된 것일까?
사실 나는 남편이 어떤 마음인지 이해는 간다. 어릴 적 내 마음과 비슷하겠지. 자신에게 바라는 원대한 꿈이 있고 당연하게도 곧 이뤄질 것이라 믿는데, 옆에서 잔소리하면 짜증 나는 그런 중2병처럼 행패 부리는 거다. 그깟 돈 얼마나 번다고 생색이냐 더럽고 치사해서 내가 돈 벌고 말지 하는 마음일 수도 있고, 일단 5월에 시험을 볼 예정이고 그동안 공부하느라 고생했으니 스스로에게 보상으로 한동안 쉬었다가 일하고 싶은 마음도 있겠지. 뭐 사람이라면야, 그럴 수 있지.
그러나 이성적으로 객관적으로 자신이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긴 아니까, 일을 하고는 싶지만 이렇게까지 힘들게 구직을 하고 싶지는 않고, 또 그때는 시험에 합격했을 테니까(?) 아무 일이나 하고 싶지 않겠지. 그냥 6월에 알바 자리 되는 데 있으면 일해보려고 했을 것이다. 일평생 치열하게 산 적 없고 벼랑 끝에 몰린 적 없는데, 이 사람 입장에서는 내가 자신을 벼랑 끝으로 몰아간다고 느껴질 수도 있겠다.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소리긴 하지만 이 사람 생각은 그럴 수도 있지.
그렇다면 남편이 원하는 건 무엇이었을까? 본인이 스스로를 무능력하게 느끼더라도, 와이프가 자신을 믿어주고 응원해 주기를 우쭈쭈 우쭈쭈 해주길 바라는 심리일 것이다. 다른 곳에서 자신감이나 자존감을 찾을 수 없으니 가장 가까이 있는 가족에게 불똥이 튀는. 그래서 생판 모르는 남이나 입에 발린 좋은 말만 해주는 친구를 더 찾게 되는 거지. 그 친구들이 하는 그 예쁜 말들이 6년 간 수입 전체를 갖다 바치며 학바라지 한 아내의 잔소리보다 더 듣기 좋을 테지.
어머나~ 그 어려운 시험을 준비하다니 당연히 끝나고 보상받아야죠!
매일 꾸준히 공부하시다니 정말 훌륭합니다~
이번 시험 당연히 통과되겠죠! 충분히 자격 있어요!
앞으로 더 큰 일을 하실 텐데 정말 대단해요~
나도 처음 몇 년은 그래 주었다. 3년 동안 8번이나 무기한으로 시험을 미루기 전에는. 남편은 본인이 시험을 3년을 미룬 것은 생각도 안 하고 변한 나를 탓하고 있다.
불속성 효자, 캥거루족, 등골 브레이커...!
물론 이렇게 극단적인 상황은 아니다. 하지만 표현하지 않아도 다 아는 걸 굳이 굳이 말한다는 건 결국 자신의 인정욕구를 드러내는 것과 같다. 남편이 짜증 내는 것도 본인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이고 내가 억울함에 이렇게 구구절절이 글을 쓴 것도 보상심리의 일환이겠지.
그걸 알면서도 나는 남편에게 좋은 말이 안 나온다. 아마 나에게도 억울하디 억울한 내 감정이 먼저라서 그런가. 그동안의 내 희생은 내 시간과 내 청춘은 누가 보상해 주나. 사실 보상받을 생각을 하면 안 되는데. 빨리 미련 털고 이 관계에서 빠져나오든가, 아니면 리셋해서 새롭게 관계 역학을 바꿔나가든가 해야 하는데.
참~ 알면서도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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