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때문은 아니에요. 진짜로요.
네, 저희 남편은 백수입니다. 수입이 전혀 없고 구직 조차 하지 않는 청년 백수. 40 가까이 공부만 해온 사람이라 공부와 파트타임 일을 병행하다가, 전업 수험생으로 3년째 지내고 있어요. 네, 전업이지만 시험을 보지 않는, 그동안 시험 등록조차 안/못 했던 수험생입니다. 매 년 이번에는 시험을 본다는 약속에 기대와 실망을 반복하는 것은 외벌이 가장 아내인 저의 몫이에요.
이제는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는 생각에 올여름 귀국할 계획입니다. 남편이 올해 5월 예정된 시험 일자에 시험을 보던 못 보던, 저는 이곳을 떠나고 싶어요. 지상낙원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저에게는 헬이거든요. 남편과 결혼하면서 남편의 나라로 이민 왔는데, 학바라지하며 외노자로 외벌이까지... 저는 정말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합니다.
그런데 이제는 더 이상 저 혼자 두 명분의 역할을 해내기 싫어졌어요. 핑계를 대는 것도 남 탓을 하는 것도 아니고 단순하게 더 이상 하기 싫어졌어요. 하려면 할 수는 있겠지만, 그냥 하기 싫어요.
저 혼자 두 명의 생활비를 감당하기 싫어졌어요.
저 혼자 두 명의 월세를 지불하기 싫고요.
저 혼자 두 명의 보험금을 책임지기도 싫어요.
저 혼자 새벽에 일어나서 자고 있는 남편을 놔두고 출근하기도 지쳤어요.
이제는 남편이 일용직이나 아르바이트, 심지어 재능 기부, 봉사 활동이라도 제발 뭐라도 좀 했으면 좋겠어요. 돈 때문은 아니에요. 진짜로요. 저의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도 큰 욕심 없이 알뜰살뜰 잘 살아왔으니까요.
저희는 결혼 전, 우리가 함께 이뤄나갈 결혼생활에 대해 많이 대화했었어요. 세계 여행을 하면서 여러 국가에서 살아보자는 이야기를 하기도, 가족계획을 하면서 아이를 어떤 부모가 되고 싶은지 고민해 보기도, 직업으로는 어떤 꿈을 꾸고 있으며 어떤 업적을 남기고 싶은지 상상해 보기도, 나이가 들어 몸은 늙어도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서로의 마음을 들으며 우리가 원하는 미래를 계획했었어요.
남편이 일을 그만두며 처음 1-2년은 저는 버틸만했던 것 같아요. 남편이 꿈을 이루는 과정이고, 그 어려운 시기를 제가 지원해 줄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죠. 우리가 함께 그렸던 결혼 생활처럼, 둘이 같이 힘을 합쳐 으쌰으쌰 노력하고, 시간을 내어 데이트를 하거나, 서로를 다독이고 의지하며, 부부가 중심이 되는 그런 모습을 꿈꿨는데...
그런데 최선을 다한다는 남편은 시험을 등록도 안 한 채로 무기한 미루는 모습에, 우리가 합의했던 결혼생활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변하고 있었어요. 분명 남편은 존경할 만하고 배울 점이 많았기에, 남편 대신 여러 이유를 갖다 대며 남편의 실패에 이런저런 방어를 제가 나서서 대주고 있었더라고요.
그런데 이제는 정말 핑계가 될 만한 이유가 없어요. 자신이 약속한 말들을 지키지도 못하고 몇 번이고 번복하니 신뢰가 가지 않아요. 8년이면 갓 태어난 신생아가 뒤집고 서고 걷고 말하고, 이제 초등학교 들어가고도 남는 시간이잖아요?
하지만 이것은 약과에 불과합니다. 전업 수험생 남편에게는 절대적으로 심각한 부작용이 생깁니다. 곁에서 지켜본 바로는, 현실감각을 잃어 세상을 보는 시각이 굉장히 좁아졌다고 느껴져요.
세상에는 수많은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고 그중에서도 얼마나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여러 사람을 만나고 대화하며 직간접경험을 통해 식견을 넓히고, 한 사회의 일원으로서 사회 경제적으로도 생산적인 일을 하는 삶의 태도를 추구해요.
그런데 어느 한 분야에 오래 머문 경우 고인 물이 된다고 하죠, 마치 차안대를 끼고 세상을 보는 것처럼 모든 사고와 판단이 편협해지는 것 같아요.
서울대 졸업생 주변에는 동창이나 친구들이 대부분 서울대생들 일 테고
학교 선생님 주변에는 죄다 동료 선생님 아니면 학생들 일 테고
자영업 사장님 주변에는 자영업 분들이 많을 것은 당연하고
공무원인 나는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 역시 동료 공무원들이에요.
코인 하는 사람들 주변에는 코인에 대해 잘 아는 사람들 일 테고
억대 연봉자 주변에는 죄다 억억씩 버는 사람들 일 테죠.
물론 한 분야에 전문성을 가진다는 점은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그래도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고 보고 듣고 배우고 가고 싶은 곳이 얼마나 많은데요 ㅜㅜ 그렇게 다양한 학문이 결합해서 새롭게 융합된 기술이 세상을 바꾸기도 하고, 나와는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서 서로에게 시너지를 주기도 하잖아요.
시험을 준비하는 남편이 요즘 가장 많이 만나는 사람들은 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입니다. 남편의 꿈을 이룬 장본인들이니 배울 점들이 참 많겠죠. 하지만 성공한 사람이 있다면, 실패한 사람도 있고 실패했다가 다른 길을 찾은 사람도 있고, 다른 일을 하다가 시험에 우연히 합격하게 된 사람도 있겠죠. 세상에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모든 사람의 배경과 환경이 다르고 처해진 상황이 다르고,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난 능력이나 한 가지 일에 몰두하는 집중력과 쏟아붓는 노력의 양이 다를 터인데...
그래서 저는 남편이 얼른 어디든 나가서 어떤 일이라도 했으면 해요. 월급이 얼마든지 상관없어요. 동료를 사귀고 고객을 상대하고 스쳐갈지라도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를 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좋은 사람도 만나고 나쁜 사람도 만나며 현실을 살아가기를, 그러면서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도 가지고 미래를 내다보는 시간도 가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저는 정말 큰 거 바라지 않는다 생각해요. 같이 저녁을 먹거나, 주말에는 함께 외출하거나, 가끔씩 여행도 가고 하는 게 부부 아닌가요. 남편은 매 순간 공부해야 한다며 아내를 후순위로 미루고, 저는 모든 걸 혼자서 하게 되니, 심지어 외벌이로 혼자 일하니까지 해야 하다니. 이제는 저도 안 할 거예요.
저의 소원은 남편이 빨리 취직해서 맞벌이 부부가 되는 것입니다. 부부가 함께 힘을 합쳐서 결혼생활을 만들어나가고 싶어요. 우리가 함께 꿈꿔왔던 결혼생활을 이뤄지게 만들고 싶어요. 남편이 약속한 대로 6월부터는 꼭 직장에 다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외국인 남편 덕분에 배운 자존감 대화법>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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