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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Jan 10. 2024

드디어 맛본 인생 첫 일확천금의 맛

아, 그동안 입이, 아니 손가락이 정말 많이 근질거렸다.


지난 12월 8일, 우리는 '엄청나게 운빨 좋은 날'에 복권을 30장이나 샀다.

생애 첫 복권구입에서 오는 비기너즈럭과 가챠운빨, 영험한 돈, 그 외 이제까지의 자잘한 불운들과 이어진 행운들까지 전부 그러모아 거대한 '당첨운'을 모아 온 나 그리고 남편은 반드시 고액당첨이 되고 말 것이라는 긍정확언을 계속하며 구체적인 미래예상도를 그려나갔다.


7억 엔이 수중에 들어와도 당분간은 담담하게 출근하자. 근데 빡치는 일 있으면 언제든 그냥 집으로 와버려. 

갑자기 돈 생겼다고 여기저기 팡팡 쓰지 말고, 평소 마시는 소주를 페트병에서 녹색병으로 바꾸는 정도의 소소한 호사만 누리자. 그리고 도쿄로 이사 갈 집을 물색하자.


물론 미즈호 은행에 당첨금 받으러 갈 때는 김이람 명의로 받아오는 거야. 알았지?






12월 31일, 남편은 휴일근무를 해야 해서 집에 오면 간단히 배를 채우고 바로 나리타 공항 근처 호텔로 향해야 했다. 비행기가 다음 날 아침 이른 시간 출발편이라 당일 첫 차를 타고 나가도 체크인 시간에 맞출 수 없기 때문에 호텔을 잡았다. 그나마 집에서 호텔까지만 해도 3시간 반은 잡고 가야 하기 때문에 꽤 부산을 떨어야 했다.


하지만 그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연말점보복권의 당첨확인이다.


오후 12시 즈음에 NHK에서 '준비하시고, 쏘세요!' 하는 방송까지 중계해 준다는 걸 알고 예약녹화를 해두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차피 당첨됐을 거니까. 리얼타임으로 보는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남편은 서너 시쯤 집에 온다 했으니 그때 같이 보면 된다.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며 남편이 오기를 기다렸다.







아, 나는 정말 요 일주일, 정말 손가락이 근질거렸다.

당첨결과를 너무나도 이야기하고 싶은데, 한국 친정에 다녀와서는 짐정리, 밀린 빨래 한다고 난리법석을 부리다 연재 브런치북 이번 주 연재분 하나 겨우 올리고 지금이다.


그날, 남편이 돌아오자마자 우리는 30장의 복권들을 테이블 위에 늘어놓았다.


"30장 다 있지? 그럼 시작한다."

"아, 나 손에서 땀나."

"난 손발 차가워졌어."


이윽고 레코더의 플레이 버튼을 누르고, 긴장 속에 티브이 화면을 주시했다.

방송 타이틀롤이 떠오르고, 아나운서가 자기소개를 하더니 2등 번호가 발표된 패널을 보여주었다.

일본의 연말점보복권에 적힌 숫자는 3자리의 조와 6자리의 숫자로 구성되어 있고, 우리는 30장의 복권들을 들뜬 마음으로 하나하나 확인했다.


45조.... 1890... 없어

66조 아예 없어.

오, 199조, 198조는 있는데. 없어.


채 아래 숫자까지 가기도 전에 조에서 턱턱 막혀가며 8개의 당첨번호가 지나갔다.

하지만 이건 2등, 천만 엔짜리니까 괜찮다.

우리가 정말 노리는 건 1등이잖아?


하는 사이에, 갑자기 코이케 유리코 도쿄 도지사가 연단에 올라왔다.


"뭐야. 빨리 넘겨버려"


빨리빨리의 민족은 참을 수가 없었다.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도지사 말고 숫자가 나오라고!

빨리빨리의 재촉에 못 이긴 일본 사람이 빨리 재생 버튼으로 화면을 휙휙 날리는 사이, 몇몇 아저씨와 아줌마들이 유리코처럼 화면에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그러다 중간에 3등부터 7등까지의 당첨번호를 비추어 주길래 화면을 멈춰가며 또 얼른 확인했다.

 

3등 (당첨금 100만 엔)  

음, 3등도 아니구나.  


4등 (당첨금 5만 엔)

어.. 없네.


5등 (당첨금 1만 엔)

엥, 5등도 안 됐어..?


6등 (당첨금 3000엔)

헐... 끝자리 2개만 맞추면 되는 6등조차 없다니?


복권을 훑어가던 우리의 손가락은 점점 기운을 잃어갔다.


7등 (당첨금 300엔)

끝자리 1개, 2만 맞추면 되는데 3세트 샀으니 3장은 반드시 당첨되는 시스템이라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에게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었듯이, 우리에겐 아직 1등이 남아있었다.






잠시 뒤, 2023 연말점보복권의 1등 당첨번호가 발표되었다.

돌아가는 숫자 회전판에 화살을 쏘아 맞춰진 숫자로 당첨번호를 만드는 방식인데, 그 결과 1등의 당첨번호는 6조 170850으로 확정되었다.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만 배로 돋아난다는 대길일에 금전운에 용하다는 신사에서 씻어온 돈으로 산 30장의 복권. 안타깝게도 그 안에 6조로 시작되는 복권은 단 한 장도 없었다. 눈을 씻고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우리의 꿈은 그렇게 아스라이 멀어져 갔다. 


대길일이 다 뭐며, 씻은 돈은 다 뭐냐. 요즘 자주 보이던 그 포효하는 용구름이나 길거리에 널려있던 자동차 엔젤넘버같은 것들은 다 무엇이었단 말이냐. 순애야 김중배의 다이아몬드가 그렇게 좋았단 말이냐(?). 

지난 한 달간을 반추하자니 온몸에 힘이 탁 풀렸다. 그리고 남편과 서로의 얼굴을 보고 망연자실 허허허 웃었다. 


"반드시 당첨된다는 강한 믿음은 있었는데. 원래 이렇게 안 맞는 거야?"

"그래도 우린 꿈을 산 거야. 그동안 행복했잖아"

"그래, 정말 행복했지. 하지만 내년에도 난 노예처럼 출근을..."



당첨된 복권. 기적의 900엔. 


그리하여-


레드벨벳의 빨간 맛보다 궁금했던 나의 인생 첫 일확천금의 맛은, 깨물면 점점 더 녹아드는 스트로베리 그 맛처럼 9000엔이 순식간에 살살 녹아 생긴 그 맛, '900엔 맛'이었다.


그리고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예감'은 함부로 믿어서는 안 된다는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 


친정에 갔을 때 엄마에게 일련의 이야기를 해드렸더니, '돈은 땀 흘려 버는 것'이라며 요행을 바란 우리 부부를 비웃었지만, 백퍼센트 동의하지는 못하겠다. 정직하게 버는 돈이 제일 값진 것은 사실이지만 심신을 축내지 않고 얻은 불로소득이 '개꿀'인 것 역시 사실이니까. 


근데 이제 연말점보복권은 안 사.


흑흑.

내 7억 엔.



지난 설레발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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