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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Feb 02. 2024

나, 일본사람, 그리고 푸바오

용인에서 태어난 판다 푸바오는 네 번째 생일을 맞이하기 전에 엄마 아빠가 적을 둔 중국의 판다기지로 가야 한다.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정해져 있던 수순이었다. 작년 하반기 즈음부터는 방송에서도 '언제쯤'일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고, 꽃이 피기 전에 푸바오가 한국을 떠나야 한다 생각하면 눈물이 고였다. 그냥 이사 가는 수준이 아니라 이제까지 푸바오를 둘러싼 애정과 환경 모든 것이 송두리째 바뀌는 것이 가혹하다는 생각이 앞섰다. 푸바오에게도 그렇지만 사육사 분들에게도 마찬가지고. 


그럴 때 옆을 쓱 쳐다보면, 황급히 눈가를 훔치는 일본인을 만날 수 있다. 그게 우리 집 가장인데, 그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이런 생각이 든다.


... 샹샹 갈 땐 뭐 하고 왜 우리 푸바오한테 난리야...?


매일 인스타며, 유튜브에서 판다를 보며 마음의 낙을 얻는다는 그는, 이상하게도 일본에 사는 판다들에게는 눈곱만큼의 관심도 없다. 이름조차 아직도 가물가물한 사람이다. 그런데 바오가족은 뭔가 다르단다. 그중에서도 푸바오는 특별히 더 다르단다. 아무래도 에버랜드의 유튜브를 너무 봤다. 보면서 일방적인 애착관계가 형성된 것 같다. 에버랜드 한번 안가보고 너무나도 손쉽게 뿌딩이 친구가 되어버렸다.


그런 그에게, 진짜 푸바오와 만나게 해 주자고 결심했다. (나도 보고 싶고)


그래서 일본을 뜨기도 전에 에버랜드 입장권부터 미리 사두었다. 항상 즉흥적이고 미리부터 뭘 준비하는 걸 귀찮아하는 나로서는 엄청난 액션이다. 집에서 에버랜드, 에버랜드 입구에서 판다월드까지 가는 길도 외워두었다. 한국어라고는 안녕하세요, 잘 먹겠습니다, 맛있어요, 귀여워, 멋있어, 아니, 아닌데, 아니다, 아니야, 아니라고, 왜?, 싫어, 주세요, 어디예요, 여보세요, 미친 아저씨, 아줌마, 아이, 밥 모고쏘?, 시바루, 켓세키, 앉아, 옳지 (앉아와 옳지는 친정 강아지와의 의사소통을 위해 외웠다) 밖에 말하지 못하는 남편이 자력으로 푸바오를 보고 올 수 있을 리가 없다. 어디 가서 '푸바오 맛(멋) 있어요' 소리나 안 하면 다행이지. 나도 나이 먹고 처음 가는 에버랜드지만 한국어라도 아는 내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저 멀리 보이는 에버랜드


자동차, 전철, 버스, 긴 여정의 끝은 종점 에버랜드였다. 정류장에서 내려 에버랜드를 향해 걸어올라 가는데 기분이 묘했다. 저기 저 안에 푸바오가 있다며 눈을 빛내는 남편을 보며 생각했다.


이 사람 눈이 이렇게 반짝이는 걸 이제까지 본 적이 있었던가.



두근대는 마음으로 에버랜드 안에 들어섰다. 다른 세상 같아 가슴이 두근댔지만 시간이 없었다. 몇 장 기념사진을 찍고 판다월드로 직진했다.


우리가 갔던 1월 4일은 공교롭게도 새로 태어난 쌍둥이 아기판다의 일반공개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판다월드 앞에서 우리는 줄지어선 수백 명의 사람들과 먼저 맞닥뜨렸다. '지금부터 입장하시는 분들은 아기판다 못 보세요'라는 직원들의 외침을 뒤로하고, 길게 늘어선 줄 끝을 찾아가... 는데 줄이 끝도 없다. 건물 외벽을 따라 빙 돌고 언덕을 오르고 나서야 맨 끝을 찾았다. 직원이 '대기시간 240분' 팻말을 들고 있었다. 우리가 언덕을 올라왔을 때 보았던 사람들의 애잔한 눈빛의 의미를 이해했다.


현재 시각 11시.

240분이면... 60으로 몇 번을 나누어 보았지만 오후 3시라는 답은 변하지 않았다.

 



우리가 앞으로 전진해 나가는 동안에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우리를 스쳐 지나갔다.

언덕을 다 오르고 난 사람들이 내뱉는 단말마의 비명도 들려왔다. 바로 얼마 전의 나, 너, 우리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고되지 않았다. 이윽고 대나무가 보이자 기분은 이미 방사장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흐리던 날씨도 개어 파란 하늘이 얼굴을 내밀었다. 중간에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았는지, 아니면 시간 계산을 넉넉하게 했던 것인지 1시간 만에 판다월드에 입장할 수 있었다.


전시공간에서 5분을 보내고 드디어 실내 방사장으로 입장했을 때, 우리의 첫 진짜 푸바오는 이러고 있었다.


쿨쿨


같은 시각, 그녀의 부친께서는 이러고 계셨다.


음냐음냐


심어둔 나무 분질러 뜨리고 밥 먹는 모습만 보아와서 당연히 그러고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그들은 업어가도 모를듯한 단잠에 빠져 있었다. 게다가 이 자세들은 마치, 한참 옛날 고등학생 때 유행하던 타레판다의 그 모습 그대로 아닌가. 게다가 푸바오는 생각보다 훨씬 작았다. 100킬로에 육박하니 성체라고 생각했는데 아직 아가 같아 보였다. 


흐뭇해하며 그렇게 그들의 호흡을 지켜보고 있는데 옆에 있던 남편이 사라졌다. 한국에 있을 때는 평소 이상으로 수동적인 사람인데 이때만큼은 아주 능동적으로 나를 버리고, 푸바오를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자리를 찾아다녔다.


저 사람의 이런 적극적인 모습을 이제까지 본 적이 있었던가.


이날 판다월드만 4번 갔다


사실 이번에 푸바오를 만나면, 남편이 눈물을 터트리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미 푸바오 동영상을 보면서 집에서 수십 번 눈물을 훔치던 그는 바로 전날 저녁, 장인장모에게 자기의 눈물버튼인 동영상을 보여주고 저 혼자만 질질 짠 전력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였기 때문에, '푸바오를 잘 보려고' 안경까지 챙겨 온 30대 중후반의 아저씨가 감격에 겨워 오열을 시작한다면, 나는 그저 모르는 사람처럼 저 멀리 떨어져 있으려고 했는데 그는 울지 않았다.


사실 감정이 복받쳐 올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5분.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5분뿐. 한 자리에 오래 서있으면 안 될 것 같기도 하고, 판다도 두 마리니까 자리를 옮기며 보다 보면 어느새 시간은 흘러있었다. 아쉽지만 실외방사장으로 나가 러바오 없는 러바오 의자, 푸바오와 아이바오가 없는 평상을 바라보며 마음을 달래다 보면 만나서 너무 기쁘고, 어쩌면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눈물이 핑 돌 것 같은 그런 마음보다, 다시 가서 줄 서자고, 그래서 우리의 안구에 푸바오를 아예 새겨버리자는, 그런 집착과 광기가 솔솔 피어오르는 것이다. 


유튜브에서 몇 번이나 보아왔던 실외방사장. 반가웠다.
러바오

그렇게 판다월드만 4번 가는 동안, 푸바오는 딱 한번 이외에는 나무 위에서 잠을 잤고, 러바오는 갈 때마다 다른 포즈로 자고 있었다. 아쉽게도 댓잎을 먹는 모습은 보지 못했지만 평상에 대나무가 줄어들어 있거나 흐트러져 있는 걸 보니 띄엄띄엄 밥은 먹어가면서 자는 모양이다. 그런 작은 변화조차도 신선하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 시간을, 푸바오를 좋아하는 우리 집 일본사람은 '초 유명한 연예인과 만난 것 같았다'고 들떠 표현했다. 나도 약간 비슷한 기분이기는 한데, 구체적으로는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의 콘서트를 무대와 아주 가까운 스탠딩석에서 관람하고 돌아오는 길 같은 기분이랄까. 티브이, 노트북, 핸드폰 액정 건너편에서 보던 푸바오는 나의 내적친밀감으로 똘똘 뭉친 아주 가깝고 친근한 존재, 거의 내가 기른 같은 판다였고 직접 만나보니 역시 너무 반갑고 귀여웠지만, 돌아서고 나면 나와는 아주 먼 존재처럼 느껴졌다. 팬과 스타의 관계 같기도 하고. 나는 이렇게 푸바오를 바라보고 있는데 푸바오는 나를 바라봐 주지 않고, 그녀의 마음은 사육사 할아버지와 워토우, 잠과 남천으로 있어서 어디서 굴러왔는지 모를 돌멩이가 들어갈 틈은 없었다. 비록 유리벽이 가로막고 있지만 이토록 가까이에 있는데 나는 여기, 푸바오는 저기. 아아, 이렇게 지척에 있으면서도 너의 누런 등털을 쓰다듬어줄 없다니. 사과를 썰어 쥐어줄 수 없다니. 함께 손을 잡고 플레이봉을 거닐을 수 없다니!


"너 가끔 사상이 스토커 같아서 무서워."


오늘만 울지 않은 일본사람이 질색했다. 그러는 본인은 앞으로 평생에 걸쳐 판다 굿즈를 모으고 싶다고 고백했다. 평생이요? 나는 네가 무섭습니다. 



며칠 전, 푸바오가 방사장에는 3월 초까지 나오고, 한 달간의 준비를 거쳐 4월 초에 중국으로 떠난다는 소식이 발표되었다. 푸바오가 한국에 있는 동안에는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 없고, 말 안 통하는 나라에 한자 하나 믿고 갈 용기는 20대의 내가 싹 다 끌어다 썼기 때문에, 나와 남편이 푸바오를 다시 보는 일은 이 슈퍼스타가 다시 한국에 파견되거나, 일본에 오지 않는 이상은 어려울 지도 모른다. 그 가능성은 그저 희망에 불과할 뿐, 아주 희박할 것이라는 것 역시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다시 푸바오와 만나고, 만나못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날 나무 위에서 천진난만하게 입맛을 다시며 자고 있던 푸바오, 어슬렁어슬렁 플레이봉을 걷다가 위에 넙죽 엎드려 재차 잠을 청하던 푸바오, 몸을 뻗어 주욱 기지개를 켜던 푸바오. 나는 그날의 푸바오를 절대로 잊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푸바오가 그 모습 그대로, 언제 어디에서든 특유의 구김살 없는 표정으로 거침없이 뛰놀을 있길 바란다. 언제나처럼 곁에 있어주는 강바오, 송바오가 없어도, 냄새와 소리로나마 존재를 확인하던 아빠, 엄마, 동생들이 없어도, 언제나처럼 들려오던 말과 다른 모르는 말들이 들려오더라도, 털에 닿는 햇빛, 콧등을 스치는 바람의 간지러움이 다르더라도, 판다 굿즈를 평생 사모으고 싶다는 남편의 판다열이 언젠가 사그라들더라도, 그래서 우리가 이 슈퍼스타의 팬이었다는 사실을 과거형으로 말하며 더 이상 판다의 콘텐츠를 보지 않는 날이 오더라도 말이다. 그렇더라도 어느 날 각자가 마음에 품은 단꿈 같은 기억을 소중히 끌어안고 그걸 매일을 꽃피우는 영양분 삼아 서로의 자리에서 그저, 행복했으면 좋겠다. 


한국에서 태어난 첫 번째 판다 푸바오와, 푸바오를 사랑한 이들 모두가, 

그저, 행복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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