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이람 Jan 22. 2024

한일전보다 뜨거운 방구석 응원전

지난 금토 이틀간, 우리 집은 아시안컵으로 후끈 달아올랐다. 원래는 스포츠경기를 그렇게까지 열과 성을 다 해 보는 사람들이 아니었는데 도쿄 올림픽과 베이징 동계 올림픽, 월드컵, WBC, 아시안게임을 거치면서 점점 더 보는 재미에 흠뻑 빠졌다. 붉은 악마와 울트라 닛폰이 같이 보는데 재미가 없으래야 없을 수가 없다. 한일전이 아니라도 상관없다. 다른 나라 사람이 바로 옆에 같이 있으니 꼭 우리나라 경기에선 우리나라가 이겼으면 좋겠고, 지면 두배로 분하다. 남편 역시 마찬가지라 한다. 


"엇, 어떻게 해. 벌써 15분이나 지나버렸어!"


금요일 저녁, 솔로지옥을 보는 재미에 경기 시작 15분이 지나고 나서야 이미 경기 휘슬이 울렸음을 눈치챘다. 남편은 이라크 상대로 무슨 일이 있었겠냐며 여유롭게 티브이를 켰다가 뒤통수를 맞았다. 경기 5분 만에 1:0 상황. 우리가 한국에서 잠깐 보았던 그 경기가 이라크와의 평가전이었음을 알고 결과를 물어왔다.


"한국이 1:0으로 이겼으니 일본은 지지 않을까?"


남편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 반박했지만 금세 다시 풀이 죽었다. 이라크가 너무 잘했다. 일본 선수들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남편은 일본의 승리, 나는 이라크의 대승을 기원하며 소고기까지 구웠는데, 나는 소원성취, 남편은 시발비용을 선불로 낸 사람이 되고 말았다.


내 평생 이라크를 이렇게 뜨겁게 응원해 본 적이 있었던가




그 어떤 상황에서도 대놓고 일본의 패배를 응원하는 나와 달리, 남편은 상대가 일본이 아니라면 기본적으로 한국을 응원한다. 고마운 일이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을 응원하고 싶은 기분은 들지 않는다. 국제시합에서 뭐 한 건 하고 나면 다음 날 아침부터 밤까지, 온갖 정보방송, 뉴스방송마다 징그러울 정도로 신나 하고 설레발을 쳐대는데 그걸 볼 때마다 그렇게 배알이 꼴릴 수가 없다. 전 회사의 그 인간같지 않던 축구광 생각도 나고.  (나는 진짜 일본을 싫어하나 보...)


때문에, 옆에 있는 남편에게 장난치느라 반, 진심 반, 월드컵 때는 임시 코스타리카인, 명예 크로아티아인이 되기도 했고, 금요일에는 단기직 이라크인이 되어 응원했다. 경기가 제일 재미있을 때는 우리나라가 이기고 있을 때지만, 그 못지않게 즐거울 때는 일본의 패색이 짙어질 때라는 생각을 하면서. 정말 즐거웠던 그날의 스코어는 2:1, 이라크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 한국과 요르단 전이 열렸다. 전날 너무 놀렸나. 남편은 요르단을 응원하기 시작했다. 이미 어제 일본은 졌는데 한국만 이기는 건 배가 아프단다. 이건 또 무슨 논리인가. 하지만 아주 모르겠을 이야기도 아니라 은근슬쩍 물어봤다.


"그래도 속으로는 한국 응원하고 있지?"

"아니, 오늘은 요르단인들의 기쁨이 나의 기쁨. 힘내라, 요르단!"


그런 그의 응원에도 불구하고 요르단은 한국을 이기지 못했다. 게다가 자칭 요르단을 응원한다던 남편은 후반전 즈음에는 '아, 지금 거 들어갔어야 하는데!' 라며 골 포스트를 빗겨나간 한국 선수의 골들을 안타까워했다.


나는 '요르단 응원하는 거 아니었어?'라는 말은 입 밖으로 내지 않기로 했다. 이미 손흥민 선수가 공을 몰면 자세를 고쳐 앉고, 이강인 선수를 주목해 지켜보는 그다. 황희찬 선수는 '도안 리츠 닮은 사람'으로, 이기제 선수는 '내가 본 사람 중에 가장 수염 풍성한 한국 사람'으로 얼굴을 외워가고 있다. 이미 나라를 떠나 아주 엷고 은은하게 스며들기 시작한 그에게 굳이 현실을 자각시킬 소리를 해서 입덕부정기로 끌고 들어갈 필요가 없다. 내가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우리 집 방구석 응원전의 최종목표는 함께 하는 즐거운 축구응원, 붉은 악마 두 마리 (한일전은 어쩔 수 없지만). 수요일은 신태용 감독님의 인도네시아가 모리야스 감독의 허를 찔러 하극상의 승리를 쟁취하시길 진심으로 응원하면서 목요일의 말레이시아 전을 기다려 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초면에서 구면이 되는 과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