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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Feb 22. 2024

아랫집이 이사 갔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부지 안에는 주차장을 사이에 두고 같은 회사가 만든 2층짜리 아파트 몇 채가 쪼르륵 늘어서 있다. (*일본의 아파트는 한국의 맨션, 빌라에 가깝다. 반대로 한국의 아파트 같은 집을 맨션이라 부른다.) 딱히 다른 집들과의 교류는 없지만, 주차 자리가 정해져 있어서 오가는 사람들을 보면 대충 어디에 어떤 사람들이 사는지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보통은 우리 옆집처럼 '40대 중반 정도의 여성이 혼자 산다'는 정도의 가볍고 부러운 정보 밖에 없지만, 종종 구체적인 생활 패턴을 파악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앞 동 1층 세나네 집이 그렇다. 30대 부부와 유치원생 여자아이와 성별불명 동생, 네 가족이 사는 집. 세나와 그 엄마 목청이 어찌나 우렁찬지 건물 외벽을 뚫고 집안까지 들려오는 이름을 본의 아니게 외워버리고 말았다.


"엄마!! 세나 봐!! 세나 이거 한다!! 엄마아아아!!! 세나 보라고!!"


아... 세나 엄마. 부탁이니 제발 애 좀 쳐다봐줘요...

세나는 한창 자아가 커지고 사랑을 갈구하는데 엄마는 세나에게 참으로 무심하다. 어쩌면 이미 지쳤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나는 자기가 만족할 때까지 엄마!!! 세나 봐!! 세나 보라고!! 를 멈추지 않는다. 가끔 '베란다 나가지 말고 집으로 들어오라'는 세나 엄마 목소리도 들리는데, 세나네 베란다에 가서 엄마 말 좀 들으라 하고 싶을 정도로 세나는 육아난이도가 높은 아이인 것 같고, 저 모녀는 어제저녁밥으로 기차 화통을 삶아 먹었다. 먹은 것이 틀림없다, 고 쓰려다 고쳤다. 아니, 삶아 먹었다. 분명히. 일본인은 조용하다고 누가 그러던가요.


반면, 세나 아빠는 정말 조용하고 출근이 빠르다. 낮에는 그 자리에 나이 지긋한 여성이 운전하는 검은색 경차가 와 있다가 세나 아빠가 퇴근하기 전에 돌아가는 걸 보면, 근처에 가족이 살며 육아를 도와주고 있는 것 같다.


아, 잠깐. 불필요한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덧붙여두지만 이 모든 것은 내가 하루종일 집에서 가만히 있는 가마니, 사람이라서 자연스럽게 알게 된 것일 뿐 하루종일 창가에 붙어 일부러 관찰한 것은 아니다.  






등잔밑이 어둡다 했던가. 

건너편 집 일은 그렇게 빠삭했지만 아랫집 사람들은 좀처럼 만나는 일 없이 '소리'로만 파악했다.


딱 한번 주차장에서 만난 남편은 40대 후반의 아줌마, 아저씨가 사는 집이라 했다. 아저씨는 일주일에 두어 번, 비정기적으로 집에 왔다. 그래서 두 사람의 관계성은 잘 모르겠지만 한밤중에 쿵쿵쿵 우당탕탕, 육중한 발소리와 문을 거칠게 여닫는 소리가 스멀스멀 벽을 타고 올라오면 아니나 다를까 주차장에 아저씨 차가 와 있었다. 평일 근무인 아줌마는 매일 아침 7시 반과 저녁 6시 반, 깨부수는 듯한 소리를 내며 창가의 셔터를 신경질적으로 올렸다 내려다를 반복했다. 티브이는 어찌나 크게 보는지 그 소리가 웅- 웅- 저주파처럼 울려오는데 그 불쾌한 소리에 짜증도 나지만 우리 집에서 나는 소리는 오죽 크게 들릴까 싶어 덩달아 목소리를 줄이게 되었다. 1층이니 괜찮을 거라는 방심도 있었을 것이나 이것저것 감안하고 보더라도 1층 사람들은 거친 사람들인 것 같고, 일본인근 주민과의 소음 트러블로 인한 살인사건이 종종 들려오는 나라이므로, 오늘 주인공은 나야 되지 않기 위해서 지레 겁먹고 발뒤꿈치를 들고 산 2년간이었다. 다행히 아무 일도 없었지만 아랫집 사람들에게만큼은 묘하게 죄인 같은 기분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지난 금요일 밤, 여느 때처럼 술상을 차려 한주의 피로를 씻어 내리고 있는데 갑자기 아래층에서 '쿵! 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엔 아저씨가 들어오는 소리인가 했는데, 말소리도 섞여 들리고 소음이 길어지는 걸 보니 아무래도 가구라도 옮기는 것 같았다. 무슨 놈의 모요가에(模様替え, 가구 배치 바꾸기)를 한밤중에 하냐고 투덜댔는데 다음 날 낮에도 같은 소리가 들렸다. 설마, 아저씨가 홧김에 아줌마랑 다투고 이틀에 걸쳐 토막 치고 있는 소리는 아니겠지. 그럼 신고는 내가 해야 할까? '아무래도 아랫집에서 뭔 일이 난 것 같아요!'라고 하면 되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던 일요일 저녁, 마트에 가려다 아랫집의 열린 창문셔터 안으로 텅 빈 방을 보고 그 집이 이사 갔다는 것을 알았다. 


마지막까지 소음만 남기고 아랫집 사람들은 그렇게 사라졌다. 





그 후 4일간, 우리는 아직까지 아주 조용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온몸의 털을 쭈뼛 서게 만드는 신경질적인 셔터 여닫는 소리도, 심장이 쿵쾅대는 난폭한 발걸음도 더는 들리지 않는 평화로운 시간들. 이사철이 준 뜻밖의 선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구석에는 그들의 이사가 혹시 우리 때문인 것은 아니었나 염려된다.

벽 두껍기가 종잇장 같은 이 집에서 아무리 조심했다 한들 소리가 안 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분을 못 참고 남편에게 두어 번 사자후를 내지른 것 같기도 하고, 택배가 오면 도도도도 뛰어가 물건을 받고 덩실덩실 스텝도 밟았다. 실은 아랫집 사람들도 우리처럼 새가슴이라 말은 못 하고 속만 졸이다 '에에잇, 늬들도 당해봐라!' 하는 심정으로 맞불을 놓았는데 우리가 생각보다 무던해서 아줌마 또 시작이네, 아저씨 왔나 보네 하면서 흘려버린 건 아닐까. 사람은 자신에게 관대하고 남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기 마련이니까. 아닐 수도 있지만 괜히 혹시나 싶어 진다.

 

어쨌든 당분간은 아무도 없으니 발뒤꿈치 내려놓고 걷는 자유를 만끽하다가 새로운 이웃이 들어올 즈음에는 조금 신경 쓰며 살아야겠다. 새로운 이웃은 어떤 사람들 일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구관이 명관이란 생각을, 아랫집은 이웃 가챠 실패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되길 바란다. 






대각선 앞동 2층 아줌마는 매일 아침 7시에 빨래를 널러 나오고, 앞집 부부는 우리처럼 차가 한대뿐인데 낮에도 움직이질 않는 걸 보아 재택근무를 하는 집인 것 같다. 매일 아침 7시, 12시, 17시, 세 번 담배를 피우러 나오는 앞동 남자도 재택근무다. 더벅머리에 츄리닝 차림의 깡마른 남자인데 주식을 하거나 만화라도 그리고 있는 것일까. 뭔가 스타일이 그렇다. 


아랫집 사람들은 없지만 오늘도 여기 사는 사람들은 이렇게 언제나처럼 똑같은 매일을 보내고 있다. 나도 항상 그랬던 것처럼 집안 공기를 환기시키려고 창문을 열었는데, 무심코 아래를 바라보니 아랫집 베란다 정원에 몇 달 전부터 널브러져 있던 CHILL이라 써진 슬리퍼도 여전히 모습 그대로 나뒹굴고 있었다. 주인 없는 슬리퍼. 옆에는 민들레 한송이가 피어있었다.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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