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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Feb 23. 2024

없으니 더 먹고 싶은 육회 탕탕이

지난달 한국에 갔을 때 광장시장에 다녀왔다.

종로는 학생 때부터 좋아하던 곳이지만 대부분 광화문, 종로 3가 근처였다. 그래서 일부러 학원을 다니던 종로 3가에서 내려 청계천을 따라 걸었다. 중간중간 마주치는 의류 부자재 가게들, 짐을 잔뜩 실은 퀵서비스 오토바이들이 정겨웠다.


남편이 힙하게 느낀 골목과 '이것도 안됨, 저것도 안됨' 같아 재미있는 청계천 금지행위 안내판.


먹는 것은 좋아하지만 뭘 먹으러 일부러 어디 가게에 찾아가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그래서 어디 어디 맛집 이런 것도 잘 모르고 흥미가 없는 것을 뛰어넘어 맛집이란 말 자체에 알 수 없는 묘한 거부감까지 느꼈다. 그런데 한국에 있는 친구와 카톡을 하다가 도쿄 어디 빵집이 소금빵 맛집이다 그래서 흠칫 놀랐다. 현지 살면서 처음 듣는 이야기였던 것도 그랬지만, 외국 빵집 어디가 맛있는지 알아두는 것조차 기본인 시대가 되었는데 나만 뒤처져 사나 싶어서. 그렇게 살아도 딱히 불편한 것 없이 잘 먹고 잘 살고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기준이지 모처럼 외국에 나온 남편은 다를 수도 있어 그가 먹고 싶다는 육회탕탕이를 먹으러 갈 때는 손수 그 맛집이라는 간지러운 단어까지 검색해 몇 집 이름을 기억해 두었다.



일본인 관광객들 사이에서는 광장시장의 육회집 하면 단연 부촌육회가 제일 유명한 것 같았지만 이미 길게 줄이 늘어서 있어 한참 기다려야 할 것 같아 아까 이름을 본 다른 가게로 들어갔다. 안내받은 2인용 테이블은 한쪽은 벽을 등진 자리고, 한쪽은 지나다니는 통로에 면해 있었는데 남편이 내게 벽 쪽 자리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예전의 그는 자기가 먼저 들어갔으면 자기가 벽 쪽에 앉는 사람이었다. 사실 누가 어느 쪽에 앉던지는 상관없는데 주변을 보면 항상 여자가 안쪽, 남자가 바깥쪽에 앉아 있어서 우리만 반대로 앉아있는 것이 남들에게는 이상하게 보일 것 같아 좀 부끄러웠다. 결혼하고 나서 ‘옆에 테이블들 봐. 벽 쪽에 누가 앉아있는지' 했더니 같은 열 다섯 테이블 중 안쪽 자리에 앉은 남자는 자기밖에 없다는 것을 본 다음부터는 에스코트하듯 안쪽 자리를 내주는 신사가 되었다. 참 귀여운 남자다.



주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큰 접시에 육회 탕탕이, 간과 천엽이 나왔다. 한국 물가가 많이 올랐다지만 같은 값이면 양이라도 많으니 아직까지는 혜자처럼 느껴진다. 이번엔 육회도 육회지만 산 낙지와 생간에 대한 기대가 특히 컸다. 육회는 먹으려고 맘먹으면 이 근방에서도 먹을 수는 있지만 산 낙지는 도쿄까지 가야 먹을 수 있고 그나마 손바닥만 한 접시에 주는 것이 삼천엔 가까이. 원래 좋아하는 것인데도 (기분 탓이겠지만) 한국에서 먹을 때처럼 오독오독한 것 같지도 않다. 생간은 먹을 수 조차 없다. 2010년대 초에 체인 고깃집에서 집단 식중독이 발생한 이후 일본 내 소고기 생식에 대한 법령이 많이 까다로워졌고, 특히 소의 생간은 아예 제공도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먹지 말라고 하는 건 더 먹고 싶고, 못 먹으면 더 더 먹고 싶어 지는 건 왜일까? 사실 간을 엄청 많이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는데 한국에 오기 직전 '사실 간은 일본에서 못 먹는 거래' 소리를 듣자마자 꼭 먹어야겠다 싶었다.


잘 비벼서 김에 싸 먹으라는 점원분의 설명대로 고소하고 쫄깃한 육회에 통통한 산 낙지까지 한점 올렸다. 육지의 것과 바다의 것을 동시에 먹는 호사스러움을 양껏 누리며 이 날 맛있다 맛있다를 몇 번이나 연발했는지 모른다. 아직 생간을 팔고 있을 때 간을 먹어본 적 있던 남편은 촉촉하고 물컹거리는 식감이 싫어 별로랬는데 이번에 간을 먹어보고는 '나 간 잘 먹는 사람이구나' 라며 감격에 겨워했다. 그날 앉은자리에서 맥주 한 병에 소주 세병을 먹어치웠다. 생각 같아선 더 먹고 싶었지만 녹두전 먹을 배를 남겨두어야 했기 때문에 거기까지만 했다.


가게를 나서서는 소화도 시킬 겸 휘적휘적 시장을 걸어 다녔다. 전술대로 녹두전을 먹어야 했으니까 다른 건 먹어볼 생각도 못했지만 고소한 음식냄새를 맡고, 사람들 틈에 섞여 그 안을 걷고, 이것저것 눈에 담고 하는 것만으로도 내 안의 에너지가 충전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우에노에도 아메요코라는 시장이 있지만 그곳과는 또 다른, 한국인들이 만들어내는 이 빠릿빠릿하고 생생한 공기감이 좋았다. 그래, 한국. 여기가 나의 나라. 하지만 아는 것보다 점점 더 모르는 것이 더 많아질, 나의 나라.






그렇게 돌아오고 한 달 반이 지난 지금. 나는 아직도 그날을 추억한다. 가끔 일부러 유튜브를 켜고 광장시장 동영상을 보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육회 탕탕이 먹방을 넋 놓고 쳐다볼 때도 있다. 막상 한국에 있을 때도 간 적 없던 광장시장. 매일 먹던 것도 아니고 어쩌다 가끔 먹던 별미를 그저 근래에 한번 가서 맛있게 먹었던 기억과, 그다음이 언제일지는 기약 없는 다음이 그날을 더 그립게 만든다. 결핍은 곧 그리움으로, 추억으로, 그렇게 쌓여간다.


매주 금요일과 토요일은 '파티의 날'이기 때문에 저녁 준비가 아니라 술상 볼 준비를 한다. 오늘도 방금 전까진 컴퓨터 앞에 대충 앉아 냉장고 안의 재료로 무슨 안주를 만들 수 있을까, 가급적이면 요즘 한창 맛 들인 전자레인지 조리로 간단히 만들 수 있는 건 무엇이 있나 찾아보았는데 문득 다시 육회탕탕이를 떠올렸다. 한국이었으면 배달도 됐겠지? 아예 생각조차 안 나게 아주 질릴 때까지 먹고 올걸. 아, 근데 생각하면 할수록 너무 먹고 싶다. 육회 탕탕이에 생간에, 천엽에, 녹두전에, 고기완자에, 전어회에, 알탕에, 생굴에, 꼬막무침에, 순대볶음에.... 결핍은 곧 그리움으로, 추억으로, 그리고 잠재워지지 않는 식욕으로, 그렇게 쌓여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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