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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Apr 01. 2024

올봄은 험한 것도 함께 왔나 봄

올해 일본의 벚꽃예상도는 보기 좋게 빗나갔다. 따뜻했던 겨울이 빠른 벚꽃에 대한 기대감만 잔뜩 올려놓고는 갑자기 꽃샘추위가 불어닥쳐 움트려던 꽃망울을 도로 움츠러들게 했다. 각 지자체에서는 만개가 예상되는 3월 말을 벚꽃 페스티벌 기간으로 잡고 올해 첫 이벤트를 준비해 왔는데 피지 않는 벚꽃으로 홍철 없는 홍철팀, 벚꽃 없는 벚꽃 페스티벌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렇게 봄이 오는 길에 한창 분탕질을 치던 꽃샘추위는 만개 예정일을 하루 앞두고 소리소문 없이 사라졌다. 마치 목표는 다 달성했다는 듯이. 


봄, 여기 있다, 봄!


그래서 매년 우리 시 벚꽃 명소에서 열리는 크래프트 아트 페어에도 예년과 달리 큰 기대를 갖지 못했다. 작년에는 흐드러진 벚꽃길을 따라 걸으며 300여 개에 달하는 부스들이 내놓는 예쁘고 개성 있는 공예품을 구경하는 낭만적인 봄을 만끽했다. 그래서 올해도 개최를 손꼽아 기다려 왔건만 거기서 벚꽃이 빠진다니 그냥 평범한 마르쉐 정도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쉽게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느릿느릿 집을 나서 회장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봄은 곳곳에 스며들어 있었다.  

추위가 가시자마자 분주하게 꽃을 피운 유채들과 몇몇 성질 급한 개체들이 독야청청, 아니, 독야홍홍 연분홍빛 벚꽃 잎을 터트리고 봄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전날에는 꽃으로 장식한 배를 타고 사진을 찍는 촬영회도 있었다 한다
아직 꽃보다 꽃망울이 더 많다


꽃망울이 주렁주렁 매달린 벚나무들을 보면 핀 꽃보다 앞으로 필 꽃들이 훨씬 더 많아 보인다. 제 때 즐기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대신 올해는 조금 더 진득하고 느긋하게 봄의 정취를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때때로 이미 늦어버렸다 생각하는 우리 인생도 분명 그러할 것이다. 제 때 꽃 피우지 못했던 대신 또 다른 타이밍, 색다른 방법으로 반드시 눈부시게 꽃망울을 터트릴 날이 올 것이다. 그게 자연의 순리니까.  


그런데 올봄에는 벚꽃이 늦어진 것 이외에도 또 다른 이변이 감지되었다.


아무래도 이제 시작인 듯


꽃가루 알레르기에 걸린 것 같다. 

일본에서는 카훈쇼(花粉症)라 부르는 꽃가루 알레르기. 워낙 고생하는 사람이 많아 날씨 어플에서 꽃가루 정보까지 알려주는 생활 질병이다. 그런데 이건 일본인들이 특별히 꽃가루에 취약한 몸을 타고난 것이 아니라 정부 정책의 실패 때문이다. 


태평양 전쟁 이후, 일본 정부는 산림의 조기복구와 주택 자재로서의 수요를 고려해 삼나무를 많이 심었다. 일본의 기후가 삼나무의 생육환경에 적합해 심고 기르기가 수월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열심히 삼나무를 심어댄 결과, 일본인의 1/3은 봄이 되면 대량의 삼나무가 뿜어대는 꽃가루에 고통받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나무를 슥슥 쉽게 베어낼 수 없는 이유는 역시 돈이다. 자르는 데도, 다른 나무를 심는데도 막대한 돈이 들고, 자른 삼나무는 콘크리트 같은 다른 건축자재, 수입산 값싼 목재에 밀려 소비할 곳도 마땅치 않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냥 이렇게들 사는 것이다. 정부에서는 삼나무 문제를 해결해야 할 과제로 인식하고 나름의 시책을 시행 중인 것 같지만 30년을 잡고 인공 삼나무숲을 반으로 줄이겠다거나, 꽃가루 비산대책으로 새로운 약제 개발을 한다는 등, 항목 하나하나가 이 땅에서 자주 보이는 언제나처럼의 '눈 가리고 아웅'같아 보이는 것은 내 속이 베베 꼬인 꽈배기라서일까.


그래도 남의 일이었다. 삼나무가 제아무리 꽃가루를 뿜뿜해도, 30년 걸려 느릿느릿 꼼지락꼼지락 해결하겠다 해도, 내 몸은 괴롭지 않으니 '으이그 어느 세월에' 한마디를 할 지언정, 남의 일이었다. 그랬던 내게, 봄만 되면 하루종일 코를 풀고 눈이 충혈되어 고통스러워하던 대만인 전 직장동료는 이렇게 말했다.


"나도 원래는 없었는데 일본 오고 나서 생긴 거예요. 나이 들어 생기기도 하니까 조심하세요."


그리고 남의 일이기만 한 그것이 며칠 전부터 내게도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시도 때도 없이 나는 재채기와 간헐적으로 눈과 코의 간지러움. 코를 팽 풀면 감기도 아닌데 투명한 콧물이 나왔다. 비비고 풀어서 시원하게 느끼는 것도 잠깐이고 얼마 안있어 증상은 반복되었다. 할 수만 있다면 눈과 코를 똑 떼서 흐르는 물에 휘휘 헹구어 끼우고 싶을 정도다.


한동안 쓰지 않던 공기청정기를 다시 꺼내놓고 창문을 닫았다. 바깥에 나갈 때는 벗어두었던 마스크를 다시 찾아 끼웠다. 봄은 눈으로만이 아니라 따스한 햇살과 볼을 간지럽히는 부드러운 바람으로도 느끼는 것인데, 다시 코로나19 사태 때처럼 다시금 나를 가두고 방어태세에 돌입해야 하는 봄이 영 아쉽다. 영화에서는 파묘로 험한 것이 튀어나왔다던데 아무래도 2024년 나의 봄은 험한 것도 함께 데리고 왔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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