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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Apr 08. 2024

벚꽃을 보러 가는 마음들

와카이즈미(若泉) 공원


별다른 볼거리도, 놀거리도 없는 시골이지만 이 공원이 지척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마음 든든한 일인지 모른다. 작은 하천을 끼고 양 옆으로 조성된 벚꽃길과 오솔길 같은 산책로, 넓은 놀이터, 곳곳에 놓인 깨끗한 벤치와 작은 정자에 자유롭게 헤엄치는 오리와 잉어까지, 한쪽 끝에서 다른 한쪽 끝까지 15분도 되지 않는 자그마한 공원이지만 지역사회에서 사랑받는 공원이 갖추어야 할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 벚꽃철에도 도심의 공원처럼 꽃놀이 인파로 꽉 들어차지 않는다는 것 역시 훌륭한 장점이다.


2022년 3월 말, 이곳으로 이사 오고 2년이 흘렀다. 그때부터 봄이 되면 와카이즈미 공원으로 벚꽃을 보러 간다. 작년에는 '벚꽃 붐'이 일어, 날이 좋은 날은 물론, 비가 오는데 우산까지 쓰고 가 벚꽃을 보았다. 저녁에 요자쿠라(夜桜, 밤의 벚꽃)를 보러 가 나부끼는 벚꽃 잎 아래에서 간장 소스를 발라 구운 주먹밥에 사케를 홀짝이기도 했다.


개화 타이밍이 엇갈려 작년만큼 열과 성을 다한 하나미(花見, 벚꽃놀이)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올해도 어김없이 그곳으로 향했다. 이미 한번 왔다가 개화가 늦어져 뺀찌를 먹었지만 벚꽃이 만개한 지난 주말, 드디어 벚꽃다운 벚꽃을 한껏 눈 안에 남았다.


공원 산책로와 바로 맞닿은 집들은 매해 집안에서 편하게 꽃을 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을까


내 눈에 어쩐지 일본스러워 보이는 풍경 중 하나


이 지역에는 베트남이나 인도네시아에서 온 기능실습생, 아버지의 나라로 돌아온 일본계 2,3세 브라질인들이 많은데, 이들 역시 휴일을 맞아 벚꽃을 보러 나왔다. 아직 앳된 얼굴의 베트남 청년은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탐스러운 벚꽃송이를 향해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었고 (베트남에 있는 여자친구에게 보낼 사진을 찍고 있는가 싶어 한국 아줌마도 미소를 머금었다네) 작은 유모차를 끌고 가족과 함께 온 브라질인들은 행복해 보였다. 일본인들처럼 잔디밭에 돗자리를 펴고 앉은 이들은 준비해 온 맥주와 간단한 안주를 먹으며 한창 이야기 꽃을 피웠다. 남의 나라에 돈 벌러 와서 힘든 일 하며 산다는 게 보통 쉬운 일은 아닌데, 들뜬 목소리와 밝은 표정을 보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그들 나름대로 서로를 버팀목으로 열심히 살고, 또 이 나라를 즐기고 있는 것 같아 일본인 대신 내가 안심했다. 나 자신도 일본에는 일하러 왔고, 일본에서 일하고 싶은 외국인 유학생들과 관련된 일을 했던 경험 때문인지, 모르는 사람들인데도 괜히 마음이 쓰인다.


뭍으로 올라오려 한참을 퍼득거리다 턱에 걸려 실패하고 날아가는 오리. 부끄러운 듯 보였다.


공원은 길 하나를 사이로 제1공원과 제2공원으로 나뉘어 있다. 우리는 주차장에 차를 대고 하천 산책로와 어린이 놀이터가 있는 제2공원에서 거슬러 올라갔는데, 볕이 잘 들어 밝고 아기자기한 제2공원과는 대조적으로,  제1공원은 옆에 면한 작은 동산이 드리운 그늘 때문에 분위기가 사뭇 비장하다. 대신 다리로 하천을 건널 수 있고 다리 위에서 유유히 헤엄치는 잉어들을 관찰하는 재미가 있다. 때로는 하천에 사는 오리가 난데없는 몸개그를 선보이기도 한다.


어디선가 나타난 어린이들


섬으로 건너가 오리들을 구경하고 있는데 어딘가에서 왁자지껄한 목소리와 함께 한 무리의 엄마와 어린이들이 나타났다. 날이 좋으니 사이좋은 엄마들끼리 벚꽃놀이 겸 아이들 코에 바람도 쐬어줄 겸 해서 나왔나 보다. 어린이들은 가장 큰 다리 하나를 점령하고 다리 아래로 식빵을 찢어 던지기 시작했다. 저거 말려야 하는 거 아닌가 했는데 잉어들이 잽싸게 나타나 하나하나 다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한두 번 던져 줘 본 솜씨가 아니고, 한두 번 얻어먹은 본새가 아니었다. 던져서 즐겁고 먹어서 행복한 그들의 공조 덕분에 나는 물고기들 여럿이 물 위로 머리를 내밀고 빵 하나에 달려드는 진기명기를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다.


물고기 빵 쟁탈전


말 그대로 낚시


어린이들의 밑천이 다 떨어져 나도 자리를 떴다가 수상 벤치에 앉아 쉬는 사이 손을 내밀어 보았다. 인간의 기척을 어떻게 알았는지, 저 멀리서부터 와 받아먹을 태세를 갖추는 잉어씨들도 있었다. 봉신연의의 태공망은 낚싯바늘 없이 낚싯대를 물에 드리우며 물고기가 아닌 세월을 낚았다 하는데, 이날 나는 낚싯대도 없이 맨 손으로 물고기들을 낚는 기염을 토했다. 낚인 물고기들은 몇 번 뻐끔거리더니 신경질을 내듯 몸을 돌려 사라졌다.



이날의 벚꽃놀이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50대 후반~6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이 부부였다. 머리엔 서리가 내리고 퉁퉁하게 불어난 몸이지만, 사랑이든 정이든 함께 봄꽃을 보러 집을 나선 부부. 꽃과 물이 보이는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아 500미리 맥주 캔을 각자 손에 들고, 집에서 준비해 온 듯한 플라스틱 찬합에 담긴 안주를 오물오물 먹으며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더 이상 두근대는 설렘은 없겠지만  손이 가는 먹거리를 기쁜 마음으로 준비하고, 이 날을 고대해 둘이 손 꼭 붙잡고 나와 봄의 정취를 한껏 느끼는 모습을 보며, 나도 그렇게 작은 것에 큰 의미를 두고 감사히, 즐거이 느낄 수 있는 사람으로 늙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나의 배우자도 그랬으면 좋겠다.


그러고 보면 오늘 마주친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마음을 들고 이 자리에 왔을 것이다.


누군가에겐 처음 눈에 할 벚꽃에 대한 '궁금함'이 제일 컸겠고, 누군가에겐 아버지, 할아버지가 보던 풍경을 바라보러 간다는 '낯선 그리움'을 들고 왔을 것이다. 나란히 정장을 입고 걷던 커플에게는 편하게 쉴 수 없는 주말이지만 사랑하는 이와 로맨틱한 하루를 보낼 '설렘'을 가져왔을 것이고, 엄마 친구들과 함께 온 엄마들의 주머니에는 오롯이 혼자 감당해야 했을 육아 스트레스를 나눠 갖고 한숨 돌릴 수 있는 '해방감'이 들어있었겠지. 그 손에 이끌려 온 아이들은, 벚꽃보다는 마음껏 뛰고 떠들고 친구들과 함께 던진 빵을 맛있게 받아먹는 잉어 떼와 만날 수 있다는 '들뜸'을 접어왔을 것이다.


벚꽃이야 작년의 벚꽃도 올해의 벚꽃도 다 고만고만 비슷하지만,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 하나하나가 자아내는 드라마가 벚꽃을 다른 것으로 보이게 한다. 각자 저마다의 마음을 들고 와서, 서로에게 주고 떠난다. 나에게 있어서는 올해도 남편과 함께, 작년과는 또 다를 그 드라마를 눈에 담고 싶다는 기대감, 이 제일 컸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옆에 있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것이 되어버렸지만, 사실은 당연하지 않은 이 순간을 새롭게 다시 되새기고 기억하는 데에는 그만한 것이 없다. 그렇게 올해도 한 페이지의 추억을 적어 내려갔다. 다른 이들의 마음도 잔뜩 들고 돌아왔다. 


이 사람은 어떤 마음을 들고 이 길을 걷고 있을까


왔던 길을 되돌아 걷다가 다리를 건너는 한 사람을 보았다.

손에 든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걷던 그는 과연 무얼 보고 있었을까.

지금부터 만날 누군가로부터 온 '지금 어디쯤 왔다'는 연락일까? 아니면 벚꽃 보러 왔다고 부산스럽게 올라가는 친구들의 벚꽃사진 타임라인일까? 나는 그 자리에 서서 한동안 그의 모습을 지켜보았지만 이 예쁜 공원 쪽으로는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은 것이 신경 쓰인다. 이 멋진 광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은 그가 어떤 마음을 들고 이 길을 걷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안에 이 '지금'보다 더 빛나는 뭔가가 그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었기를 바란다. 이 봄이 너무 아까우니까.


작년의 벚꽃 잎


다음 날, 집을 나서려다 운동화 뒤축을 고쳐 신는데 비닐우산에 오래된 파운데이션 자국처럼 보이는 것이 있었다. 여기 오기 전에 사서 몇 번 안 쓴 우산인데 외출도 차만 타고 다니다 보니 쓸 일이 없어 한참을 방치해 둔 것이다. 너무 오래돼서 녹이 슬었나, 썩었나, 하고 가만 보니 버석버석하게 마른 벚꽃잎이다. 아, 그러고 보니 작년에 비 오는 날에 벚꽃을 보러 갔을 때 이 우산을 썼었다는 걸 떠올렸다. 


갓 떨어져 내렸던 작년의 벚꽃 잎

작년에 찍은 사진에도 남아있는 그 꽃잎이다. 내 우산에 떨어져 내려 붙어있다가 그대로 1년이 지났다. 예쁜 연분홍색 꽃잎은 생명력을 잃고 누렇게 변색된 채 말라갔지만 1년 전의 나와 타인의 마음이 담긴 기억의 조각이 이렇게 남아있는 거라고 생각하면 '꽃잎 미라'도 또 달리 보인다. 이런 부분까지 포함해 올해의 벚꽃놀이는 이렇게 끝이 났고 '2024년 벚꽃놀이' 폴더에 고이 자리 잡을 것이다. 내년의 나는 어떤 풍경을 마주하고 어떤 마음들을 들고 집으로 돌아오게 될까. 기대가 아니 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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