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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Apr 15. 2024

빛바래지 않은 추억을 뒤쫓아

정확히 3년 만의 카루이자와

지난 일요일, 나가노현 카루이자와(軽井沢)에 다녀왔다. 고랭지인 카루이자와는 한여름 평균기온이 30도를 넘지 않아 피서에 최적화되어 있고, 울창하고 아름다운 자연환경, 아기자기한 카페와 상점가가 사람들을 매료하는 휴양지이다. 우리 집에서는 차로 한 시간 반, 별장 하나 두고 왔다 갔다 하기 딱 좋은 위치지만 지금 사는 집도 월세인 형편에 그림의 떡이다. 목 좋은 자리에 별장을 가지려면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되어야 할 텐데 차라리 떡이 되는 게 더 빠르겠다. 떡이 되는 것도, 별장도 포기하는 대신, 편의점에서 맥주 한 캔과 감자과자를 사 볕 좋은 조수석을 만끽하며 카루이자와로 향했다. 꼭 이날 카루이자와에 가야만 했다. 


시샤 바 / 오리지널 데님샵 / 테디베어 리메이크 공방
노천카페 / 감각적인 건물 벽장식 / 지금은 쓰지 않는지 비닐로 동여매놓은 버스정류장 표지판
오래된 교회 / 누군가의 별장


시간을 즐기러 오는 곳이기 때문일까, 구 카루이자와의 메인 스트릿 주위는 휴양지 특유의 여유롭고 한가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심플하고 러프한 차림새의 사람들이 노천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는 모습들이 아주 편안해 보였다. 따뜻한 햇볕이 쏟아지는 골목 구석구석을 거닐며 놓쳤던 카루이자와의 모습을 추억 속에 새로이 아로새겼다. 그렇게 잠시 카루이자와의 봄날을 즐기다 점심을 먹으러 라멘집 미노야(美乃屋)로 향했다.



미노야는 구 카루이자와 상점가 초입에 있다. 하지만 큰길에서는 입구가 보이지 않아 이 입간판을 놓치면 존재조차 알기 어렵다. 게다가 카루이자와에는 노천테이블이 있는 베이커리 레스토랑, 유명한 소시지 전문점, 아이디어 만점 신감각 퓨전 우동집 같은, 데이트에 어울릴 법한 세련되고 화려한 가게들이 즐비한데, 그 분위기에 익숙해지면 이 허름한 간판은 가게를 열어서 내놓은 게 아니라 폐업한 가게가 깜빡 잊고 놓고 간 정도로 보여 눈에 잘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난 오늘 여기에 가기 위해 카루이자와까지 왔다.


골목 분위기도 수상쩍고


2021년 4월 둘째 주 일요일, 

그러니까 정확히 3년 전 같은 날, 

나와 남편은 이 가게에 있었다.


한창 코로나가 횡행하던 시절, 런치타임을 넘긴 시간에 유일하게 손님을 받고 있던 곳이 여기였다. 그때 남편은 남자친구도 아니고 그냥 '어제 처음 만난 남자'였는데, 주인아주머니가 갑자기 우리에게 말을 걸고 손금을 봐주시면서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닌 것 같다는 의심을 하게 했다. 어떤 의미로는 우리가 사귀고 결혼하는데 상당한 지분을 가지고 있는 추억의 장소다.  '언젠가 꼭 다시 가보자'라는 이야기를 줄곧 해왔다. 


그러다 4월 둘째 주 일요일, 우리 집 일본인을 쓰며 한껏 추억에 고취되어 있는 지금, 다시 한번 그곳에 가기로 했다. 3년 전의 우리가 했던 그대로 나는 세븐일레븐에서 맥주를 사 마시고 운전자는 부러워했다. 졸지는 않았지만 그 덕에 나무 타는 야생 일본원숭이도 보았다.   


3년 전의 자세한 내용 (우리 집 일본인 12화 '카루이자와의 이상한 라멘집')


그때랑 똑같았다


혹시나 없어진 건 아닐까, 주인이 바뀌진 않았을까 두 근 반 세 근 반 하며 찾아간 라멘집은 기억 속의 모습 그대로였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나와 같이 왔던 그 남자와 내가 부부가 되었다는 것뿐이다. 3년 전엔 공주님 대하듯 내게 버튼만 누르라했던 그는 이번엔 내게 천 엔을 띡 건네주는 것으로 둘 사이의 한껏 가까워진 거리감을 표현했다.



여전히 음악 하나 없이 음식 만들고 먹는 소리만 가득한 가게, 분주히 움직이는 주인아주머니와 아들분의 모습에 향수를 느꼈다. 흘끗 옆을 보니 남편 표정이 이미 센티하지만 가게 사람들은 우릴 기억하지 못할 테고 다른 손님들도 있으니 얌전히 먹기만 하자 하는데 음식이 나왔다. 처음 먹었을 땐 너무 시장했고, 옆 사람이랑도 서먹서먹하던 때라 라멘이 정말 맛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환경이 맛있다 느끼게 한 것인지 긴가민가했는데 이제 답을 찾았다. 진짜로 맛있었다. 


"서비스 미니 챠슈동입니다"


이 역시 그대로였다. 이걸 먹어 말아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물론 '이것까지 먹으면 여자가 너무 게걸스러워 보일까' 같은 걸 생각하지 않는다. 없어서 못 먹는 건 있어도 있는데 안 먹는 건 없다. 호호. 그렇게 밥알 한 톨까지 싹싹 긁어먹고 있었더니 어느새 손님은 나와 남편, 둘만 남았다. 주인아주머니가 가까이 다가와 말을 거셨다.


"어디서 왔어요?"


와, 3년 전이랑 똑같은 대사! 






여전하셨다.

제일 저렴한 주차장 정보와 더 빨리 카루이자와를 나갈 있는 길, 기념품으로 먹거리를 것이라면 상점가 밖 슈퍼에 가면 똑같은 것들을 싸게 팔고 있다는 것, 여름에 오면 직접 수확해 있는 셀프 야채판매장, 채소 수확 후에 100엔에 씻고 있는 목욕탕 같은 지역정보를 이전보다 강력한 머신건 토크로 전수해 주셨다. 핸드폰에 적는데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손가락을 움직이느라 정신없는 와중에도 내심 기뻤다.

이 라멘, 이 풍경, 그리고 사장 아주머니와 이야기한 것까지가 우리의 추억이기 때문에, 이렇게 완벽하게 3년 전과 싱크로 된다는 게 아주 의미 있게 느껴졌다. 그래서 자리에서 일어나며 우리가 오늘 이 가게에 온 이유를 고백했다. 


"저, 실은 저희 3년 전 오늘, 여기 왔었어요."


우리에겐 너무 큰 추억이고, 변하지 않고 건강하신 모습이 너무 다행스럽다고. 내 이야기를 듣고 아주머니는 물론이고 뒤에서 정리를 하던 아들 분까지 손을 멈췄다. 그리고 눈이 동그래져서는 축하한다고, 다시 와줘서 너무 고맙다 하셨다. 아주머니는 잠깐만 기다리라고 몇 번이나 당부를 하며 냉장고에서 뭔가를 꺼내 비닐봉지에 담아주시며 카운터 건너편 내 손에 쥐어주셨다.


"차슈야. 볶음밥이나 카레에 넣어도 맛있어. 결혼 축하해요. 다음엔 아이도 같이 올 지도 모르겠네!"



우린 그저 우리의 시간을 뒤쫓았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추억에 스친 타인이 우리가 스스로에게 그러하듯 협조나 동조를 해야 할 의무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주머니의 마음이 더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3년 간 스쳐간 사람들만 해도 얼만데. 솔직히 기억은 하나도 안 날 것이다. 하지만 이 가게와 아주머니를 소중한 추억으로 여기고 먼 곳에서 일부러 다시 찾아왔다는 것에 대한 고마움과 기억하지 못하는 미안함, 축하하는 마음 이런 것이 복합적으로 우러나와 이 차슈를 싸주신 것이 아닐까. 아아, 뭘 이런 걸 다! 하면서도 가슴 한구석이 따뜻함으로 가득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사람과 사람이 얽히고 사는 정이 이런 거구나. 남편은 가게 골목을 완전히 빠져나오고 나서야 '눈물이 날 뻔한 것을 꾹 참았다'라고 했다. 


기억에 유효기한이 있을까? 있을 수도 있겠다. 국민학생 때 죽고 못살던 친구 대부분은 이름도 잊어버렸다. 혹시 지금'은' 기억하고 있는 좋았던 기억, 잊을 수 없다 생각되는 추억도 언젠가 유효기한이 오고 잊어버리는 날이 올 것이다. 그럼 나는 '이날 낡은 기억에 새 기억을 덧칠했으니 유효기한은 늘어난 거다'라고 우겨보고 싶다. 수채화는 엷은 물감을 켜켜이 올릴 때마다 붓자국이 남지 않는가. 내 삶은 그런 것이다. 같은 자리이긴 하지만 여기, 여기는 물기가 덜 말랐으니까 기한도 이제부터 새로 세야지. 그렇게 더 많은 경험과 추억으로 열심히 붓칠을 하고 여기 아직 안 말랐는데? 하면서 시간이 지나도 빛바래지 않을 추억을 더 더 만들어 나가고 싶다. 나를 지탱하고 가슴 따뜻하게 한 순간들을 할 수 있는 한 더 오래 기억하고 싶다. 




함께 갔다 서로의 집으로 헤어졌던 3년 전과 달리 우리는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싸주신 차슈는 쉽게 먹기 아까워 조금만 썰어 맛보았다. 전자레인지에 살짝만 데웠는데 돼지고기 기름이 흘러나와 윤기가 차르르르했다. 한입 한입 맛을 음미하면서 먹었다. 고소하고 달콤 짭짤한 맛있는 차슈. 조금도 남기지 말고 감사한 마음으로 먹어야지. 그리고 다음에 카루이자와에 갔을 때에도 다시 한번 미노야에 가야겠다 다짐했다. 우리의 소중한 추억이 앞으로도 빛을 잃지 않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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