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키호테에 갔다. 도쿄 중심가의 돈키호테는 외국인 관광객에게도 유명한 만물 잡화상이지만, 주택가나 지방에 있는 MEGA란 글자가 붙은 돈키호테는 마트로서의 역할에 좀 더 무게감을 두어 야채나 생선 같은 신선식품도 취급한다. 처음에는 내가 보아온 돈키호테와 조금 다른 이질적인 모습에 약간의 불신감이 들기도 했다. 여기 들어오고 있는 고기들은 정말 신선한 것일까? 질 나쁜 물건을 구색 맞추기 용으로 가져다 놓은 것이 아닐까? 그 후, 메가돈키는 돈키호테에서 운영하던 마트 체인이 노선변경 한 것이라는 걸 알고 불신은 사라져 지금은 거리낌 없이 잘 사고 있다. 주로 가는 것은 다른 마트지만, 가끔 가면 생소한 상품도 있고 재미있다.
주말의 파티를 앞두고, 우리는 돈키호테로 향했다. 금요일은 삼겹살 블록을 할인하는 날이라 삼겹살과 소주, 그리고 몇 가지 주전부리를 살 것이다. 그동안 산쇼사와 만들어 먹는다고 한 주 동안 많이 마신 바람에 소주가 빨리 떨어졌다. 먼저 술 코너부터 갔다. 평소라면 쿄게츠를 찾았겠지만 이번만큼은 진로를 고를 수밖에 없었다. LED라이트코스터가 붙어있다. 값도 비등비등하고 맛도 비슷비슷하고 어차피 사야 하는 것이라면 뭘 더 주는 걸 사는 게 낫지 않겠는가. 덤으로 주는 코스터의 유혹에 넘어가 그렇게 진로를 손에 들었다.
집에 와 열어본 봉투 안에는 아이폰 무선 충전기처럼 생긴 얇고 세련된 플라스틱 원반이 나왔다. 일반사단법인 전일본 스나쿠연맹 (*스나쿠: 간단한 술과 안주를 파는 작은 바 비슷한 술집)가 추천하는 상품이며, 6종의 발광모드가 탑재되어 있다는 LED라이트 코스터였다. 프로 공인? 기대감이 커졌다.
그럼 전일본 스나쿠연맹이 추천한다는 코스터의 기능을 살펴보자.
이전에도 진로는 이런 걸 베풀었다. 단색으로 깜빡거릴 뿐이라 이번 것보다는 재미없지만 그래도 존재 자체가 신기했던 발광 코스터, 한국 식당에서 볼 수 있는 참이슬이라 적힌 소주잔. 소주잔 프로모션은 잊을만하면 한 번씩, 몇 년째 계속해 오고 있다.
그뿐인가.
https://youtu.be/jmPHrbAmoEM?si=_l4QqN4vPcEDFaLX
https://youtu.be/pb9e4589WfI?si=jlk8YOfJ1c72c-La
몇 년 전, 진로는 한국 로맨스 드라마의 클리셰를 재현한 웹광고를 만들어 참이슬 코너에 작은 모니터를 붙여놓고 반복해서 틀어놓기도 했다.
그 속에서 여주인공은 라면에 참이슬을 마시고, 여주인공과 아들이 만나는 것을 반대하는 재벌집 사모님은 '아이고, 머리야' 하며 머리를 싸맸다. 남자주인공은 아버지와 술을 마실 때 몸을 돌려 마시고 '여기요, 참이슬 주세요'라고 주문한 참이슬은 '짠' 하고 말하며 잔을 부딪힌다거나, 병뚜껑을 딸 때 회오리를 만들려 했는데, 중간중간 '진짜?'나 '대박'같은 한국어가 등장하는 광고를 보고 있으면 작은 실소와 함께 맞장구를 치게 되고 나도 모르게 좀 흐뭇해지는 부분이 있었다. 진로 주식회사가 노리는 것은 일본 내에서 진로와 참이슬과 참이슬톡톡과 테라를 가능한 많이 팔아 이윤을 많이 남기는 것이겠지만, 진로가 한국 술임을 전면에 내세우고, 술은 물론이거니와 그 안에 녹아있는 한국의 정서를 함께 팔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한국인으로서 뿌듯하기도 했다. 남편과 그 자리에 서서 한참을 보며 재미있어하던 기억이 지금도 난다.
코스터나 소주잔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집에서 마시더라도 기왕 마시는 거 한국에서 하는 대로 그 잔에, 흥 내면서 마셔보라고. 차게 식힌 소주를 따른 소주잔을 코스터 위에 얹고 방을 컴컴하게 하자, 그 옛날 학생시절, 호프집에 가면 누구 생일이라고 갑자기 서프라이즈로 불빛 번쩍거리고 터보의 해피버스데이투유가 흘러나오던 때가 떠올랐다. 누군지도 모르겠지만 가게 안의 모두가 축하해요 하고 박수를 신나게 짝짝 쳐주던 그 정겹고 흥 넘치는 술자리.
그걸 모르는 일본인 남편은 지금 이 광경을 보고 느끼고 떠올리는 것은 나와 다르겠지만 어쨌든 신이 나는지 덩실덩실 빠른 BPM의 아리랑 같은 어깨춤을 췄다. 그래, 안 겪어봐도 묘하게 전달되는 느낌이 있을 거야. 오늘 너와 내가 마신 건 소주가 아니라 한국의 소울이렷다. 부어라, 마셔라. 홀린 듯 유튜브에서 클론의 초련을 찾아 틀고 코스터와 함께 나도 발광하기 시작했다.
"내일 이거 하나 또 사자."
다음 날, 우리는 다시 돈키호테에 갔다. 그 하루동안 LED라이트 코스터에 이끌린 이들이 우리뿐만은 아니었는지, 이게 붙어있는 상품은 딱 두 개만 남아있었다. 다시 하나 얼른 손에 들었다. 이제 두 개 있으니까 한 사람이 하나씩 코스터로 쓰면 되고, 흥이 오르면 양손에 들고 클론처럼 춤도 출 수 있다. 고장이 날 경우를 대비해 스톡으로 하나 더 사둘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나머지 하나는 다른 누군가를 위해 그 자리에 남겨두었다.
이미 두 개나 사가고서 이런 말 하는 것도 웃기지만, 이제까지 한국 소주를 사본 적 없는 누군가가 이 코스터에 소유욕이 생겨 진로를 사고, 한국의 소울을 마시고, 그것이 우리나라에 대한 흥미와 호감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