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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Jul 31. 2023

평일의 쓰기 모드

주말은 글쟁이의 무덤


드디어 월요일 아침.

혼자가 되자마자 부리나케 아이스티 한잔을 만들어다 컴퓨터 앞에 앉았다. 아침부터 뜨겁게 내리쬐는 햇볕을 막아보려고 동쪽 창에 차광커튼을 쳤더니 거실이 어두컴컴하다. 언제나 아침은 커피로 시작하지만, 오늘은 분위기를 내보고 싶어 위스키와 색이 비슷한 아이스티를 가져왔다.


괜한 '분위기 내기'를 길게 즐겨볼 새도 없이 아이스티는 한큐에 원샷하고 서랍을 열어 어제 날짜로 저장된 글 하나를 눌렀다. 주말 내 세 번이나 구워 먹은 컵케이크 사진만 덩그러니 올라가 있는 서랍장의 글에 이제야 또각또각, 글자를 박아 넣을 수 있게 되었지만 원래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는 애저녁에 잊어버렸다.


나에게 있어 주말은, 글쟁이의 무덤이다.






회사원 시절의 평일은 그야말로 출퇴근으로 점철된 날들,이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고, 후다닥 전철역으로 걸어가 1시간 반을 전철 속에서 흔들리다가, 커피 한잔으로 수혈을 하고 복작거리는 하루를 보내다 다시 1시간 반을 서서 집으로 돌아간다. 집에 오면 씻고 안주를 만들어 술을 마시다, 시간이 되면 억지로 잠을 청하고, 알람소리에 일어나 또다시 출근을 하는 것이 전부인 삶.


그래서 주말이야말로 내가 온전히 나로 있을 수 있는 날이었고,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는 날이었는데 (그래서 늦게까지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서는 내동 술만 마셨다), 이제는 술 이외에 내가 하고 싶은 것도 발견했는데, 주말이라고 그것에만 매달리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가 않다.


평일은 평일대로 할 일이 있고, 주말은 주말대로 할 일이 있다.




주중에 생긴 오이로 오이지 만들기 (역시 오이무침이랑 공정 자체가 달랐다)나 무 성큼성큼 썰어 깍두기 만들기, 대량의 방울토마토를 식초에 씻기 같은 대용량 주방가사는, 남편 출근 후부터 퇴근 사이, 글도 쓰고 가사도 해야 하는 시간제한이 있는 평일보다는 주말에 적합했고, 



심심해하는 남편이랑 맥주도 한잔 같이 마셔줘야 하고, 아이돌 서바이벌 방송 보면서 통역도 해줘야 한다. 


사실 집안일이야 눈 딱 감고 안 해버리면 그만이지만, 역시 이 집 안에 나 이외의 존재가 상주한다는 것은 그 무게감이 전혀 다르다. 나는 하루에 한 끼만 먹어도 되고, 집에만 있어도 시간이 없지 할 일이 없는 사람은 아닌데, 남편은 휴일에야 말로 맛있는 걸 먹거나, 같이 놀러 나가거나 해야 재밌게 보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 '알아서 놀라'라고 하면, 옆에 와서 배고프다 심심하다, 한숨 폭폭이 끊이질 않는다. 


그나마 요즘은, 알아서 차려먹고 나도 먹겠다 하면 차려주기도 해서 고맙지만, 각 잡고 컴퓨터 앞에 앉아 있으면 뒤에 와서 흘끔흘끔 컴퓨터 화면 쳐다보고 (봐도 무슨 뜻인지는 모르지만) 자꾸 귀찮게 알짱거려서 집중을 할 수가 없다. 잠깐 앗, 이거 쓸까! 하고 생각이 나서 어플을 기동해 생각난 글감을 제목으로 적어두거나, 사진을 올리는 것이 고작이다. 


혼자 장 봐오라고 집에서 (쫓아) 내보내기도 했는데, 남편은 그 한 시간 남짓의 시간 동안, 내가 마음의 평정을 찾고 글을 완성했다고 생각하는지 이틀 동안 아무것도 못했다는 내게 아까는 뭘 했냐 물어왔다. 나는 키보드를 두드리는 시늉을 하며 '이렇게 손가락 또르륵 굴리면 휘릭하고 저절로 나오는 게 아니야'라고, 쓰지 못한 자의 괴로움을 토로했다. 누가 쓰라고 해서 하는 것도 아니고, 딱히 마감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쓰고 싶은 에너지가 채 소비되지 못하고 내 안에 머무르고 있는 상황이 얼마나 괴로운지. 평일도 집중 빡 해서 생각 많이 하면서 쓰고 싶은데, 집안일 때문에 흐름이 뚝뚝 끊겨서 하루에 하나 쓰는데도 허덕이고, 주말은 평일보다 더 집중을 할 수 없다고. 


"미안"


이야기를 다 듣고나더니, 남편은 왠지 미안하다며 도서관을 가보는 건 어떻겠냐고 했다.

도서관 열람실에서 컴퓨터 사용 안될 거라 하니, 어쩐 일인지 인근 도서관 정보를 다 찾아보더니 컴퓨터 안된다며 카페나 패밀리 레스토랑을 추천했다. 


생각해 주는 건 고맙지만 이런 날씨에 도보 30분 거리를 오가는 건, 운동 목적이라면 (열사병으로 쓰러지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꽤 괜찮은 방법일지도 모르겠지만, 글 쓰는 데에는 적절하지 않을 것 같다. 


근데 차 있는 자기가 나갈 생각은 안 하고 왜 나보고 나가라는 거지...






남편이랑 집안일 때문에 주말엔 글을 쓸 수가 없다고 투덜거렸지만, 사실은 안다. 내가 후져서 그렇다는 걸. 또르륵 굴려서 휘릭하고 쓸 수 있는 재능 넘치는 사람도 세상엔 분명 존재하겠지. 내가 내가 아니었다면, 남편이 잠깐 마트에 간 그 한 시간 사이에 또르륵 굴려서 휘릭 하고 새 글을 생산해 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어쩌겠는가. 내가 나인 걸. 그래서 글을 쓰기 위해서는 현실과 나를 분리시킬 시간이 필요하고, 한글자 써내려 가는데에도 혼자 여러번 곱씹어야 한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이게 나인 걸. 


그래서 매주 월요일 이 시간은 아무것도 쓰지 못한 주말의 나를 반성하고, 어떻게든 평일의 쓰기 모드로 돌아가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회사원도, 주부도 아닌 나 자신으로서, 사유하고, 느끼고, 가라앉히고. 


낑낑.

 

지금도 열심히 워밍업 중이다. 낑낑. 



뭘 쓰려고 사진만 덩그러니 남겨놓았는지는 잊어버렸지만, 뭔가 하고 싶은 말은 있었겠거니 하여 컵케이크 사진은 남겨두기로 했다. 핫케이크 믹스와 몇 안 되는 재료만으로 전자레인지에 2분 돌려 만든 간단 컵케이크. 주말 이틀 동안 세 번을 먹을 정도로 푹 빠져 있었으니, 어쩌면 그걸 만들기로 한 경위와 맛, 앞으로의 동향 (핫케이크 믹스를 상비품으로 항상 구비하여 둘지 말지)에 대해 쓰려고 했을 수도 있다. 음, 역시 별 이야기 아니었다. 


얼른 평일의 쓰기 모드를 회복하고, 이번 주는 우리 집 일본인 다음 이야기도 완성하고 싶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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