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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Jul 27. 2023

어떤 우편물

어제 오후 6시가 다되어가는 시간의 일이었다.


한창 에어컨 앞에서 녹아 있는데 난데없이 초인종이 울렸다.

이런 시간에 초인종 울리면서 올 사람이 없는데 하며 수상한 사람이면 없는 척을 하려고 조심조심 걸어 인터폰 화면을 봤더니, 집배원 아저씨였다.


"네"

"우체국입니다. 등기가 와 있는데요"


아, 데자뷔.


4월 초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2023년 4월 어느 토요일.

여느 때처럼 남편 머리를 이발하고 한창 청소기를 돌리던 참이었다.

미리 예정된 방문이 아니면, 기본적으로는 '사람 없는 척'을 하는 것에 내 오랜 자취생활의 습관인데 이미 현관문 바깥까지 청소기 소리가 들렸을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인터폰 앞에 섰다. 혹시 NHK면 'テレビおいしい(텔레비전 맛있어)' 하며 일본어 모르는 외국인인척 하려고 했는데, 다행히 수상한 사람은 아니고 집배원 아저씨였다. (*NHK는 하청업체를 쓴 집요하고 강압적인 가입권유로 유명하다.)


대충 마스크를 쓰고 현관으로 나갔더니 내 앞으로 등기가 와 있었다.  

한낱 소시민, 그것도 집 밖에 모르는 가정주부 (고작 1년 사이에 내가 집 밖에 모르는 사람이 되다니)에게 이런 게 올 일이 없는데 갑자기 등기가 오면 좀 무섭다. 혹시 전에 했던 확정신고에 문제가 있었던 걸까? 내가 모르는 사이 나 뭐 저질렀나? 찰나의 시간, 별별 생각을 다하며 서명을 하고 우편물을 받았다. 연한 녹색의, 조금 두툼한 편지봉투였다.


어제도 집배원 아저씨의 손에는 그때와 비슷한 연한 녹색의, 조금 두툼한 편지봉투 같은 것이 들려있었다.

혹시 설마, 또? 







4월의 우편물은 시청의 상공관광과에서 온 것이었다.


작년 10월부터 올 3월 말까지, 우리 시에서는 '관광홍보대사의 고향명소 돌기'라는 이벤트를 열었다. 지정된 6개의 장소에 비치된 QR코드를 읽으면 디지털 스탬프장에 도장이 하나씩 찍히고, 도장을 다 모아 응모하면, 추첨을 통해 소정의 상품도 받을 수 있는 관광증진 목적의 이벤트였다. 


이 이벤트를 알게 된 것은 마감이 가까워진 3월. 나와 남편은 드래곤볼 모으듯 다급하게 도장을 모아갔고, 마지막 장소의 도장을 손에 넣자마자 응모를 마쳤다. 여자 아이돌의 싸인굿즈와 상품권, 두 가지 코스가 있었는데, 무얼 골랐을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겠지.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저 '통칭명(*시청에 등록된 일본생활에서 편의상 쓰는 이름) 말고 외국인 티 팍팍 나는 본명 써야지~ 외국인이 이런 시골까지 와서 이벤트 참가한 게 기특하다고 당첨시켜 줄지도 모르니까~' 정도로 우스갯소리를 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응모했는데, 그게 덜컥 당첨이 되어버렸다.





땅 파도 안 나오는 무려 만오천 엔어치 상품권은 1명한테만 주는 1등상이었다. 

오랜만에 손에 쥔 뜻밖의 돈(같은 것)이 너무 감격스러웠고, 전혀 예상 밖의 일이라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얼마나 기뻤냐면, 사실은 이 일자리도 없는 시골로 이사 와서 의기소침해 있었는데 그런 제게 큰 즐거움과 희망이 되어준 이벤트 어쩌고 저쩌고 이 이벤트를 기획 운영하신 모든 분들께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 이러쿵저러쿵 앞으로도 나 나름의 방식으로 우리 시의 좋은 점을 알려가겠다는 포부까지, 관광과 직원은 물어보지도 않았고 궁금하지도 않은 내 이야기를 구구절절 적어 시청에 감사메일까지 보낼 정도였다. (지금 보니 정말 부끄럽다)


그리고 그 이후, 눈에 보이는 경품 이벤트란 이벤트에는 모조리 응모하게 되었다.







맥주, 새로 나온 음료수 같은 소소한 경품에는 몇 번인가 당첨되었다.

바로 그제도 세븐일레븐에서 쓸 수 있는 맥주교환 쿠폰이 날아왔다. 다이어트 중이고 날도 더우니 남편 마시라고 줬는데, 소중한 맥주 한 캔을 양보한 나의 곱디고운 마음씨에 감동한 산신령님이 금도끼 은도끼 다 가져가라고 주신 경품이벤트의 결과가 (언제 뭘 응모했는지까진 기억이 다 안 나지만) 바로 이 등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별의별 생각, 달의달 기대감에 가슴이 뛰었다.


그러나 집배원 아저씨가 내민 연한 녹색의, 조금 두툼한 편지봉투에 써진 것은 내 이름이 아니었고, 마음속에 활활 지펴진 기대의 모닥불에는 물 한 양동이가 거침없이 쏟아부어졌다.


남편의 카드 유효기간이 다 되어서, 은행이 새로운 카드를 보내 준 것이었다.


푸시시식.



귀가한 남편에게 봉투를 건네주며, '오늘 말이야-' 하며 등기가 왔을 때의 정황을 이야기했다.

한참 동안 4월과 비슷한 시추에이션에 내가 짧게나마 얼마만큼 크게 기대했는지와 결국 이 카드여서 맥이 탁 풀렸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다 보니 바로 전날, 맥주 쿠폰에 당첨된 이야기도 이렇게 길게 했었나? 싶었다. 그땐 그냥 쿠폰을 캡처해 보내며 '당첨됐는데 너 마셔' 이 한마디로 끝났다.


생각해 보면, 당첨이라는 일 자체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될 확률'과 '안될 확률'을 따지면 '될'보다 '안될' 쪽이 더 높을 것이다. 그런데 몇 번의 성공사례를 통해, 우연한 행운을 마치 당연히 올 것 같이 느끼고, 당첨되지 않으면 마치 당연한 걸 못 누리게 된 것처럼 서운해지고 있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오늘도 그냥 '등기'가 왔을 뿐인데 혼자 헛물을 들이켜다 아쉬운 마음만 남았다.


블로그 핫토픽이나 홈&쿠킹에 내 글이 걸렸을 때도 그랬다. 각각 그 처음 한 번은 가슴 떨리게 기쁘고, 날 골라준 알고리즘과 최종검수를 통과시킨 얼굴도 모르는 담당자가 너무 고마워 그날 저녁엔 참이슬 파티를 벌였는데, 그것도 회를 거듭하면 할수록, '와아아아앍!!!!!'에서 '오..' 정도로 감동이 흐려졌다. 안 되면 안 되는대로 괜히 씁쓸하고 내 노력을 몰라주는 세상이 서운하고 야속했다.


이뿐만이 아닐 것이다.


남편이 아직 그냥 아는 남자일 때 온 풀밭을 뒤져 찾아와 준 내 귀걸이, 나 준다고 아껴둔 엄마의 크고 가벼운 프라이팬, 자주는 못 만나도 항상 그 모습 그대로 있어주는 친구와의 카톡, 내 외로울 일본생활에 많은 사람들과의 접점을 만들어 주고자 가족모임, 친구모임에도 불러주던 전 상사, 그리고 이 많은 글들 속에서 시답잖은 내 이야기를 발견하고 귀 기울여 들어주시는 여러분까지. 


이 모든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나열해 볼 수 있다는 건, 나는 꽤 운이 좋은 부류에 속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남편이 더 내게 잘해줬으면 좋겠고, 엄마는 내가 갔을 때만 주지 말고 한 달에 한 번씩 한국 물건을 국제우편으로 보내줬으면 좋겠고, 독자수는 천명까지 폭발적으로 늘고 내가 아주아주 유명해졌으면 좋겠다. 


그러나 현실은 쉬이 그리 되지 않고, 그렇게 되지 못해 아쉬워하는 동안에도, 당연하지 않은 행운과 호의가 오늘도 내 발치를 무수히 스쳐 지나갈 것이다. 너무 작고 많아 당연하게 느껴지던 것들을 하나하나 주워 담아 감사한 마음으로 품었을 때, 나의 매일은 좀 더 반짝거리는 모습으로 기억되겠지만, 알면서도 욕심이 눈을 가려 그게 잘 안된다. 


보라, 어제만 해도 파블로프의 개처럼 같은 색 편지봉투만 보고도 또 뭐 없나 해서는, 허허. 


조금 더 초연하고 청빈한 내가 되고 싶다.

지금 가지고 있는, 당연하지 않은 것에 좀 더 포커스를 맞추고 있는 그대로 기뻐하는 내가 되고 싶다. 


그러기 위해, 

스쳐 지나간, 당연하지 않은 나의 행운들에게, 한마디. 


고마워.




그리고, 또 와. 부탁이야.

(내일 6시에 축구 무료 초대권 당락 발표가 있다)



초연하고 청빈하고 있는 그대로를 기뻐하는 내가 되기에는 아무래도 좀 시간이 걸릴 것 같다.


 

인간은 그리 쉽게 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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