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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Jul 26. 2023

그래, 나 혼자만 살 순 없지

물주의 선택

이번주는 기록적인 폭염이 이어질 거라 하더니, 기상청의 예상대로 핫한 한 주를 보내고 있다.

어제는 39도, 오늘도 39도, 내일은 조금 시원해 38도.

더위가 드릉드릉 시동을 걸고 있는 10시 16분 현재, 34도.


이런 뜨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은, 나 혼자만이 아니다.


낮 시간, 우리 집에는 나 이외에 공식적으로 8개의 생명체가 존재한다.

어디서 들어왔는지 모를, 지금도 어딘가에 숨어서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그들'을 제외한 이 공식적인 8개의 생명체는, 모두 녹색이다.




식기건조대 위에 올려놓은 컵들을 정리하려고 손을 뻗었는데 잘 달구어진 공기에 컵들도 따뜻하게 데워져 있었다. 문득 카운터 위에 올려놓은 다육화분들이 생각났다. 만져보니 꽤 따끈따끈해져 있었다.


나야 얼음 동동 띄운 아이스커피도 마시고, 선풍기도 틀면서 어찌어찌 버티기라도 한다지만, 이 아이들은 오직 나에 의해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창조주도, 건물주도 아니지만 이들의 물주(는 사람)는 오직 나뿐일 것이니, 뭔가 해 주어야 할 것 같았다.


그래, 나 혼자만 살 순 없지.

살아도 같이 살아야지. 


결연히 일어나 바가지와 그릇에 찬 물을 담았다.

   


그리고 참방참방, 물에 담가 주었다.

따뜻했던 화분에서 열기가 조금씩 가시면서, 기분 탓인가 화분들이 까르르까르르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까지 해줄 필요가 있었을까 없었을까를 떠나, 갑자기 노천온천 같은 분위기가 형성된 베란다 앞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어렸을 땐 할머니가 기르던 화초들이 집에 아주 많았는데도, 강아지처럼 즉각적인 교감이 불가능한 식물에는 큰 흥미를 가지지 못했다. 대학생이 되고 나서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갑자기 식물에 흥미가 생겨, 로즈마리와 싱고디움을 데려왔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요단강을 건너보내고, 식물과는 연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잘라먹은 완두순 뿌리에 물을 줘 싹을 틔우고, 카레에 넣고 남은 당근 꼭지를 기르며, 식물들이 보여주는 어제와 다른 오늘을 지켜보는 맛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이 다육식물들은 작년 생일에 갔던 아시카가 플라워파크에서 데려왔는데, 여름의 우리 집은 너무 더워서 이 집에서 나는 첫여름을 이 아이들이 잘 버티어 줄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떨어진 이파리를 잎꽂이로 살려낸 작은 아이 하나가 고사했고, 크게 웃자랐던 한 아이는 아래 뿌리부터 썩어 올라오는 걸 발견해, 그제 막 줄기를 잘라 새로운 뿌리를 내어보려고 하는 중이다. 줄기꽂이는 처음이라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희망을 담아 매일 지켜보고 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더위는 냉탕에서 식혀줄 게 아니라 에어컨을 틀면 더 간단하게 해결되었을 것 같기도 하고 (41도까지 올라가 결국 틀었다)



이 와중에 전기회사에서 메일이 왔다. 오늘 낮 4시부터 5시까지 '절전 챌린지'를 한다는 것이었다.

작년의 같은 시기 전기사용량과 비교, 절전량 1킬로와트 당 1엔 상당의 포인트를 부여하는 이벤트다. 이런 달성감 느낄 수 있는 거 좋아해서 겨울엔 전기 다 끄고 명상도 하며 나름 유용한 시간을 보냈지만, 한여름, 그것도 하루종일 내리쬐던 열기가 채 식지 않은 시간에 절전한다고 나 스스로를 위험에 몰아넣을 수는 없다. 게다가 내겐 지켜야 할, 나만 바라보는 식물들이 있다. 이번 절전 챌린지는 도전하지 않는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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