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무겁지 않게. 너무 아프지 않게. 너무 부끄럽지 않게.
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닫혔다. 고개를 돌려 거울을 마주했다. 가장 익숙하지만 불현듯 낯섦이 느껴지는 얼굴이 거기 있었다. 안녕. 잘 지내고 있었니. 인사를 건네고 가만히 서서 오랜만에 마주하게 된 그 얼굴을 살폈다. 찬찬히 위에서 아래로 좌에서 우로 시선을 옮겼다. 시간도 참 야속하게 빠르지. 그렇지? 대답을 기대하지 않는 질문이 방황하는 사이 조그만 사각의 시간과 공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눈을 감아도 그대로 남아있을 얼굴을 보면서 구석구석 켜켜이 쌓여있는 과거 추억들을 찾아냈다. 지나간 줄 알았더니 다 여기 있었구나. 깊은 슬픔에 허덕이던 어느 겨울날의 아픔은 눈썹 옆에. 너무 좋아 환호성을 지룰 수밖에 없었던 어느 봄날의 기쁨은 양쪽 볼에. 몸도 맘도 뜨거워 패기로 똘똘 뭉쳐있던 어느 가을날의 열정은 콧등 위에. 맥주 한 잔 손에 들고 길게 늘어진 여유를 즐기던 어느 여름날의 오후는 입술 아래에. 언젠가 분명히 스쳐간 날들의 애씀이. 만족이. 후련함이. 좌절이. 오기가. 인내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며 생각했다. 사람의 인생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의 얼굴일 것이리라. 수많은 사람들, 경험의 모든 시간, 감내했던 감정들이 눈빛과 미소와 표정에 들어있다. 과거는 슬며시 지나가는 것 같지만 결국 내 마음과 얼굴 어딘가에 쌓이고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 부정할 수 없었다. 오늘도 지나면 내일의 어딘가에서 찾아낼 수 있겠지. 그래서 나는 오늘을 겸허히 보내겠노라 다짐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주문을 외웠다. 너무 무겁지 않게. 너무 아프지 않게. 너무 부끄럽지 않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