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 옆에 할미가 누워있다. 분명 쌔근쌔근 잠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침대에 눕히자마자 아가는 부스스 깨어난다. 할미는 바로 재울 자신은 없었지만 아가에게 바짝 붙어 아가 몸을 가만 토닥인다. 낸네~ 낸네~ 신기하게도 아가는 순순히 잠잠해진다. 사람 손길이 그리웠던 거다. 아가가 진정되었어도 할미 손은 멈추지 않는다. 혹 부산한 동작에 아가가 깨어날지도 모르는데 엉덩이를 두드리고 머리를 쓸어주고 이마와 볼을 어루만진다. 크기만 작을 뿐 모든 것을 민감하게 느끼는 살아있는 생명체가 경이로워 마음이 숭고해진다. ‘아가야, 할머니 네 옆에 있어. 할머니가 널 지켜줄게.’ 아가 등을 다독이는데 왈칵 뜨거운 눈물이 솟는다. 실은 할머니 안에도 소녀가 있고 그 소녀는 아가와 다를 바 없이 여리며 떨고 있는데... 할미는 자신의 불완전함과 이중성을 개의치 않고 소리 없는 눈물을 삼키며 아가를 향하던 호언장담을 이어나간다.
부유했던 실향민 부모는 남한에 내려와 억척같이 사는 법을 몰라 고생하면서도 자식들에겐 잘 사는 사람의 법도만 설파해 아이들을 당황시켰다. 갓 서른의 남자는 해외 경험이 전무하면서도 철없는 아내를 데리고 외국에 나가 가정을 꾸리겠다고 겁 없이 서약했다. 모두들 그렇게 무모했지만 모두는 그것이 최선이었다. 결국 할미는 가진 것 없어도 고상함을 배웠고 가장이 된 남자는 아이들 유학까지 감당하는 떡갈나무가 되었다. 우리는 몰라도 되는 것이다. 아가처럼 아무것도 모른 체 세상에 나와도 무엇이든 시작하고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아직도 등이 동그란, 귀여운 부리를 허공에 내민 아기 새 같은 아가를 내려다보다 할미는 문득 아가에게서 자신을 본다. 무력했던 자신이 자기 팔 안에 누워 있다.
어둑한 방에서 눈가의 물기를 닦으며 할미는 방금 전에 흘린 눈물의 의미를 추적해 본다. 내재했던 소녀의 센티멘털 감성일 거라고 가벼이 넘기려 했는데 그리 단순하지 만은 않을지도. 할미는 지그시 눈을 감는다. 나약했던 소녀 앞에 숙녀가 서있다. 여자가 보이고 어머니, 그리고 물기 마른 할머니로 바뀐다. 바짝 마른 나무 껍질처럼 바삭 주름진 할미 눈에 샘이 차오른다. 그 느닷없는 울음은 어리광도 설움도 아닌, 대단한 무엇 없이도 살아지는 기적 같은 삶에 감사! 스스로 체험한 해피엔딩에 대한 고마움의 복받침! 할미의 호언장담은 더 이상 실체 없는 메아리가 아니다. 자잘한 아픔과 슬픔, 고민과 기도의 밤을 거쳐 성장한 소심했던 소녀는 자신도 모르는 새 가지 풍성한 나무가 되었다. 지나온 켜 켜의 시간 속에 물기 촉촉한 이야기들이 가득 고였다.
할미는 아가보다 더 아가같이 울어버린 자신을 아가 몰래 추스르며 소중히 아가를 품는다. 두려워 떨던 소녀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여 전사된 할미의 든든한 팔 아래 아가는 안온히 잠들어 있다. 어쩌면 할미는 자신이 거친 비바람에도 쉽사리 부러지지 않는 튼실한 나무가 돼있는 것을 혼자만 모르고 있었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