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교시 언어영역이 시작되었다. 항상 자신 있게 문제를 풀어왔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역시 수능은 수능이었다. '아 이번에는 불수능이 되려 나보다' 하나하나 신중하게 풀어나갔다. 아니 오히려 너무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꼭 1등급을 맞아야만 하는 과목이기 때문에 내가 실수하는 가능성까지 생각해야 했다. 쓸데없는 생각에 시간을 조금 더 소비를 해서인지, 헷갈리는 한 문제를 여유 있게 풀 수 있는 시간이 나오지 않았다. 다른 모든 문제들을 다 맞았다고 가정하고 OMR 답안지에 먼저 컴퓨터용 사인펜으로 답을 옮겨 적었다. 답안지에는 내가 풀지 못한 1문 제 만이 빈칸으로 남아 있었다.
'침착하자. 남은 시간은 10분, 충분히 풀 수 있다.' 생각하며 나를 진정시켰다. 1등급 커트라인은 100점 또는 98점일 수도 있다. 이 한 문제가 대학의 등락을 결정할 수 있었다. 다시 한번도 안 해본 일을 시작했다. 49문제의 정답 개수를 세어보았다. 1번 10개, 2번 10개, 3번 9개, 4번 10개, 5번 10개. 3번이 하나 모자르다! 공교롭게도 나는 정답 중 3번과 4번이 헷갈리고 있었던 터였다. 다시 지문을 읽었다. 3번도 4번도 정달일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조금 더 3번이 문제가 원하는 답인 것 같았다.
"2분 남았습니다. 답안지 정리 마무리하세요. 추가 시간 없습니다." 감독관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이제 결정의 시간이 되었다. 저렇게 완벽하게 개수를 맞추는 것이 과연 정답일까? 아님 소신 있게 4번으로 가야 할까? 등에 땀이 흠뻑 젖었다. 냉정하게 다시 한번 생각하며 지문을 빠르게 다시 읽었다.
'그래 이건 3번이다.' 1분을 남기고 나는 답안지의 마지막 칸 번호에 색칠을 했다.
"시험 종료. 모두 펜 내려놓으세요. 지금부터는 부정행위로 간주합니다."
나는 양손을 털썩하고 책상 아래로 내려놓았다. 하루에 쓸 모든 기운이 다 빠진 것 같았다.
잠깐의 쉬는 시간 이후, 수리영역이 시작되었다. 문제의 수리영역. 2등급 이상을 맞기 위해서는 3점 문제는 당연히 다 맞히고, 4점짜리 문제를 많이 맞혀 1등급을 노려야 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4점은커녕, 3점짜리에서도 버벅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암기처럼 수학 공부를 한 것이 패배의 요인 같았다. 컴퓨터에 로딩이 걸린 듯, 생각이 다음으로 넘어가지를 못했다. 너무나도 당황스러웠다. 모의고사에서는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다. 나는 또 안 하던 짓을 시작했다. 이 시험의 1등급 커트라인은 몇 점일까 계산해보기 시작했다. 4점짜리를 3개 틀리는 88점 근처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이렇게 어려웠으니 다른 친구들도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4점짜리 2개는 과감히 포기했다. 나머지 문제라도 다 맞히자는 생각으로 하나씩 문제들을 풀어나갔다. 이번에도 모든 기력을 가져다가 썼다. 2교시가 끝나자 거의 탈진 상태가 되었다.
외국어 영역 전에는 점심시간이 있다. 나는 모의고사를 볼 때도 시험날에는 점심을 먹지 않았다. 원래도 졸음이 많은 탓에 점심만 먹으면 영어 듣기가 졸려서 도저히 집중이 안되기 때문이다. 수능시험 날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에너지 바 하나만 먹고 외국어에 돌입했다. 그나마 더 자신 있는 것이 외국어 영역이었다. 다행히 외국어는 시간을 남기고 다 풀 수 있었다. 커트라인은 높을 것 같았다. 98점 또는 100점이 될 것이었다. 실수가 없는지 다시 한번 살폈다. 조금 자신감이 올라와서 마지막 교시인 탐구과목 또한 무난하게 지나갔다.
그렇게 길었던 수능이 종료되었다.
하나 둘 책가방을 챙겨서 학교 밖으로 나갔다. 많은 아이들이 이제 해방이라면서, pc방을 가기 위해 뛰어나갔다. 그러나 나는 전혀 즐겁지 못했다. 답안지가 나올 때까지 집에서 쥐 죽은 듯 기다렸다. 인터넷에 답지가 공개되자마자 나는 몰래 채점을 시작했다. 먼저 언어 영역이었다. 아까 찍은 듯 풀었던 1문제가 있었다. 다른 문제들도 틀리면 안 되었다. 하나 둘 동그라미를 치며 페이지를 넘겼다. 다행히 결과는 100점이었다. 기분이 정말 날아갈 듯 좋았다. 이대로만 한다면, 나는 수시합격을 지켜낼 수 있었다. 이제 수리영역 채점을 시작했다. 첫 페이지에서 정답과 내가 찍은 답이 다른 문제가 보였다. 나는 빨간색 펜으로 비를 하나 내렸다. a+2b를 계산해야 했는데 a+b를 계산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천당에서 지옥으로 내려앉았다. 그러나 이것이 바닥이 아니었다. 채점을 해갈 수록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문제들에서 비가 내렸고 포기해서 찍은 문제마저도 불발이었다. 계산해보지 않아도 거의 절망에 가까운 정답률이었다. 더해보니 70점대가 나왔다.
더 이상 채점을 할 이유가 사라져 버렸다. 나머지 과목들을 모두 100점을 맞아 1등급을 맞는다고 해도, 수리가 3등급이 넘어가버리면, 불합격이었다. 게다가 망친 과목이 수리이다 보니 대부분의 의대에서 언수외 모두 1등급을 기준으로 내세우고 있어 재수가 확정이었다. 시간이 지나 저녁이 되자 예상 등급이 나왔다. 나의 예상 수리영역 등급은 4등급. 탈락이었다. 고등학교 3년 동안 한 번도 나오지 않았던 점수였다. 허탈함을 넘어서서 더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부모님과 함께 식사를 했다. 우리는 서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3년 전, 과학고등학교에서 떨어진 날의 저녁과 같았다. 아니, 훨씬 더 무거운 분위기였다. 모두 한숨을 쉬고, 밥도 입으로 잘 넘어가지 않았다. 시험을 망친 것에 엄청난 우울함이 찾아왔지만, 부모님의 얼굴에 몇 톤의 근심과 걱정이 드리워진 것이 또 마음을 아프게 했다. 정시로는 의대가 지원 불가능했다. 정시를 포기하고, 합격했던 의대를 제외하고, 나머지 의대들에 기대를 거는 수밖에 없었다. 단 하루의 시험으로 3년이 날아가버렸다. 나는 합격자의 왕관을 빼앗기고, 다시 다른 친구들과 같은 출발선... 그보다 몇 걸음 뒤에 서서 마지막 남은 희망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