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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란 May 26. 2021

우울한 사람의 곁에 산다는 것

우울한 사람의 가족, 연인, 친구라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앞선 글은 우울한 사람의 입장에 서서, 당사자의 심경을 적었습니다.     


정신건강의학 및 임상 장면에서 우울증, 즉 ‘주요 우울장애(Major Depressive Disorder, MDD)’로 진단 내리는 기준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우울하다”의 명재보다 더 복합적이어서, 대개는 기분부전 또는 증후군에 머무는 경우가 많지만, 그렇다라고 해서 우울을 경험하는 이들의 고통이 견딜만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우울과 불안은 평생 유병률(lifetime prevalence)이 가장 높은 심리질환이고, 이 말은 즉슨 우리 누구나가 살면서 한 번쯤은 우울한 상태가 될 수 있다는 말을 뜻합니다. 그리고 곧, 현재 내가 아니라면 나의 주변인 중 누군가는 우울한 상태일 가능성이 있다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우울한 사람의 곁에 산다는 것 


우울에 대한 심리과학적 이야기, 이 두 번째 편은 

우울한 사람의 주변인을 위한 이야기입니다.     


정서질환인 우울에 대해 소개하면서, 우울한 심경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이 얄궂다고 말했습니다. 한 마디로 이 모든 고통이 ‘기분의 문제’라는 것이었지요. 신체질환은 특별한 설명을 요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독감에 걸리면 상태가 어떤지 구태여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눈에 보이는 증상으로써 드러납니다.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고, 기침 소리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오한에 몸을 떠는 모습에 주변인들이 먼저 들어가 좀 쉬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권해오게 됩니다.     


하지만 이 심리의 질환, 특히 정서질환은 신체질환과는 사정이 다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고충에 대하여 타인의 ‘수긍’을 얻기 얼마나 힘든지, 오래도록 앓아서 성격처럼 굳어진 내인성 우울을 겪고 있는 이들이라면 공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때 출근하고 식사를 챙기는 것, 집안일을 건사하고 약간의 취미활동을 하는 보통의 일과를 유지하기 힘든 우울이 “어째서, 무엇이 그렇게 힘들다는 것인지” 기분과 속을 뒤집어 내놓아, 남에게 완전히 보여줄 길이 없다는 것이 한스럽습니다.     


그리고 이 점이 우울을 겪고 있는 주변인의 고충이기도 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우울을 말할 때, “병원 가서 당장 약을 먹자”고 권하는 경우는 아직도 꽤나 적습니다. 심리질환을 개인의 성격과 결부해 낙인찍는 경향이 있는 한국문화의 잔재도 영향일테고, 향정신적 약물치료에 관한 불신과 우려도 한 몫 할 것입니다. 


하지만 서양권이라고 해서 상황이 크게 다른 것은 아닙니다. 분명 병원과 상담치료를 찾는 데 더 적극적인 경향이 있지만, 서양의 주변인들도 가까이 우울한 사람을 발견하면 전문기관을 찾아 치료 받도록 권하는 문제(해결)중심적인 도움보다는 우울한 기분이 된 이야기를 들어주거나 더 자주 연락하는 등의 정서적인 방편으로 우울한 이를 도우려고 합니다. 누군가 크게 넘어져 무릎이 찢어지면 일으켜 부축해서 상처를 꿰매도록 할 텐데, 이것을 보면 심리질환에 반응하는 주변인들의 대체적인 경향성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유사한 것 같습니다.  


처음 가족이나 연인, 친구의 우울을 알게 되면 

주변인들은 마음을 씀으로써 그의 기분이 나아지기를 소원합니다. 


끼니를 챙기고, 전보다 더 자주 안부를 묻고, 기분을 살피면서 함께 시간을 보낼 때에도 자신의 욕구나 선호사항보다는 우울한 사람의 편에 서려고 노력합니다. 낭만적인 선물이나 우울 극복에 관한 책, 유투브 영상 등을 보내주기도 합니다. 일시적이나마 기분이 나아지고 위로 받았다고 하면 안심하고, 어떤 이들은 이를 통해 내가 좋은 부모, 자녀, 애인이 맞는지 확인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울은 어떤 감동적인 일화로써 사라지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우울이 주는 무기력으로 인해 외출이 내키지 않는다는 친구를 설득해 맛집에 데려갔고, 한강공원에 앉아 멋진 야경을 보기도 했습니다. 이전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겠지만, 힘이 되고 싶은 마음에 집까지 바래다주고 장문의 위로 카톡을 보내기도 합니다. 덕분에 오늘은 어제보다 나은 것 같다는 말에 안심스럽지만, 다음 날 친구는 다시 우울하다고 말합니다.     


우울한 사람의 직장동료, 지인처럼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할 때 관계를 지속함으로써 느끼는 주된 감정은 무기력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울한 그의 상태에 점차 익숙해지게 됩니다. 우울로 인해 출근시간에 늦는 것이나, 일처리가 기민하지 않은 것이 일상화됩니다. 답답하기도 하지만 심리적인 어려움 때문이라고 하니, 배려로써 감안하게 됩니다. 하지만 지속되면 사교 모임같은 자리에는 그를 초대하지 않고, 배제하는 경우도 나타납니다. 함께한데도 활기차게 보내지 못할 모습이 예견되기 때문에, 필요 이상의 관계맺음은 줄어드는 것입니다.     



한편 우울한 사람과 가까운 주변인들의 사정은 다릅니다. 

가족, 특히 배우자나 정서적인 교류가 짙은 애인이 우울을 호소한다면, 

이 주변인들은 함께 가파른 감정의 파도를 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조금씩이나마 나아질 것을 기대하면서 애정을 쏟지만 이렇다 할 호전이 없다고 느낄 때 좌절하고, 자신의 역할이나 역량을 의심하게 되기도 합니다.     


“내가 힘이 될 수 없는 사람인 걸까?”     


이것은 무력감입니다. 할 수 있는 것은 뭐든 했지만 내가 사랑하는 이를 원천적으로 기쁘게 할 수 없다는 걸 절감할 때, 우울한 사람의 곁에서 이들은 무력하다고 느낍니다.      

어떤 경우에는 위하는 마음의 반대 면에 불거진 답답함과 화를 표현하기도 합니다.      


“언제까지 우울할래? 너 때문에 나까지 우울하다.”     


도리어 먼 지인보다 더 날카로운 말을 뱉기도 합니다. 여전히 별다른 감정의 동요를 보이지 않거나, 더욱 절망적으로 슬퍼하면서 등 돌리는 우울한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주변인에게도 슬픔이 몰려옵니다. 우리의 관계는 영영 이대로일 것인가? 절망스러운 것입니다.




우울한 사람의 곁에 살면서 함께 감정의 격동을 타고, 

최선을 다했지만 사랑하는 이를 감정적으로 구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느낄 때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가장 먼저 자기 자신을 위해, 나아가서 돕고자하는 상대를 위해서 어떤 시각과 방편이 필요한지, 다음 편에서는 주변에 우울한 가족 또는 지인이 있다면 알아야 할 몇 가지 사실을 적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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