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의 취약점으로 작용하는 소인/요소는 무엇인가?
우울한 사람의 곁에 산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우울한 마음을 토로할 때 무엇을 해줄 수 있고, 또 어떤 것들은 인간된 한계로 인해 할 수 없는지 앞서 다뤘습니다. 일축하자면 저는 우울한 사람의 곁에 계신 분들께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우울한 사람을 우선시하며 어린아이처럼 돌봐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다가 자신도 지치고, 무리하게 되면 관계가 점점 악화되는 것을 봐왔기에 씁쓸하지만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소신껏 글을 쓰고 나서도 어째서일까? 마음이 영 무거웠습니다. 아마도 그 이유는 증후군(syndrome) 수준 이상, 즉 "우울증이다" 라고 진단할만한 수준의 정서문제를 겪고 계신 분들에게 곁에서 버텨주는 사람의 존재가 무척 중요하고, 주변 사람들이 나에게 응답하지 않는다고 느낄 때 더 깊은 절망감에 빠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 겁니다. 그래서 이 마지막 파트를 가장 공을 들여서 부디 도움이 되도록 써내려가야겠다고 재차 작심을 했습니다.
이 마지막 파트는 주제별로 나눠서 적어보려고 합니다.
최근 트라우마(trauma, 심리 외상) 관련 연구분야에서 외상 후 스트레스만큼 주목하고 있는 개념이 외상 후 성장이랍니다. 애초에 전쟁같은 외상사건을 겪는 사람이 적어져야 하겠지만, 불의의 교통사고, 자연재해 등 통제 불가능한 삶의 재앙을 겪은 사람들 중에서 오래도록 스트레스를 호소하면서 악몽을 꾸고, 심리적 고통 때문에 알코올에 의존하는 사례가 있는 반면에 경험한 외상사건의 충격 대비 재활을 더 효과적으로 해낸 사례도 있었습니다. 이런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타고나는 요인도 있을까? 같은 고민을 우울증 연구자들은 수십년 전부터 오래도록 해왔습니다.
원조 출처가 무엇인지 확언하기 어렵지만, 어느 날 SNS에서 이런 표현을 봤습니다.
직장상사같은 남도 아니고, 바로 나 자신의 기분을 맞춰주기 참 버겁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표현이 우울한 사람의 심정을 너무나 실감나게 대변하고 있어서, 발견한 순간 무릎을 탁 쳤습니다.
어릴 적부터 겪어 온 여러 인간군상을 떠올려보면, 분명 힘든 사건을 전혀 겪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대개 낙천적이고, '기본 값 감정'이 좋은 편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지간한 일은 금새 훌훌 털어냅니다. 한편, 쉽게 우울해지는 경향이 있는 사람은 기본 값 감정이 다소 침체되어 있거나, 어느 정도 괜찮다가도 급속도로 다운되고 울적해하는 모습을 반복합니다. 이들 사이에 어떤 원천적인 차이가 있기에, 어떤 사람은 스트레스를 겪어도 원만하게 넘어가는 반면에, 누군가는 크게 고꾸라지는 것일까? 우울해지기 쉬운 사람 자신도 한탄스럽게 여기면서 의문을 가진 적 있을 것입니다.
** 지금부터 설명하는 우울해지기 쉽도록 타고난 기질에 대한 이야기는 대개 명확한 외부요인[예. 가족과의 사별, 반려동물의 죽음(pet loss), 교통사고 및 자연재해 등 심리적 외상 사건] 없이 중증도 이상으로 우울해진 경우에 해당한다는 것을 감안하여 이해해주시기를 당부합니다.
사람의 성격을 구성하는 요소는 무엇인가?
유행을 타고 있는 MBTI처럼 학술계에서는 오래도록 BIG-5 성격 구성요소가 사용되어 왔습니다. 대다수 연구자들이 사실 사람의 성격이란 너무나 복합적이고, 처한 상황과 주변 관계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단 몇 가지 구성요소의 조합, 레벨만으로는 단정할 수 없다는 것에 동의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경우를 아우를 수 있는 보편적인 요소를 다섯 가지로 요약한 것이 성격 5요소 "빅 파이브"입니다.
여기에는 MBTI와 유사하게 <외향/내향성>이 포함되고,
타인으로부터 쉽게 호감을 살 수 있는 성격요소인 <우호성(agreeableness)>,
낯설고 새로운 환경, 상황에 더 열린 마음으로 접근하는 경향인 <개방성(openness to experience)>,
다양한 삶의 과제에 근면성실한 태도로 임하는 <성실성(conscientiousness)>,
끝으로 각종 부정정서를 더 쉽게 느끼는 경향인 <신경증(neuroticism)>이 있습니다.
심리학적으로 neurotic(뉴로틱)한 성격은 구어적으로 "신경질적이다"는 것과는 의미가 좀 다릅니다.
겉으로 짜증이 많고 날카롭게 구는 것과 다르게, 성격 차원에서 신경증 경향이 짙은 면은 주로 당사자가 겪는 내적인 경험과 관련되기 때문이지요. 무슨 뜻인지 실감나게 전달하기 위해서 예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출근을 하다가 만원 지하철에서 발을 밟혔습니다.
너무 놀라고 아파서 악! 소리를 질렀지만, 범인으로 추정되는 사람은 사과도 없고 슬쩍 무시해버리고는 다음 역에서 유유히 내려버립니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불쾌할만한 일화입니다. 화가 나고 괘씸해서 어쩜 남의 발을 밟아놓고 시치미 뗄 수 있느냐고 따지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도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이 일을 겪고 나서, 부정적인 감정 여파를 '얼만큼, 얼마나 길게' 겪느냐가 신경증과 관련이 있습니다.
A는
발을 밟히는 봉변을 당하고 나서 불쾌했지만 속으로 시원하게 욕 한 마디 해준 뒤 사무실에 도착하자 평소처럼 모닝커피 한잔을 내리고 아침 업무를 시작합니다. 동료와 짧은 수다도 나누고, 탕비실에서 간식으로 당충전 했더니, 출근할 때 발을 밟혔던 일은 거의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흐려집니다.
반면 신경증 수준이 높은 B는
범인이 유유히 현장을 떠나고 나서 사무실에 도착한 뒤에도 오전 업무 시간은 물론이고, 점심시간을 지나 퇴근이 가까워 오기까지 엉망이 된 기분이 나아지지 않습니다. 평소에는 신경 쓰이지 않았던 옆자리 동료의 키보드 타자 소리가 너무 커서 거슬립니다. 머리 끝까지 짜증이 차오르는데 소리를 지를 수도 없고, 답답한 마음으로 일 처리를 하려니 잘 되지 않아서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것 없는 하루가 처량하기까지 합니다. 퇴근 후 집에 돌아와서도 하룻동안 일어난 불쾌한 일들을 곱씹게 됩니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더 짜증이 나고 우울해집니다.
가장 안전한 건 이불 속이라고, 우리가 밖에 나가서 타인과 소통하면서 하루를 사는 한 외부로부터 어떤 일을 겪을 것인지 100%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입니다. 예시 일화처럼 지하철에서 발을 밟힐 수도, 비매너 운전자로부터 난폭운전의 피해를 입을 수도 있는 게 불확실한 이 세상입니다.
그런데 A와 B 사이 차이를 통해 짐작할 수 있듯이, 같은 외부자극 사건을 겪더라도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게 경험되는가'에 큰 차이가 납니다. 결국 우리의 감정은 주어진 사건 그 자체보다는 그것이 소화되는 방식과 효율성에 의해 더 큰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더 높다고 해서 무조건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이 장의 최종 목표가 보통보다 연약한 마음을 관리하면서, 전보다 쾌활하고 힘차게 살아가기 위한 길과 방안을 찾는 것이라는 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