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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란 Jun 18. 2021

감정 피부

신경증(neuroticism) 정서 기질과 우울




타고난 소인인 신경증(neuroticism) 수준이 높아서

이렇다 할 충격, 스트레스성 사건 없이도 남들보다 더 우울해지기 쉬운 성격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가능성이 더 높다고 해서 반드시 그렇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심리학자들이 말하길, '정서 조절(emotion regulation)'을 하기 위해서는 

(1) 먼저 나와 타인의 감정이 현재 어떠한지 알아차리고, 더 나아가서 

(2) 내가 슬픔, 불안, 공포, 분노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고 있는 걸 알아차렸을 때, 그 정도(즉, 정서의 강도)를 줄이거나 긍정적인 정서를 불러와서 기분전환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자신의 감정 상태를 아는 것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불쾌한 사건을 겪어서 빠르게 심박이 오르면서 손발에 땀이 나고, "아 짜증나!" 라고 알아차린 뒤에는 이제 '이 감정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방안이 필요합니다. 이어지는 글들을 통해 다루겠지만 이렇게 정서를 조절하기 위한 전략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개략적으로 맛보기를 하자면 심리학자들이 정서조절을 위한 전략(strategy)을 익힌다고 표현합니다.

단어 선택을 통해 짐작할 수 있듯이, 어떤 타고난 능력이 아니라 배워서 숙달할 수 있는 전략이라는 데에 큰 의미가 있습니다. 일종의 스킬이고 기법인 것입니다.


정서조절 전략을 이용해서 그저 그런 정서상태를 더 긍정적으로 고양하는 방향도 가능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이 정서조절을 필요로 할 때는 주로 스트레스성 자극을 겪고 부정정서가 커져서 잠재워야 할 때입니다. 불길처럼 강렬한 부정정서가 일어나서 화재 진압이 시급한 것이죠. 


정서조절을 전략적으로, 효과적으로 잘 해낼 수 있는지 여부가 중요한 이유는 우리 인간이 강한 부정정서 상태에 있을 때는 최선의 선택을 내릴 수 없기 때문에 더 그렇습니다. 실제로 기본 값 정서가 불안정한 특성이 짙은 사람들을 연구했더니, 불안 정서가 촉발될 때 스트레스 상황을 어서 일단락해버리려고 성급한 선택을 하고, 연구자가 제시한 문제가 객관적인 기준에서 그리 어렵지 않았는데도 오답을 택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다수의 연구결과가 밝히길, 사실 가장 정석적인 정서조절 전략은 환경(심리학 용어로는 정서를 일으킨 '선행사건')에 개입을 해서 바꾸는 거랍니다. 예를 들어, 회사생활을 하면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면 그 환경을 떠나거나(퇴사), 불합리한 기업문화를 바꾸기 위해 구조적인 변화를 강구하는 전략을 쓸 수 있습니다. 그로써 변화가 가능하다면 부정정서를 반복적으로 일으켰던 원인 자체가 해결되거나 더 나아지는 셈이기에 장기적으로 바라봤을 때 가장 이로운 방법입니다.


하지만 매번 이렇게 환경 변화를 취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직장으로 인해 우울, 분노, 굴욕감을 겪게 된다고 해서 모두 퇴사할 수 있다면 이만한 방법이 없겠지만, 모두가 대담하게 벌이를 쉴 수 있는 게 아니고, 개인이 나서서 기업문화 변화를 촉구하는 것 자체가 직장 내에서 밉보이거나 입지를 위협 받을 수 있는 상황이 흔하게 존재합니다. 



이럴 때, 즉 부정정서를 일으키는 환경 자체를 바꿀 수 없을 때 

연구자들은 '내 안에서 일어난(provoked) 정서'에 직접 개입해서 조절을 시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한국인이 특히 자주 사용하고, 별다른 연습을 요하지 않아서 쉽게 택할 수 있는 건 스스로 정서를 무시하는 겁니다. 쉽게 말해 '별 것 아니야' 라고 치부하면서 감정에 빠지지 않게끔 자신의 정서를 억압하고 회피해서 실질적인 여파를 줄입니다. 직장에서 화가 났다고 해서 폭발적으로 표출한다면 곤란을 겪게 될 게 뻔하기 때문에, 일단 조금 진정이 될 때까지 시간을 버는 기능도 있습니다. 하지만 속으로 펄펄 끓는 부정정서를 매번 없는 것처럼 취급하면서 무시한다면 분명히 탈이 나게 됩니다. 국내 심리학자 일부는 한국에서만큼은 '화병'을 정신질환 진단 통계 편람인 DSM(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에 공식적인 심리질환 중 하나로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로, 살아오면서 늘상 참고 억눌러온 부정정서가 소화불량이나 불면증 등 신체증상까지 일으키기 때문에, 정서를 억압하고 회피하는 게 결코 능사는 아닙니다.


그래서 문화 공통적으로 연구자들이 입을 모아 권하는 정서조절 전략은 

  -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 인정하고, 

  - 내면에서 일어난 부정적인 감정을 부정하거나('아냐, 나는 슬프지 않아') 

     자기비난하면서 평가하지 않고('이런 별 것 아닌 일에 불안해 하다니, 나는 정말 나약해') 수용하면서

  -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방식으로 정서를 말로 표현해서 해소하거나(즉, 수다를 떨거나)

  - 부정적인 경험에 대해, 그럼에도 찾을 수 있는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해서 소화하는 방법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런 전략을 사용할 수 있는지, 이어지는 편에서 가상 사례를 들면서 상세히 다루겠습니다. 





다시 원래의 주제인 우울의 원천(이유)으로 돌아와서,

신경증 수준이 높은 사람은 대개 격렬한 정서상태를 경험합니다.


남들은 별 것 아니라고 쉽게 말하지만, 

타고난 감정의 피부가 얇기 때문에 아주 조그마한 상처를 입어도 피가 철철 나고

잘 아물지 않는 것입니다. 


실제로 신체에 상처를 입었을 때와 비슷하게, 드러난 피부는 또 다시 상처 입기 쉽고 여러 번 상처를 입고 회복되어서 피부 층이 어느 정도 두꺼워지기 전까지는 아픔과 더딘 회복의 연속입니다. 예견할 수 있다시피 이처럼 격렬한 부정정서를 느끼기 쉬운 사람의 사정을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기 때문에 고독함을 느낍니다. 


가령 "쟤는 참 유난이야" 라는 평가를 듣게 되면, 이 평가마저 격렬한 정서경험을 하는 사람에게 더 뼈아프게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참 한스럽게도 일종의 연륜과 나이테가 쌓이기 전까지 우울해지기 쉬운 사람의 10~20대가 휘청휘청 위태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자녀 간에 계승이 될 정도로, 성격적으로 타고난 외-내향성을 완전히 반전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듯, 

성격심리학 분야 연구자들은 어느 정도 유전적으로 타고나는 소인(predisposition)인 신경증 수준을 아예 낮게 만드는 것은 어렵다고 입을 모읍니다. 


그렇다면 신경증 수준이 높은 사람은 꼼짝 없이 감정 롤러코스터를 타면서 우울해하고 화를 내며 요동쳐야 하는 것인가? 


희망적인 메시지는 타고나는 부분이 큰 신경증적 성격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하지만, 자신에게 잘 듣는 정서조절 전략을 배워서 외부 스트레스 자극으로 인해 일어난 정서경험을 보다 견딜만한 수준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후천적인 노력을 통해서 타고난 패널티를 약화할 수 있습니다. 



저를 포함한 한국사람들은 유독 Why에 관심이 많습니다.


어떤 일이 좀처럼 마음대로 되지 않고 틀어질 때, "왜 이래? 문제가 뭐야?" 하면서 원인을 규명하고 이해하기 바랍니다. 원인이 내적으로 납득이 되어야, 그렇다면 이 상황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 How에 관한 이야기에 더 귀를 기울이게 되고, 수긍하면서 낯설지만 그럼직한 새 방안들을 실천해볼 의지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이 글에 언급했던 정서조절 전략을 포함해, 남보다 얇은 감정의 피부를 가졌지만 그래도 괜찮은 마음과 기분으로 삶에서 목표하는 것들을 이루고, 안정된 사랑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기 위한 방안들을 다루기 앞서서, 다음 편에서는 우울증의 원천(원인) 중에 타고난 것 이외의 요인들을 살필 것입니다. 우울증에 대한 연구역사가 워낙 길고, 경험하는 사람마다 특수한 환경요인이 제3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에 단정할 수 없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들을 소개할 것입니다. 


몇 편을 할애해서 전개할 우울의 원천에 관련한 얘기를 통해서 내 마음이 무언가 대단히 어긋나고 잘못된 것 같은데, 도무지 뾰족한 원인을 알 수 없어서 더 괴로운 때를 견디고 계시다면, 스스로 내 사정을 수긍하고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이 편을 맺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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