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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란 May 12. 2021

우울한 사람의 편에 서서

우울한 사람은 전형적으로 어떤 감정 경험을 하게 되는가?



제가 사랑하는 심리과학이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의 마음세계에 의미가 되기를 바라며 서문을 남겨놓고서, 주제가 무엇이어야 마땅할지 고민했습니다. 현시대의 청년으로서 저에게도 익숙한 불확실성과 불안, 통제감의 이슈, 지겹지만 뗄래야 뗄 수 없는 인간관계 ... 다루고픈 주제들이 무궁무진합니다.     


여러 주제와 관련한 다양한 사례들이 떠올랐지만, 역시 이만한 것은 없을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바로 우울한 감정, 우울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울(감), 우울증이라는 복잡다난한 개념을 한편의 육중한 글로 다루기보다는, 세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보려고 합니다.

1. 그 중 처음은 우울감 또는 우울증(편의를 위해 이하 ‘우울’로 통칭하겠습니다.)을 경험하고 있는 당사자의 사정에 관한 것이고,

2. 그 다음은 우울한 사람을 가까이 곁에 둔 주변인의 입장에 관한 것입니다.

3. 그리고 가장 끝에, 남보다 쉽게 우울을 느끼는 기질과 경향을 지닌 사람이 보통보다 연약한 마음을 가지고, 어떻게 감정을 관리하며 전보다 활기차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인지 보다 변화지향적인 초점을 취해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우울한 당사자의 이야기입니다.     


“나 요즘 우울해”

“오늘은 좀 우울한 날이었어.”

“표정이 좀 우울해 보이네?”     


한국에서 우울은 그 본래 의미가 쇠퇴할 정도로 흔한 표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때론 기운이 빠지거나 울적한 기분, 슬픈 느낌을 ‘우울’로 통칭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실제로 미국에서 depression이라는 표현은 무게를 내포합니다. 한시적인 감정 상태라기보다, 보다 병리적이고 심리적으로 쇠약한 상태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타인에게 쓸 때는 실례가 될까봐 다소 조심스러워지는 표현이기도 하지요.     


사람마다 자신이 우울한지 판단하는 기준 요소와 정도가 다양합니다. 누군가는 일상에서 설렐만한 희소식이 없을 때 영 우울하다고 느끼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일상생활을 유지하기 힘들 정도로 정서적으로 소진되고, 급격한 체중변화를 겪고, 좋아하던 취미와 사교활동에서 더 이상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고, 몇 주 째 심정이 암담한데도 쉽사리 우울을 말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울이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과 양상도 일관되지 않습니다.      


J는 우울하고, 앞으로 남은 삶을 살아갈 것에 대해 암담해지면 폭식을 합니다. 

이 무서운 세상에서 ‘나는 아무것도 해낼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사무치면 정크푸드를 찾습니다. 먹는 중에는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유투브를 틀어놓고 마치 남의 삶을 사는 듯 내면의 괴로운 감정과 생각들을 마취합니다. 사실 어느 정도 이상이 되면 음식의 맛도 잘 느껴지지 않습니다. 자력으로 멈출 수 없는 폭풍같은 섭식이 마침내 끝나면 더 큰 자괴감이 몰려옵니다. 속은 더부룩하고 몸은 무거운데 밖에 나가 산책이라도 한 바퀴 할 기력도, 그런 마음도 들지 않습니다.      


K는 우울하고, 극심한 공허감이 밀려오면 술자리를 찾습니다.

유일하게 속 시원히 웃을 수 있고 살아있다고 느낄 수 있는 장면은 떠들썩하게 술판을 벌이면서 필름이 끊길 정도로 취해버리는 때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초저녁부터 술친구를 찾고, 여의치 않으면 온라인 벙개모임을 검색해보기도 합니다. 어떤 날엔 숙취가 너무 심해서 다시는 극단적으로 과음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자꾸만 결심이 무너집니다. 그냥 ‘술쟁이인 게 원래 나’인 것 같습니다. 술자리를 찾지 않고 견뎌보려고도 했지만 고독감이 사무쳐옵니다. 철저히 혼자 된 느낌이 싫어서 술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여러 가지 정신질환[심리장애에 관한 진단 편람인 DSM-5(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5; American Psychiatric Association, 2013) 한국어판부터는 사회적 편견의 해소와 인식 개선을 위해 기존 ‘정신장애’가 아닌 ‘정신질환’으로 용어를 수정했습니다.] 중에서도 친숙한 우울과 불안은 정동질환, 정서질환(affect disorder)으로 구분합니다.     


행동질환과 달리 정서질환의 얄궂은 점은 이 모든 고통이 ‘마음과 기분의 문제’라는 겁니다. 

우울과 불안에 약물치료가 효과적이지만, 현 상태가 어느 정도로 심각한지 진단부터 치료로써 얼마나 호전되었는지 효과까지, 온전히 마음과 기분의 상태로 판단합니다.      



우울은 정서질환, 마음과 기분의 문제      

‘마음’, ‘기분’ 이런 불특정한 피상적 단어들로 표현되지만 막상 우울은 매우 실체적이고 신체의 부상만큼 일상생활을 힘겹게 한다는 점에서 이 얄궂고 갑갑한 딜레마가 깊습니다.      


J는 ‘너의 우울은 네가 자초한 일이다.’ ‘나가서 산책이라도 해라’는 말을 지겹게 들었을 것입니다. 삶에 대한 암담함이 사무치면 마취약인 정크푸드를 갈급히 찾지만, 신체에 나타나는 피부와 체중의 변화로써 J도 이 음식들이 결코 건강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지겨운 훈수를 들어온 것처럼 무언가 다른 방안을 시도하는 것, 산책을 나서는 건 좀처럼 내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럴 기분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K도 끔찍한 두통과 함께 몰려오는 숙취의 잔재가 결코 유쾌하지 않습니다. 술자리에서 취기가 올라오면 ‘아, 또 이러면 안 되는데’라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이대로 자리가 마무리되고 고독한 집으로 돌아가는 게 두렵습니다. 오늘밤은 또 얼마나 외로울 것인가 상상하기조차 두렵고, 엉엉 소리를 내어 울어도 그 누구하나 관심을 가지지 않을 거라는 고독감이 공포스럽습니다. ‘왜 꼭 술이야? 그럼 다른 생산적인, 건강한 활동을 하면 되잖아?’ 많이들 추천하곤 합니다. 하지만 내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럴 기분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럴 기분이 아니다.” 내 마음이 내 마음처럼 되지 않는 것.

하루를 시작할 때 희망에 차고 에너지를 느끼며 활기찬 걸음을 떼는 행복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 희망처럼 되지 않고, 도리어 반대로 어떤 사건사고가 일어난 게 아닌데도 마치 재앙을 겪고 있는 사람처럼 암담한 심정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이의 마음은 깊은 우울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할 수 없는 그 이상의 고통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우울은 현재 버전의 진단편람이 구분하는 여러 정신질환 중에 다른 정신 및 신체질환과 동시에 발생할 ‘공병률(comorbidity)’이 가장 높은 질환입니다. 

우울로 인해 불안, 강박적인 사고가 발달하기도 하고, 반대의 설명도 유효합니다. 신체의 질병과 관련해서도, 가령 우울이 암을 유발하는 것은 아니지만, 항암치료 중인 암환자가 자신의 난치병과 관련해서 우울이 극심할 때 항암결과가 높은 확률로 더 비극적이라는 일관된 연구결과가 나타납니다.     

J의 우울은 섭식장애(폭식)와 공존하고, K의 우울은 약물사용장애(알콜중독, 알코홀리즘)와 공존하고 있습니다. 예견할 수 있듯, 공병 질환, 증상들이 많고 다양할수록 치료는 더욱 까다롭게 됩니다.     



왜 내 마음이 결코 내 마음같지 않은가,

시간이 약이듯 흐를수록 우울이 옅어지기는커녕 왜 더 문제를 추가하고 있는지     

목이 타면 물을 찾고, 배가 고프면 후각이 예민해지는 것처럼, 기분이 엉망일 때 우리 정신은 본능적으로 조금이나마 기분을 더 좋게 만들 수 있는 것을 찾습니다. 찾아낸 것이 음식일지, 술일지, 잠들어버리는 것일지, 마음의 고통을 잊고 일(시험공부, 회사생활)이나 건강하지 않은 관계에 몰두하는 것일지, 그 종류는 확률의 문제일 뿐 무엇이라도 될 수 있습니다. 진정 슬픈 일은 우리가 힘이 다 빠져서 걷지 못해 기어서 갈 때, 찾을 수 있는 것들은 최선이 아닐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정크푸드보다 직접 정갈하게 차린 건강한 식사가 몸에 더 좋고, 먹고 나면 자괴감이 덜 들 거라는 걸 J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후자는 힘이 듭니다. 

하루 이틀이 지나 씻겨나가는 오물처럼 걷히기를 간절히 바라는 우울이 일상을 침윤하여 오늘도 또 나를 괴롭게 하고, 내일도 오늘처럼 고통스러울 거라고 이제는 변화를 기대하지 않게 된 상태에서, 몸을 추슬러 장보기에 나서는 것은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입니다. 반면에 늘 그래왔던 것처럼 배달어플로 가격도 저렴한 페스트 정크푸드를 시키는 건 가능한 일입니다. 마음의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는데 가뜩이나 모자른 에너지로 얻을 수 있는 마취약이 있다면, 그것을 마다할 사람이 있을까요?      


가상 인물인 J와 K를 들어 우울의 다방면을 보면서, 오늘 우울을 경험하고 있는 그 당사자들에 대해, 그분들을 향해 제가 말하려는 것은 사실 단순합니다.     



우울할 때, 일상생활을 해내기 힘든 마음과 기분의 사유는 지당하고,

그럼에도 이 힘듦을 어찌 해보고자 그가 찾은 거의 유일한 방법은 

대개 남이 이해할 수 없거나 사회적으로 권장하지 않는 것이라고 해도, 

그에게는 그것이 간절한 타당한 사정이 있다는 겁니다.      



“네가 그러니까 당연히 우울하지.”

“집안에만 있으니까 우울하지.”

“과체중이니까, 취업 준비를 한다고 하고서는 정작 안하고 있으니까 우울하지.”      


우울하지 않은 사람의 논리를 우울한 사람에게 적용할 때, 저는 이 대화는 이미 유효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뒤이어 올 글, 우울한 사람을 주변에 가까이 둔 분들을 위한 글을 게시하기 전에 먼저 

이 글이 현재 우울한분들에게는 잠시나마 이해받는 기분을, 우울한 누군가를 아는 분들에게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웠던 우울의 모습들을 일면 새로운 시각으로 보도록 일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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