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아랑 Apr 22. 2020

불편한 진실과 유전학

유전학과 삶 #2

유전상담을 하다 보면, 알게 모르게 불편한 가족사를 알게 되는 경우들이 있다. 

굳이 알고 싶지 않은데, 굳이 알게 되는 그런 상황들. 

그래도 그렇게 굳이 알게 되는 정보들이 유전상담에 큰 도움이 된다.


가족력을 물어볼 때 가족들의 질환 유무만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가족 혹은 환자의 교육 정도, 살아온 환경, 삶의 경험 등을 알게 되는데, 이를 통해 상담의 방향을 잡게 된다. 예를 들어, 초등학교 학력만 있는 사람과 생명공학을 전공한 사람에게 "유전자"에 대해 설명할 때에는 굉장한 차이가 있을 것이다. 가족 중 암 투병을 하신 분이 있었던 암환자의 경우, 그 가족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따라 암에 대한 생각이 다를 것이다. 의료진에 대한 불신이 있었던 환자의 경우에는 내가 어떤 말을 해도 의심부터 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다양한 상황들 속에서 각 사람에게 맞는 유전상담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too much information (TMI)이 때로는 큰 도움이 된다.


하지만, 정말 TMI인 경우들도 있다. 나와 대화하는 것이 너무 즐겁다며 계속 말하고 싶어 하셨던 50대 중반의 어머님이 계셨는데, 얼마나 즐거우셨으면 심지어 "두둥" 이런 음향효과까지 내셨다. 참 귀여우신 분이었다. 그분은 자기 남동생이 이혼을 하게 되었는데, 이혼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 정말 자세하게 나눴던 대화들까지 재연해주셨다. 그날따라 환자가 많았던 나는, 이 날 학교에서 배웠던 모든 상담 기술들을 총동원해서 그 상황에서 빠져나가려 했다. 단답형으로 대답 유도하기, 화제 돌리기, 몸의 방향 돌리기 등등. 하지만 나보다 한 수 위셨던 이 환자분의 가계도를 그리는 데까지는 결국 한 시간이나 걸려버렸다. 보통은 빠르면 2-3분, 길면 15분 정도 걸리는 가계도 그리기가 한 시간이나 걸려버렸다. 그래도 참 재밌는 경험이긴 했다 :)




유전상담에서 가계도를 그리고 가족력을 아는 것이 왜 이렇게 중요할까? 

가장 간단한 대답은, 가족은 유전정보를 공유하는 사이이기 때문이다. 

유전정보를 공유한다는 것은 그 유전자가 좋든 싫든 받아들이고 어떻게 하면 이 유전정보를 가지고 이 한 세상 잘 살아가나 고민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좋은 유전자, 나쁜 유전자 이렇게 이분화해서 생각하라는 것은 아니다!)


오늘은 픽션인 듯 픽션 아닌 픽션 같은 가계도 하나를 바탕으로 내가 만났던 한 가족의 불편한 진실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한다. 내용은 많이 순화하였고, 픽션이 가미되어 있어 사실과는 많이 다르다. 


<참고>

<오늘의 케이스>

발달장애, 지적장애, 기형성 장애를 가지고 있는 2세 남아의 가상 가계도


오늘 가계도의 주인공은 화살표로 표시되어 있는 2세 남아로, 발달장애, 지적장애, 기형성 장애를 가지고 외할머니와 함께 내원했다. 이 남아를 표기하는 네모 바깥으로 괄호가 그려져 있는 이유는 입양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입양한 사람은 자세히 보면 맨 윗 세대에서 48세 a/w (alive and well)로 표기되어 있는 이 환자의 외할머니이다 (자세히 보면 * 표시를 해놓았다). 내가 사용하는 가계도 프로그램상 그릴 수 있는 기능이 없어서 못 그려 넣었지만, 보통은 가족 내에서 입양이 되는 경우 점선으로 입양한 사람과 입양된 사람을 연결시켜준다. 또한, 환자의 엄마와 아빠, 환자의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를 연결시켜주는 선에 / 표시가 되어 있는 이유는 이혼 혹은 더 이상의 관계가 없다는 의미로 그려 넣은 것이다. 


이 가계도에서 주목해볼 것이 몇 가지가 있다. 첫째, 이 환자의 엄마이다. 엄마도 발달장애와 지적장애를 가지고 있고, 현재 시설에서 생활중이다. 둘째, 환자의 아빠와 관련된 정보가 없다는 것이다. 외할머니에게서 환자의 병력, 가족력을 물어볼 때 아이의 아빠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환자의 외할아버지는 현재 미국의 다른 주에서 복역 중이고 폭력적인 성향 때문에 외할머니와 이혼했고, 정신과적인 문제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다만, 그 정신과적인 문제가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었다. 


이 가계도를 분석하면 더 많은 이야기가 나오겠지만, 오늘 주목할 것은 유전질환의 유무보다는 이 가족의 불편한 진실과 그것이 중요한 이유이기 때문에 그 이야기에 집중해보고자 한다. 


환자의 병력과 가족력, 의사의 진찰내용을 바탕으로 이 환자는 whole exome sequencing 검사를 진행하게 되었다. 이 검사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하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유전자의 exon, 즉 단백질을 만들어내는 암호를 지니고 있는 부분을 검사하는 것으로, 그 암호에 어떤 변이가 있는지, 그 변이가 질환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변이인지 아닌지를 분석하는 것이다. 이 검사의 핵심은 trio, 즉 환자와 그 부모님을 같이 검사하는 것이다 (세 명을 검사한다고 해서 trio 검사라고 한다). 그 이유는, 모든 사람의 유전정보가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당연히 유전자에 변이가 있는데, 그 변이가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엄마 아빠의 유전정보와 환자의 유전정보를 같이 분석함으로써 만약 건강한 부모님이 가지고 있는 변이를 환자도 가지고 있으면 이는 의미 없는 변이 (혹은 benign 한 변이)라고 여길 수 있게 된다. 물론 이렇게 간단하게 변이에 대한 해석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대략적으로는 이렇게 요약할 수 있겠다. 


이 검사에 대한 유전상담을 진행할 때 짚고 넘어가는 것 중 여기서 다룰 내용에 대한 것들만 간추리면, 유전자 검사이기 때문에 엄마가 진짜 엄마인지, 아빠가 진짜 아빠인지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 말은, 만약 혼외자식일 경우 밝혀질 수 있다는 의미이다. 또한, 만약 엄마 아빠가 "가족/친척" 관계일 경우 이것 또한 밝혀질 수 있다 - consanguinity라고 하는데, 이는 사촌끼리 결혼하는 경우 같은 것을 말한다. 중동지방이나 남미, 부족 단위로 생활하는 공동체, 유대인 같은 특정 집단 등에서는 흔하게 있는 일이다. 물론 지금은 많이 없어지는 추세이다. 이 whole exome sequencing을 만약 trio로 검사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은 경우에는 duo (이 가족의 경우에는 환자와 환자의 엄마)나 proband only (환자만)로도 검사할 수 있지만 특정 변이가 발견될 경우, 그 해석이 trio로 할 때만큼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이 모든 이야기를 들은 환자의 외할머니는, 한동안 뜸을 들이더니 가족의 불편한 진실에 대해 나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사실 환자의 아빠는 환자의 외할아버지라는 사실.

현재 감옥에 복역 중인 이유도 이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 

지적장애가 있는 딸은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도 모른 채 6개월이 넘도록 산부인과 진료를 받지 못했고, 임신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그 시설에서 연락이 와서 딸이 출산하는 것과 출산 후 아이의 양육 문제 모두 외할머니가 맡게 되었다는 것. 

현재 딸이 머물고 있는 시설과 소송 중이라는 것.  


더 이상은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지도, 들을 이유도 없었다. 정말 드라마보다 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이 현실에서 벌어진다더니, 이렇게 끔찍한 일이 어떻게 벌어질 수 있나 싶어 정말 많이 화가 났다. 환자의 외할머니가 이 이야기를 모두 나에게 한 이유는, 환자의 엄마 아빠의 DNA 샘플을 채취할 수 있는 방법과 그 가능성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몇 달 간의 노력 끝에 이 환자는 결국 trio로 검사할 수 있게 되었고, 검사 결과 열성 유전을 하는 유전자의 돌연변이에 의한 유전질환이 있음을 밝혀낼 수 있었다. 


열성 유전을 하는 유전자의 돌연변이에 의한 유전질환을 조금 설명해보면 - 우리는 모든 유전자를 두 개씩 가지고 있는데, 두 유전자에 모두 변이가 있어야 유전질환이 생기는 질환들을 말한다. 만약 둘 중 하나에만 변이가 생기는 경우에는 유전질환이 나타나지 않는데, 이는 변이가 없는 유전자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유전자에만 변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보인자"라고 한다. 이 가족의 경우, 환자의 외할아버지가 그 유전질환에 대한 보인자였기 때문에 환자의 엄마도 50%의 확률로 그 유전자의 변이를 물려받은 것이다. 만약 이 환자의 아빠가 외할아버지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가족이 아닌 사람), 이 환자가 그 유전질환이 있을 확률은 1/10,000도 안 되는 수치였을 것이다. 같은 가족/친족 내에서 결혼을 금하거나 반대하는 이유가 바로 이 열성 유전을 하는 유전질환의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이유들도 있지만.


유전학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여기서 이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이다 - 환자의 엄마의 경우에는 보인자라는 이야기인데, 그럼 환자의 엄마는 왜 발달장애와 지적장애가 있는 것일까. 환자의 유전질환과는 별도의 문제로, 환자의 엄마를 따로 진찰 및 검사를 해보지 않고는 알 수 없다. 




세상에는 참 끔찍한 일들이 많다. 

현실이 더 드라마 같고, 더 더럽다. 


유전상담을 하면서 이런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는 경우가 흔하지는 않지만 종종 있다. 이보다 더한 가족력들도 많이 봐왔다. 처음에는 이게 미국이어서 그런가? 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어디 이게 미국이어서 그렇겠는가. 한국뿐만 아니라 세상 어디에나 이런 이야기들은 존재한다. 그 누구도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는 마주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있어서도 안 되는 일들이다. 


이런 상담을 끝마친 날이면 항상 같이 일하는 동료 유전상담사들과 맥주나 와인을 한 잔씩 했던 것 같다. 어떻게든 머릿속에 남아있는 잔상을 없애야 할 것 같아서. 참 씁쓸한 현실이다. 


세상이 꽃동산이면 얼마나 좋을까. 


꽃동산을 꿈꾸며,

Arang Kim, MS, CGC

Certified genetic counselor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위의 이야기는 가상의 가족력을 바탕으로 유전상담을 하면서 느꼈던 것들을 재구성해본 것이다. 어떠한 오해도 없으시길!)

이전 10화 자폐와 유전학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