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학과 삶 #4
나는 손예진님을 참 좋아한다.
그래서 손예진님 나오는 영화는 다 봤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이 글을 쓰려고 영화 필모그래피를 찾아보니 안 본 게 더 많아서 당황. 어쨌든 이 영화는 한 3번 본 것 같다. 볼 때마다 펑펑 울었던 기억이 ㅠ.ㅠ 너무 슬퍼.
근데 그 와중에 손예진님은 정말... 너무 예쁘다 :)
물론 영화여서 극적인 상황을 위해 27살의 수진이가 알츠하이머에 걸린다는 설정이 나왔지만 과연 저렇게 어린 나이에도 알츠하이머병에 걸릴 수 있는 걸까? 더 정확히 말하면, 알츠하이머 증상이 발현될 수 있을까?
치매 증상을 보이는 여러 유전질환들 중에 오늘은 알츠하이머병을 다뤄보고자 한다. 알츠하이머병은 가벼운 건망증으로 시작해서 치매, 판단력 장애, 언어 장애, 환각, 간질, 근경련, 대소변의 실금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 알츠하이머병의 약 95%는 late-onset form(>60-65세)으로 나타나고, 약 5% 정도는 early-onset form(<60-65세)으로 나타난다.
UCLA 소아 유전학과에서 일할 당시, early-onset form의 알츠하이머병 가족력이 있는 환자와 마주쳤던 기억이 난다. 소아 유전학과라고 해서 소아 환자들만 만나는 것은 아니고, 성인들도 본다. 소아 유전학과 밑으로 여러 클리닉을 운영하는데, 그중 하나가 치매 클리닉이다. 당연히 치매 클리닉에는 성인들이 주 환자들이고, 간혹 가다 만 18세가 되기 이전의 청소년 중에 치매 가족력에 대해 상담을 받고, 유전자 검사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오는 환자들이 있다. 성인이 되기 전 환자들에게 알츠하이머병이나 파킨슨병 같은 성인기 발병 유전질환에 대해 유전자 검사를 권유하지는 않는데, 그 이유는 증상이 발현되는 나이가 대부분의 경우 고령이고, 아직은 정신적으로 미성숙하다고 판단되는 청소년기에 유전자 검사를 해서 얻는 이득이 적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당시 치매 클리닉 담당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환자를 직접 상담하지는 않았다. 상담을 끝나고 나오는 환자와 마주쳤고, 매니저를 통해서, 그리고 케이스 컨퍼런스를 통해서 그 환자와 가족력에 대해 알게 되었다. 다행인지는 모르겠다고 한 이유는, 환자를 보다 보면 감정이입이 될 때가 있는데, 난 이 환자를 상담한 것도 아니었는데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감정이입이 되었기 때문이다. 일할 때 내 철칙 중 하나는 감정이입을 최소화하고 특별히 힘들었던 케이스는 빨리 잊어버리는 것인데, 이 환자는 어쩌다 보니 지금까지도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환자가 되고 말았다.
<가계도 수식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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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츠하이머 가족력이 있는 28세 남자의 가계도>
당시 그 환자의 나이는 28세였고, 이야기를 풀어가기 쉽게 기억나는 것들을 바탕으로 가상의 가계도를 만들어보았다. 세 번째 줄의 1번에 작은 화살표가 있는데, 이 화살표가 오늘 우리가 볼 환자를 의미한다.
가계도를 살펴보면, 환자와 환자의 여동생(세 번째 줄의 2번) 모두 건강하다. 환자의 아버지(두 번째 줄의 6번)와 작은 아버지(두 번째 줄의 5번) 모두 PSEN1 유전자에 변이가 있다고 표기되어 있다 (이 유전자에 대해서는 밑에서 설명!). 환자의 다른 작은 아버지(두 번째 줄의 4번)는 54세에 치매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55세에 교통사고(MVA)로 돌아가셔서 유전자 검사를 받지 못하였고, 환자의 고모(두 번째 줄의 2번) 같은 경우에는 치매 증상이 45세쯤에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유전자 검사는 아직 받지 않은 상황임을 알 수 있다. 환자의 친할아버지(첫 번째 줄의 1번) 같은 경우, 55세쯤 치매 증상이 시작되셨고, 60대에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친할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당시에는 유전자 검사가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에 증상이 어떠했는지, 다른 가족들 중 비슷한 증상이 있는 분들은 없었는지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대략적으로만 봐도 우성유전을 하는 치매질환이 할아버지 세대부터 유전되어 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더 윗세대부터 내려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우리 할아버지보다 윗 세대이신 분들은 평균수명이 짧았기 때문에 증상이 발현되기 이전에 돌아가시는 경우가 많았고, 그로 인해 상대적으로 모두 건강하셨다고 기억될 가능성이 높다. 이 환자의 가족에서는 치매 증상이 발현되는 나이가 상당히 어리기 때문에 70-80대에 발병하는 일반 치매보다는 어떤 유전질환에 의한 증상임을 의심할 수 있다. 이미 작은아버지(두 번째 줄의 5번)와 아버지(두 번째 줄의 6번)께서 유전자 검사를 통해 PSEN1 유전자에 변이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 가족의 치매는 알츠하이머병 중에서도 early-onset form에 의한 것이라고 알 수 있다.
이 환자가 처음 우리 클리닉에 오게 된 이유는 한 달 전 돌아가신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사촌들과 함께 치매와 관련된 가족력을 이야기하다가 유전자 검사를 통해 자신들도 변이가 있는지 알아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대화를 나눈 후였다고 한다. 사실 정말 정말 쉽지 않은 문제이다. 만약 변이가 있다면, 언제 증상이 나타날지 모를 두려움에 일상생활에 지장을 받을 수 있고, 변이가 없다면 변이가 있는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 혹은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감 등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많은 치매클리닉들이 정신과와 협업을 한다. 실제로 검사 결과와 상관없이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사례들이 있기 때문에 여러 번에 걸친 상담과 후속 상담 등을 시행한다.
치매클리닉의 가장 중요한 규칙 중 하나는 절대 혼자 상담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반드시 가족 중 한 명이 같이 와야 한다. 부득이하게 가족이 안될 경우에는 친구라도 함께 오도록 안내한다. 이는 검사 결과에 따른 부담감을 가족과 나누고 함께 온 가족이 계속해서 환자를 보호 관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우리 클리닉에도 예전에 검사 결과를 듣고 집에 가다가 목숨을 끊은 사례가 있었기 때문에 더 철저히 지키는 규칙이었다. 하지만, 항상 예외는 있기 마련. 이 환자 같은 경우에도 똑같이 안내를 해드렸지만, 정말 혼자 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어서 내부 회의 끝에 유전자 검사 전 상담만 우선 해보기로 했다.
* 유전자 검사 전 상담에는 주로 검사를 받으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파악하고, 검사를 통해 나올 수 있는 결과들, 결과가 의미하는 것들, 결과를 통해 받을 수 있는 정신적인/감정적인 문제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등에 대해서 상담을 하게 된다. 상담을 받으면 반드시 검사를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검사를 받지 않는 것도 방법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상담을 통해 알게 된 이 환자는 정신적으로 매우 성숙했고, 가족들과의 대화뿐만 아니라 정신과 상담을 통해 이미 유전자 검사에 대해 많이 생각해보고 온 상황이었다. 아버지 장례를 치른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은 시점이라 감정적으로 유전자 검사를 받기로 결정한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웠지만, 여러 번의 상담과 정신과 컨설팅을 통해 유전자 검사를 하기로 결정했다.
이 환자의 경우에는 이미 아버지께서 PSEN1 유전자에 변이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PSEN1 유전자의 그 변이만 딱 검사하면 된다. 따라서 결과는 그 변이가 있다 혹은 없다로 나오게 되는 것이다.
검사 결과가 나온 날, 내 매니저 유전상담사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오랫동안 치매클리닉을 운영한 상담사라 하더라도 이런 결과가 나오는 날이면 하루 종일 힘이 빠지기 마련이다. 환자가 상담을 받으러 왔고, 그날도 역시 혼자였다. 이 환자를 아는 클리닉의 모든 사람들이 걱정했지만, 생각보다 담담하게 결과를 받아들였다.
양성.
아버지와 똑같은 PSEN1 유전자의 변이를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로부터 50%의 확률로 유전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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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EN1 유전자에 대해 잠시 얘기하자면:
- Early-Onset Familial Alzheimer Disease (EOFAD)의 원인 유전자로는 APP, PSEN1, PSEN2 정도가 알려져 있는데 (원인을 모르는 경우도 있음!), 그중 20-70% 정도의 환자들이 PSEN1 유전자에 변이를 가지고 있다. (범위가 큰 이유는 어떤 논문에서 발췌한 수치냐에 따라 다르기 때문!)
- 증상 발현 연령이 보통 40-50대라고 알려져 있지만, 30세-65세까지 다양한 연령에서 발병된 기록이 있다.
- 보통 증상이 발현하고 6-7년에 걸쳐서 빠르게 진행된다.
- 간질, 경련, 언어장애 등이 나타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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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는 28살.
환자는 언제 증상이 나타날지 모르는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 일반적인 건망증도 의심해가면서.
가족 중 가장 어린 나이에 증상이 나타났던 고모처럼 이른 나이에 발병을 하게 된다고 가정하면, 남은 시간은 17년. 물론 60대에 증상이 나타날 수도 있지만, 환자 입장에서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생각해보기 마련이다.
이 환자는 당시 유럽에서 유학 중이었던 23살의 여동생과 몸이 편찮으셔서 양로원에서 생활 중이셨던 어머니께 결과를 말씀드려야 하나 많은 고민을 했다. 그 누구도 쉽게 받아들이기는 힘든 결과였기 때문에. 그래도 다행히 검사와 관련해서 대화를 나눴던 사촌들이 서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좋은 네트워크를 형성해 놓았기 때문에 너무 외롭지 않게 상황을 잘 해쳐나가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한창 예쁜 나이에, 이 환자는 이제 자신에게 닥쳐올 암울한 미래를 받아들이고 준비해야 한다. 나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잊어버리게 될 미래를 두려워하며, 연애와 결혼도 조심스러워지고, 은퇴 후 삶을 꿈꾸며 돈을 모으기보다는 증상이 시작되면 들어갈 시설의 비용을 모으게 되겠지.
이 환자의 상담이 끝난 후, 매니저는 환자가 집에 잘 들어갔는지 확인 전화를 했고, 며칠에 걸쳐서 안부를 물었다. 치매 클리닉의 또 하나의 규칙은 상담 당일과 일주일 후 안부 전화를 걸어보는 것이다. 필요한 경우 후속 상담을 진행해야 되기 때문에.
치매.
이 단어가 주는 무거움이 있다.
누군가의 아픔, 슬픔, 괴로움 등이 담긴 말이라 그런가 싶다.
그날, 그 환자가 클리닉을 나가는 뒷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젊디 젊은 28살이라는 나이에, 자신의 미래를 봐버린 한 청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낼 그의 삶을,
나는 앞으로도 진심을 다해 응원할 것이다.
5월 말인데 여름 같기도 하고, 겨울 같기도 하고...
Arang Kim, MS, CGC
Certified Genetic Counselor
(Reference: Alzheimer Disease GeneReview - https://www.ncbi.nlm.nih.gov/books/NBK1161/)